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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29호] 양보하지 않다 _ 홍승희 작가 인터뷰
홍승희 작가 인터뷰
아마 개인의 사적인 고백에 불과한 글들이었다면 쉽게 넘겨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보편성이 있다. ‘붉은 선’ 앞에서 망설이고, 자책하며 고통을 속으로만 삭이던 많은 여성의 이야기들이 겹쳐 읽힌다. 물론, 모두가 동의할 수는 없을 거다. 그리고 이는 ‘홍승희’라는 특정할 수 없는 한 개인의 기록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누군가를 대변할 유능한 영웅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을 직접 말할 수 있는 환경과 관계다(《붉은 선》, 110쪽)”라는 책 속의 문장처럼 이 책은 자기 삶을 직접 말할 수 없었던 이들을 대신해 말한다.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다. 그녀와 주고받은 편지에 가까운 글을 조금 다듬었음을 미리 밝혀 둔다.
A. 처음에는 잃을 게 없는 사람이라서 저처럼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을 돕고 싶었고, 나중에는 잃을 게 없는 사람들과 연대해서 가진 것 없고 어딘가 삐뚤어진 사람들도 온전하게 포용되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어요.
A. 학생운동을 하다가 망했어요. 진보당 활동을 했는데 해산을 했고, 그 시기에 오랜 연인과 헤어진 후 삶에 회의감이 들더라고요. 다 놓고 절망하고 좌절할 때 처음 물감을 들었어요. 그때가 스물세 살이었어요. 언어로 저 자신을 전달하면 해석되고 분류되잖아요. 그런 폭력이 싫었는데 그림으로 내뱉으면서 편안함을 느꼈어요. 언어로 다 담을 수 없는 감정, 느낌을 자유롭게 그릴 수 있어 좋았어요.
A. 모르는 사람들은 실명이 드러났는데 괜찮으냐고 걱정해 주세요. 저는 괜찮아요. 모르는 여성에게서 용기가 된다, 나도 섹슈얼리티 기록을 쓰고 싶어졌다는 메시지를 받아요. 그럴 때 기뻐요.
A. 고정된 정체성이라는 건 없으니까요. 저는 최근에 이인이라는 예명을 얻었어요. 이인증이라는 정신증이 있는데, 나에게서 떨어진 느낌, 꿈을 꾸는 것처럼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느낌의 정신증상이라고 해요. 이인증이라고 불리는 증상이 계속 있어 왔는데, 이 태도가 윤리적인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자각몽을 꾸듯이 오늘을 살아 내면, 내가 역할극을 하고 있구나, 의식할 수 있어요. 역할극에 침식되어 삶의 감각을 잃어버리잖아요. 그러지 않을 수 있게 해 주는 감각, 증상인 것 같아서 이인증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림 그리고 글 쓰고 퍼포먼스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한 이유는 행위로 저를 겨우 설명할 수 있어서예요. 예술가라는 호칭도 예술의 의미를 독점하는 것 같아서 양심에 찔려요. 모든 사람이 예술가고, 모든 노동과 행위가 예술이 될 수 있는 거니까요.
A. 비체는 건강한 자아, 주체가 되기 위해 밀어내야 하는, 누구나 밀어내고 있는 더러운 것이에요. 저는 그것을 문란한 여자, 더러운 성행위, 난잡한 일상, 규칙적이지 않은 생활, 규정지을 수 없는 삶을 사는 백수, 쓸모없는 행위… 이런 존재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고정된 물질이 아니라서 쉽게 정리되지 않아요. 그래서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거죠. 그런 존재를 밀어내고 싶어서 여성의 자리를 벗어난 여성을 혐오하고, 남자를 욕망하는 남자를 혐오하는 정동이 있는 것 같아요. 이런 혐오의 자리에 있는 사람이 “그래 나 더럽다 어쩔래”라고 말하는 ‘비체 선언’으로서 비체라는 개념을 썼어요.
A. 폴리아모리가 그다지 특별한 방식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1년 동안 만났던 사람하고 폴리아모리를 하자, 말했었는데 실제로 둘 다 다른 사람을 진득이 만나진 않았어요. 저에겐 스쳐 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질투를 하긴 하지만 누가 누구를 소유하거나 구속시킬 수 없잖아요(이건 너무 당연한 거고요). 헤어진 이유를 생각하면 폴리아모리여서가 아니라 그냥 안 맞게 되고, 시절이 지나고, 이런 이유인 것 같아요. 뭐라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지만요. 그러니까 폴리아모리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게 아주 힘들고 고된 일인 것 같아요. 폴리아모리는 단지 서로가 언제든 떠날 수 있고, 소멸하고 있다는 걸 각성하는 상태라는 점에서 기존 독점관계와 다른 것 같아요. 서로를 타자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줘서 존중하고, 더 거리를 두고 보게 되고요. 저 자신의 수행인 것 같아요.
II 홍승희, <아가미>, 2016
A.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과 인간이 만나면 그게 누구든 언젠가 이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사랑은 애도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 김선우 시인의 말처럼, 저는 사랑이 애도하는 행위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좋아할수록 슬플 수밖에 없고, 소멸하고 있으니 애틋할 수밖에 없고요. 영원한 사랑은 지금이라는 공간에서만, 아주 찰나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아요. 사랑은 불가능한데, 어떤 순간에는 가능한 게 아닐까요?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A. 저도 결혼이라는 제도가 낯선 타자와 타자가 관계 맺는 방식을 담기엔 너무 낡고 좁은 그릇이라고 생각해요. 폴리아모리는 새로운 관계 맺기의 방식이에요. 새롭다고 표현했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그리 새롭지 않은, 특별하지 않은 개념입니다.
A. 구체적으로 죽는 걸 계획하면서 버텨요. 최근에는 저 대신 죽을 사람을 끌어내서 소설을 쓰고 있어요. 그 사람이 죽는 걸 상상하면서 버티고, 또 언젠가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는 죽고 싶진 않지만 내일이 되면 또 모르죠. 그러다가 또 죽고 싶으면 아, 마지막 유서를 쓰자는 심정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기타를 치거나 그러다 보면 다시 아침이 오고, 이런 식으로 견뎌 가는 것 같아요.
A. 처음은 한겨레 칼럼에 성노동자에 대한 낙인을 주제로 글을 썼을 때예요. 그때 데스크에서 전화가 와서 괜찮겠냐고 저를 걱정했어요. 지금까지 대마초, 낙태수술 등 온갖 불법행위를 송고했는데 성노동에 대해서는 유독 신문 독자가 보수적이라서 이건 폭탄이 될 것 같다고 말했어요. 성노동, 섹슈얼리티 금기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직면했어요. 그러면서 제가 희생할 필요는 없다고, 진짜 피해받는 성노동자에게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고 조언하더라고요. 저는 희생하는 게 아닌데 말이에요. 안 쓰는 게 희생이라서, 희생하기 싫어서,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낙인이 되는 게 웃기고 답답해서 쓰는 건데요. 그리고 ‘순수한’ 성노동자 피해자가 아니라는 발상도 웃겼어요. 저는 자발적이고 여유가 있기 때문에 진짜 성노동자가 아니라는 거죠. 성노동자가 얼마나 납작한 이미지로, 덩어리 피해자로 묶여서 인식되고 있는지 실감했어요. 그게 혐오인데 말이에요.
A. 낙인에 갇히는 건 예상했던 일이고 각오했어요. 사실 제가 발화를 하든 안 하든 저는 언제든 창녀, 더러운 년, 걸레라는 소문을 듣고 살았고, 그런 기표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눈치 보고 억압받는 기본값이잖아요. 말해도 욕먹고 안 해도 욕먹는다면 그냥 말하고 욕먹는 게 낫다고 저희 언니(홍승은)가 말했는데, 정말 공감되더라고요. 또 저 말고도 옆에 함께 낙인 속으로 들어가 균열을 내려는 사람들이 있어서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이제 웬만한 욕을 들어도 웃기기만 해요. 분노스럽고 아주 환멸이 들기도 하지만 절망스럽진 않아요.
A. 맞아요. 성노동자, 창녀라는 기표가 수치스러운 것이 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안의 더러움을 인정하고 “그래 나 더럽다 어쩔래”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게 낙인과 금기를 부수는 힘이 될 거라 생각해요.
정희진의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여성이나 페미니즘이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타자 내부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억압이다. 여성들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여성 해방이다. 여성을 여성으로 환원하는 것이 가부장제이기 때문이다.”(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29쪽) 우리는 ‘여성’이라는 언어를 벗어나 한 개인으로 존재하기 위해 여성주의를 공부하고, 투쟁한다. 결국에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르고, 주변의 비웃음이나 사게 될지도 모르며, 괜한 언쟁으로 피곤한 여자라는 소리나 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싸움을 멈출 수는 없다. 생각보다 ‘여성’이라는 기표가 아주 촘촘하고 광범위하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까닭이다.
홍승희 작가를 만난 적은 없다. 그녀의 책을 읽고 몇 개의 질문과 답을 주고받았을 뿐이다. 책을 읽는 일은 폭포 아래를 지나가는 일과 비슷하다. 언어의 물방울은 허공에서 떨어지고 그것을 스쳐 지나갈 뿐, 그 과정에서 만나는 것은 그 언어들로 환기된 자기 자신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책으로 그녀를 만난 게 아니라, 언어로 미처 만나지 못했던 나를 다시 만난 셈이다.
여기에 ‘차이’가 있다. ‘다름’이 있다. 언어라는 붉은 선을 넘어서 그녀는 이미 다른 서사를 만들어 내는 중이다. 붉은 금을 밟고 서 있는 그녀를 응원한다.
II 홍승희, <붉은 선 위의 비체>,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