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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1호]소소하게 나누는 부자지간
칼럼_정덕재의 일상르포
최근 내가 펴낸 시집을 읽은 뒤 아들의 첫마디였다. 시집의 뒤편에 실려 있는 발문은 시에 대한 인상과 감상평을 담았다. 발문을 쓴 사람은 바로 스물두 살 된 아들 녀석이다. 결국 본인이 쓴 글이 좋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냥 웃어 주었다.
지난해 하반기 마지막 원고를 교정보는 사이에 출판사 편집부에서 제안이 왔다. 대개는 유명한 평론가나 저자가 알고 있는 작가들이 발문을 쓰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번 시집은 시인의 아들이 직접 써 보는 것도 좋겠다는 취지였다.
시의 주요 소재가 아들의 고딩 생활이다. 시집 제목도 ‘나는 고딩 아빠다’로 정했다. 녀석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아들의 생활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잡설이라는 이름으로 2년 가까이 신문에 연재를 했다. 우연찮게 연재 글을 보던 한 출판사에서 청소년을 소재로 한 시를 써 보라는 연락이 왔다. 그래서 나온 게 청소년 시집이고, 자연스럽게 아들이 발문을 쓰게 된 것이다. 스스로 좋다고 말한 발문의 시작은 이렇다.
“아빠는 나에게 불량 식품 같은 느낌이다. 맛있지만 자극적이고 몸에는 안 좋은 그런 느낌 말이다. 어렸을 때 처음으로 집에서 배달음식을 시켜 먹거나 쌀쌀한 축구장에서 함께 컵라면을 먹을 때도 그랬다. 집에 들어올 때 아빠가 치킨이나 피자 같은 음식을 사 올 때도 그랬고 노상 방뇨를 하던 아빠를 보고 따라 했을 때도 그랬다. (중략) 아빠는 가끔씩 불량식품처럼 다가와 내 기억 속에 남았다. 거기에는 불량식품의 중독성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불량식품의 중독성으로 시작한 발문은 부자간의 관계가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것으로 발전하고 있다. 시집에 실린 첫 작품은 <손톱을 깎으며>라는 시다. “아들의 손톱을 깎은 지/ 어느새 열아홉 해/한 달에 두 번가량/ 때 지난 신문이나/ 정기 구독하는 잡지를 펼쳐놓고/ 아들의 손을 잡는다/ 어느 날은 촉촉하고/ 때로는 메마른 손가락을 보며/ 내가 손톱을 깎는 이유를/ 단 한 번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아들의 손톱을 깎는 이유는 세상을 만나는 관계의 시작이 손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싶어서였다. 세상의 모든 청소년들은 사회에 나가 많은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며, 관계를 이루며 살아갈 것이다. 그 손을 잡고 동행하는 경우도 있을 테고, 때로는 손을 뿌리치고 돌아서는 일도 있을 것이다. 아름답거나 때로는 차가운 손을 생각하라는 뜻에서 손톱 깎는 이야기를 시로 표현했다. 다음은 발톱에 대한 시다.
“아들의 발톱을 깎은 지/ 어느새 열아홉 해/ 잡지위에 떨어진/ 핏빛 부메랑 같은 손톱을 모으면서/ 나이 들어 가는 골격과/ 청춘의 발톱을 만진다/ 마디가 굵어진 발가락을 보며/ 내가 발톱을 깎는 이유를/ 딱한 번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아들의 발톱을 깎는 이유는 세상을 딛는 최초의 접점이 발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자신이 딛고 있는 조직과 단체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살피라는 뜻이다. 인생의 행로를 가면서 남게 되는 수많은 발자국, 그것을 지탱하는 골격의 중요성을 메시지로 주고 싶었다.
청소년의 고딩 생활은 대개 비슷한 생활리듬을 가지고 있다.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은 밤늦게까지 학교에서 지낸다. 정규수업이 끝나면 보충수업, 이어서 야간자습까지 아침 일찍 나가서 별을 보면서 돌아오는 모습은 그 자체가 측은하다.
지나고 나면 아픈 고통도 추억으로 남기 마련이다. 때로는 오래된 상처로 남아 아물지 않기도 하지만, 세월이라는 서랍에 묻어 두는 경우도 많다. 아들의 같은 반 친구로부터 받은 편지는 지금도 생생하다. 야간자습을 끝내고 돌아온 아들이 아무 말 없이 건넨 편지 한 통이 있었다. 같은 반 여학생이 나에게 보낸 편지였다. 시집에는 편지의 내용을 이렇게 옮겼다.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중에 작가님의 시와 칼럼을 보았어요. 우리 반 친구 아빠라서 반갑고 신기했어요. 교실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겠죠. 대학에 왜 가야 하는지 무슨 공부를 해야 하는지 답답한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어요. 글도 잘 쓰고 싶어요. 결국엔 어디든 대학에 가겠지만 혼란의 연속입니다.”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친구의 아빠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학생은 자신의 복잡한 마음을 어디에든 털어놓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 편지를 고통을 해소하는 치유의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답장을 이렇게 썼다.
“꼰대 같은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미 꼰대가 되어 버린 무명의 작가는 좋은 글은 유리창과 같다는 조지 오웰의 산문을 인용하고 말았다. 잠언과 조언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답장을 한 뒤에 무릎을 쳤다.”
그러면서 나는 미처 쓰지 못한 편지의 내용을 사족과 같이 시로 옮겼다.
석양이 들어오는
교실 유리창이 부끄럽게 물들면
손가락으로 두드려 보렴
네 손이
곱게 물들었으면 좋겠구나
아들을 통해 그 학생이 어느 대학에 입학했다는 말을 들었다. 돌아보면 그 여학생도 힘겨웠던 시기를 잘 견뎌냈으리라고 짐작한다. 지금은 대학 캠퍼스에서 또래 친구들과 함께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유쾌한 수다를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딩이었던 우리 집 청년은 대학을 휴학하고 군 입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발문의 일부를 보면 청년의 고민이 잘 드러난다.
“시를 읽으면 그때가 생각나고 친구들을 비롯해 주변 인물이 언급될 때마다 잊고 있던 상황들이 다시 떠올라 좋았다. ‘영국에서 축구 구경’, ‘가불청년’은 고딩의 억압에서 벗어나 있는 최근의 내 모습이다. ‘가불청년’에 나오는 이야기가 일상인 나는 이 시를 마냥 재밌게 읽을 수만은 없다. 청춘을 저당 잡히지 말라는 시 구절을 씁쓸한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청년 세대들의 불안과 도서관에 가면 공무원 수험서만 보이는 상황이 남의 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십대의 고민은 이십대의 상념으로 옮겨질 수밖에 없다. 그 생각의 폭은 더욱 넓고 깊어진다. 먹고사는 문제부터 존재의 정체성까지, 청년의 다양한 고민은 종종 방황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방황은 살아온 생애와 살아갈 생애를 함께 살핀다는 점에서 지극히 교육적이다.
시집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아들과 또래의 친구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저마다 삶의 방향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체감할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이미 그 방향이 달라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삶을 해설하는 발문이 가능할까. 수많은 조력자들이 도움을 주고 이끌어 주기도 하겠지만 삶의 방향을 바라보는 이는 본인 자신일 것이다. 내가 아들의 고딩 시절을 소재로 시를 쓴 것은 자신의 길을 생각해 보라는 의미가 크다. 나는 시집의 끝머리에 시인의 말을 이렇게 썼다.
“이 시집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시인의 아들로 살아가가기를 바라는 지극히 사적인 선물이다. 선물이라는 게 때로는 받은 사람이 다른 이에게 몰래 주는 경우도 있고 형편에 따라 중고 매장에 내놓기도 한다. 이 시집이 누군가의 손을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녀 읽히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아들과 또래의 세대들이 걸어갈 길에는 험난한 고개가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고개를 넘기 바란다. 인생의 발문은 스스로 써야한다는 사실을 되새기면서, 함께 넘어가는 그 고개 너머에 눈부신 태양이 빛나고 있다는 것을 믿었으면 좋겠다. 그 희망마저 버린다면 우리 인생은 너무 쓸쓸하지 않은가.
나는 진지한 고민을 해 보라는 말을 던지고 있지만 아들이 궁금한 것은 정작 따로 있었다.
“근데 발문 원고료는 언제 들어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