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10호] 도시 풍경 안에 녹아든 '메시지'를 만나다

#.01 

골목을 걸었다. 비가 내린다는 예보를 확인했다. 혹시 몰라 작은 우산을 준비했다. 대문 밖을 나서자마자 빗방울이 떨어졌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는, 인적에 놀란 참새 떼가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금방 멈춰 버렸다. 그 모양새가 묵직한 상대에게 짧은 잽을 뻗었다가 바로 빠지는 아웃복서처럼 신중하다. 그 신중함 뒤에 자리한 가벼운 장난기는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 뒤에 숨겨 두었다.

우산을 폈다, 접었다 반복하는 일에 흥미를 잃을 때쯤, 트럭 위에 우뚝 선 채로 벽을 바라보고 있는 아저씨 두 분과 맞닥뜨렸다. 트럭 뒤꽁무니에 ‘작업중’이라는 메시지를 내걸었다. 빨간색과 흰색만으로 표현한 메시지는 도드라졌다. 하늘을 뒤덮은 구름 때문에 사위가 그리 밝지 않았음에도 ‘세 음절’은 딱 부러지게 눈동자에 찾아들었다.

아저씨들은 형광색 조끼와 안전모를 벗어 두지 못했다. 다음날 비가 내리지 않으면 또 어딘가 모를 공사현장에 투입돼 하루 종일 서 있을 게다. 어찌 생각하면 참 고단한 인생이다. 고스란히 투영되는 ‘고단함’도 푸드덕거리며 내리는 빗줄기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 덕분에 무뎌진다. 어차피 삶이란 그런 것이다. 예민하게 돋았다가 무뎌지는 것. 아저씨 두 분은 벽을 바라보며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을 참이다.

                  

                 

#.02

멀리서 벽에 붙은 예쁜 하트 모양을 발견하곤 괜스레 마음이 설렜다. 넓은 벽 한쪽에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게 붙여 둔, 하트는 공간에 적절하게 어우러졌다. 조금 진한 지중해색도 감각적이다. 분홍이나 빨간색이었다면 너무 직접적이어서 코끝이 간지러웠을 텐데, 그렇지 않았다.
하트에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 감각적으로 아름다운 모양이 담은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담장앞 쓰래기 버리지 마소”였다. 전체 공간에 하트를 그려 넣은 감각은 월등하였으나 하트 안에 집어넣은 메시지는 조금 아쉬웠다.

글자 수에 맞게 공간을 배분한 것은 좋았다. 가장 넓은 가운데 부분에 다섯 글자를 넣고 폭이 좁은 윗부분과 아랫부분에 똑같이 세 글자씩을 넣은 건 논리적인 공간 배분이다. 그래도 ‘버리’와 ‘지’가 위아래로 떨어져 있는 건 영 거슬린다. 글자를 전체적으로 아래로 좀 내려서 가운데 공간에 여섯 글자를 배치하고 아래에 두 글자만 배치했어도 좋을 뻔했다.


그럼에도 경고성 메시지를 예쁜 하트 안에 담아내는 센스나 ‘고소’와 ‘고발’ 등 위협 문구를 제시하지 않은 것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 우연히 만난, 인간미 넘치는 메시지는 골목에 활기를 준다. 그런 측면에서 ‘쓰레기’를 ‘쓰래기’로 잘못 쓴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의미는 명확하게 전달이 되니, 메시지로서 지녀야 할 요건은 충분히 갖춘 셈이다. 설마 ‘쓰레기’는 아는데, ‘쓰래기’는 무엇인지 모른다는 편집증적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겠는가.

                     

                     

#.03

쓰레기와 관련한 메시지는 최근 도시 골목에서 가장 흔하게 마주치는 ‘메시지’다. 상점 홍보 전단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트 모양 메시지와 비교하면 뚜렷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개인과 관공서가 보여 주는 차이 말이다.


우선, ‘금지와 원칙, 불법투기’라는 낱말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CCTV 촬영장소’라는 위협을 담은 문구도 도드라진다. 현수막 아래로 대형 화분도 보인다. 한때 쓰레기 불법 투기를 막는 혁신적 아이디어라도 되는 것처럼 골목 곳곳에 등장했다가 이제는 그 효용성을 의심받으며 사라져 가는 추세다. 이곳에서도 역시 대형 화분은 상가를 잘못 알고 들어온 문상객처럼 안절부절못한 채 자리만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 당혹스러운 것은 그 아래 흩뿌려진 수많은 음식물, 일반, 재활용 쓰레기다. 일부러 그런 것처럼 공격적이다.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는데 상대에게 철저하게 무시당했을 때 느끼는 절망감은 참혹하다. 호응 있는 메시지만이 비로소 생명력을 지닌다.

                  

                    

#.04

붉은색과 주황색을 대표색으로 하는 플라스틱 원뿔은 도시 생활에서 하나쯤 갖고 싶은 물건이다. 이 원뿔은 사실 특별한 문자로 메시지를 적시하지 않아도, 그 존재 자체로 메시지를 갖는다. 원뿔을 설치한 공간을 다른 무엇(주로 차량)이 점유할 수 없음을 알린다.
여러 개를 늘여 세워 특정 공간을 경계 짓는 데도 사용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원뿔 두 개와 그곳에 걸치는 막대기를 활용해 점유할 수 없는 공간의 범위를 좀 더 명확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간혹 그 자체로 메시지인 원뿔에 이런저런 내용을 추가하는 경우를 본다. 대부분 ‘주차금지’가 많다. 공간을 점유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차량을 분명하게 가리킨다. 이 메시지는 “내가 차를 댈 곳이니 넌 대지 않았으면 좋겠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원뿔에는 “장사줌합시다”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다. 플라스틱이 지닌 물성을 잘 이해한 메시지 전달 주체는 필기구로 매직을 선택했다. 처음 쓰기 시작했을 ‘장’자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정성을 들였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줌’에서 포인트를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부산에서 “쫌”이라는 한마디로 마음 깊숙한 곳에서 피어오르는 감정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다른 글자보다 크게 쓴 ‘좀’도 아니고 강렬한 ‘쫌’도 아니고 ‘줌’을 선택한 속내는 아무리 고민해도 알아챌 수가 없다. 원뿔이 서 있는 곳이 사유지가 아닌, 실상은 공유지라는 점 때문에 조금 머쓱한 메시지 전달자가 애교를 섞어 넣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리 내어 읽어 보면 삐죽하게 나오는 입 모양새에서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하게 인다.

                   

               

#.05

자고로 ‘위험’을 알리는 메시지는 정말로 ‘위험해 보여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거대하게 자란 히말라야시다 밑동 부근에 구멍이 생겼다. 최근 무분별한 도시 개발로 씽크홀이 여기저기 생기고 그중 일부는 무척 심각한 상태다. 분명 ‘위험’을 경고해야 한다.
근데, 경고가 전혀 먹히지 않는다. 위험이라는 안내표지를 붙이려고 빨간 줄을 사용했다고 하기에는 너무 칭칭 감았다. 더군다나 나무가 쓰러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면 허술하기 짝이 없다.


저 빨간 끈은 이삿짐을 쌀 때 주로 책을 넣을 상자가 없으면 십자 모양으로 묶어 사용하는 바로 그 끈이다. 손으로 잡아당겨 끊기에는 어려움이 있지만 그렇다고 쓰러지는 나무를 붙들어 맬 만큼 튼튼하지는 않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던 사람의 심중이 읽혔다. 빨간색 끈을 칭칭 감아 시선을 잡아끌 의도였다. 사실 두 글자 사이가 과도하게 떨어진 ‘위험’이나 그 아래 비로소 보이는 ‘접근하지 마시오’라는 글자보다 먼저 시선을 끈 것은 빨간색 끈이었다. 나무를 감은 빨간색 끈은 시선을 붙잡는 거미줄 구실을 했고 그렇게 붙잡힌 시선은 자연스럽게 글자로 옮겨 갔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06

“상도덕(商道德) 상업자들 사이에서 지켜야할 도리”
이달 도시에서 만난 메시지 중 가장 강렬했다. 궁서체로 ‘상도덕’을 쓰고 그 옆에 괄호를 만들어 한자어로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친절하게 뜻도 풀어 두었다. 화룡점정은 짐짓 아랫사람을 꾸짖는 듯한 “부끄러운줄 알아야지!!!”라는 일갈이다. 느낌표도 세 개를 사용해 감정상태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한 가지 더 놀라왔던 점은 가장 큰 현수막 디자인 콘셉트는 이 가게 간판 디자인 콘셉트와 통일성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감각적이며 진지하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을 잘 살펴보면 동종 업종의 간판이 살짝 보인다. 물론 현장에서는 또렷하게 보인다. 현수막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함에도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드라마틱하다. 골목에 서면 팽팽한 에너지에 긴장감 넘치는 공기의 흐름도 만날 수 있다.


그 앞에 서서 상업자들 사이의 도리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관계에서 지켜야 할 도리에 관해 떠올렸다. 우리는 ‘도리’를 알고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가. ‘도시의 풍경’은 지금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글 사진 이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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