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안리 바닷가에서 만난 낮달

광안리 바닷가에서 만난 낮달

길지도 짧지도 않은 여행: 부산 출장 보고서

오전 10시 44분 기차를 탔다. 기차는 정확한 시간에, 계획한 플랫폼에 도착했다. 대전에서 부산까지 기차를 타면. 대략 1시간 30분에서 3시간 30분이 걸린다. 기차 종류와 정차역 개수에 따라 소요 시간이 다르다. 당연히 요금도 차이가 난다. 일반실을 기준으로 2시간에 2만 원 정도다. 시간당 1만 원, 최저 시급과 비슷하다. 이것이 진실이고 대부분 물가에 기준점으로 삼는다면, 임금 노동자의 삶은 최저 시급이 아무리 올라도 질적인 성장이 불가능하다. 자본주의 본질은 노예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손’이 가졌던 큰 그림일지도 모른다.
적절한 출발시간과 도착해야 하는 시간을 계산에 넣고 2시간쯤 걸리는 기차를 선택했다. 대전에서 부산까지 한 시간 삼십 분 만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아직 받아들이기 어렵다. 먼 거리를 더 빨리 도달하기 위해 지금껏 애쓴 인류의 노고를 깎아내릴 생각은 없지만, 올바른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시간을 단축하면서 생긴 생활상의 변화는 정녕 보편타당하게 인류 전체를 행복하게 했을까? 인류가 지닌 뛰어난 창의력과 막대한 비용을 다른 가치 추구에 투자했다면 더 많은 인류에게 행복을 줄 수 있지는 않았을까?’
때로는 옴짝달싹 못 하는 갇힌 환경이 다양한 사유를 가능케 한다.
부산까지 삼십 분이 더 걸리는 기차는 가장 빠른 기차가 서지 않는 서대구와 구포역에 정차하는 기차였다. 서대구와 밀양, 구포까지 빼먹지 않고 서는 기차가 무척 친절하게 느껴졌다.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쏜살같이 지나치는 기차 꽁무니를, 그저 바라만 보는 기차역은 왠지 좀 쓸쓸하다.
기차가 부산역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 무렵이었다. 평일인데, 크고 작은 캐리어를 끌고 플랫폼에 내려서는 사람이 많았다. 부산은 관광 도시가 확실했다. 부산역 2층 대합실에서 밖으로 나섰다. 여러 번 왔지만,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대합실을 빠져나오자마자 시야를 가로막은 산이 보인다. 산과 기차역 사이에 수많은 건축물이 악다구니하며 섰다. 우리가 만들어낸 전형적인 도시 모습이다. 그 풍광은 여전히 기괴하다.
부산역 광장을 지나 횡단보도 앞에 섰다. 가야 할 곳은 수영구였다. 광안리가 있는 곳이다. 출발시간과 도착시간을 계산하면서 광안리 방문을 염두에 두었다. 지도에서 볼 때, 광안리에서 회의 장소까지는 걸을 수 있는 거리였다.
광안리에 가는 버스가 눈앞에서 힁허케 지나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봤다. 터덜터덜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 같은 번호를 단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 기사는 소리쳤다. “캐리어를 가지고 계신 분은 더 탈 수 없어요!” 단호했다.
반려동물 목줄을 쥐듯 죽 당겨 뽑은 캐리어 손잡이를 꼭 움켜쥔 사람이 여럿이다. 덕분에 시선을 조금만 높이 들면, 버스 안은 제법 한가하다. 캐리어는 겸손하게도 성인 허벅지 이상의 공간은 점유하지 않았다. 
시내버스를 타면, 삶터를 통과한다는 점에서 늘 즐겁다. 간판을 읽고 그 앞을 지나는 사람에게 눈길을 주고 마음대로 상상하며 다양한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30분 남짓 버스가 달리는 동안 많은 부산 생활자가 내렸다. 광안리에 가까워지면서 버스는 여행자 중심으로 남았다. 버스 노선표를 살펴보니, 광안리 부근 정류장은 모두 세 곳이었다. 광안리카페거리입구, 광안리해수욕장, 광안리입구다. 광안리 해변을 따라 늘어선 버스정류장에 이름을 붙여야 했던 사람의 고뇌가 읽힌다. 광안리카페거리입구에서 내리기로 했다. 이미 점심을 훌쩍 지나 배가 심하게 고팠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골목길로 들어섰다.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이다. 도시에 가면 처음 온 사람처럼 두리번거리지 말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이었다. 최대한 이 도시가 전혀 낯설지 않은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게 몸에 뱄다. 계획하지 않은 골목으로 들어서는 몸짓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곳에 식당이 있었다.
‘할매재첩국’이다. 대전에 ‘재첩국’이 정말 맛있는 부산식당이라는 곳에 간 적이 있다. 이번에는 부산에서 재첩국이다. 1950년 구포에서 시작한 전통 있는 식당이었다. 다양하지 않은 식당 메뉴는 모두 재첩이었다. 신뢰를 준다. 정식, 진국, 덮밥, 무침. 그 앞에 재첩만 붙이면 된다. 재첩정식을 주문했다. 뽀얀 재첩국에 밥을 비벼 먹을 수 있게 대접에 톳과 콩나물, 무 무침, 김을 담아 함께 준다. 강된장과 푹 익은 무가 맛있는 고등어조림, 국물이 자박거리는 강된장에 쌈 채소로 푹 쪄낸 케일을 준다. 1만 원밖에 안 하는 재첩정식은 무척 훌륭했다.
식사를 마치고 광안리 해변으로 나섰다. 아직은 바람이 매섭지만, 광안리 해변에는 적잖은 사람이 모래밭과 바다, 하늘을 즐겼다.
태양은 정수리를 지나 서쪽으로 기울었지만,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눈이 부셔 몸을 반대로 돌리니 쨍하게 낮달이 떴다. 반달이다. 낮에 보는 달은 늘 매혹적이다. 태양빛 따위에 지지 않겠다는 결기가 느껴진다.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그 호기심 충족하기 위해 일탈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감행하는 맹랑함이 좋다. 조용히 걷고 앉아 사색하며 발랄하게 사진 찍는 다양한 군상을 접한다. 관광지로 개발한 바닷가에서 흔한 풍경이지만 묘하게 다르다. 마냥 아름답지 않다. 애써 지어보이는 웃음을 닮았다. 아무래도 대상에서 받는 느낌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 건,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라 관찰자의 상태인 듯하다.
이내 시큰둥해져 카페를 찾아서 들어갔다. 광안리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는 카페였다. 사람은 많았는데, 2층 창가 자리가 대부분 비었다.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눈을 찡그리고 허리를 뒤척거리며 하늘을 담은 광안리 바다를 바라보았다. 세상은 고작 얇은 유리창 한 장으로 너무나도 쉽게 나뉜다. 누군가 애써 나눈 세상도 의외로 쉽게 깨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훌쩍 지나간 시간에 짧게 점유한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지도에 약속 장소인 ‘도도수영8A’까지 가야 할 경로를 눈에 새겼다. 길찾기 앱을 통해 확인한 길은 단순했다. 헤맬 가능성은 없었다. 2.6km 떨어졌고 걸어서 40분 정도였다. 목적지에 거의 도달해 꺾어야 할 지점에 동네서점 하나가 있었다. 들렀다 가기로 마음먹는다.
골목에 들어서자, 높은 건물에 햇살이 막혀 도달하지 못하고 체감하는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진다. 언젠가는 반드시 막힘없이 지표면에 도달하는 태양 빛의 양이 중요한 공간 경쟁력인 시절이 분명 올 것이다.
햇살을 빼앗긴 골목과 대로변을 걸으며 잘 가꾼 작은 공원도 만나고 기대하지 못한 곳에서 시장도 만난다. 주유소와 다이소, 맥도날드가 한 공간에 함께 있는 모습도 신기해 한참을 보았다.
낯선 도시를 걷는 즐거움이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골목으로 들어서자, 녹색 페인트 빛깔이 퇴색한 서점이 나타났다. 문을 닫았다. 약속한 적도 없으면서 괜히 바람이라도 맞은 것처럼 낭패감이 몰려든다. ‘몸에서 맥주와 오물 냄새가 나도 내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는 (건) 가방에 책들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녁이면 내가 아직 모르는 자 자신에 대해 일깨워줄 책들.’ 폐업한 서점 작은 창틀 위에 적힌 문구다. 주인장은 여전히 책 덕분에 미소를 짓는지 궁금하다.
길찾기 앱 지도에서 본 것처럼 책방을 오른쪽에 두고 골목으로 들어서자 ‘도도수영8A’가 나타났다. ‘도시 거주민과 방문객을 위한 도시 수영’을 줄여 도도수영이라 브랜딩 했다. 도도수영 8A는 도시재생사업으로 조성하는 주요 거점 시설 8개를 관리하는 콘트롤 타워였다. ‘도도수영8A’라는 건물 이름에 담긴 의미였다.
심호흡 한 번 하고 버튼을 눌러 문을 열었다. 문을 통과해 미소 지으며 잠깐의 여행자에서 다시 생활자로 변신했다.

글 사진 이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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