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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에 기대어 밤이 되면 불이 켜진다
세월에 기대어
밤이 되면 불이 켜진다
세월이 만든 호수
가는 길이 비현실적이다. 건물 사이에 난 골목길, 그 끝엔 오래된 대문이 반쯤 문을 열었다. 어쩌면 비현실적인 느낌은 가게 이름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래된 곳은 긴말이 필요 없다. 가게에 써 있는 정보는 오직 이름과 간단한 메뉴뿐. 이름은 호수식당. 파는 것은 삼겹살이다. 은행동 구석에 시간의 무게로 움푹 파인 호수에 발을 들인다.
저녁 장사 전에 찾아가면 한가할 거로 생각했는데, 가게 안은 바빴다.
“다섯 시가 저녁 장사지만 네시부터 손님이 오기도 하니까요.”
이 식당의 주인 강윤원 씨와 사모님이 주방에서 분주하다. 강윤원 씨는 코에 산소발생기 호스를 끼고 있었다. 힘들법한데도 주방에서 재료 하나하나 손을 보는 중이다.
“힘드니까 집에서 쉬라고 해도 꼭 나와요. 나와서 음식 준비 잘 되는지 다 확인해야 들어가죠.”
사모님은 장사 준비로 마음 급할 텐데, 낯선 방문객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사이다 한 병을 따 준다. 마치 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이를 손님으로 품는 듯한 따스함이다. 강윤원 씨도 일을 마치고 주방에서 나와 자리에 앉는다.
“내가 18살 때부터 계속 같은 일을 했어요. 춥고 배고파서.”
음성 감곡면에서 태어나 자라기는 서울에서 자랐다. 열다섯 살 때 한국 전쟁이 터졌다. 보따리 짊어지고 걸어서 남쪽으로 남쪽으로 피난 왔다. 산에서 나무하다 다리 잘린 뻔 하기도 하고 굶주렸던 힘든 시기다. 충주에 작은집이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없었다. 홀로 작은집을 찾아 걸어갔다. 살아야 했고 일은 험했다. 소, 돼지, 닭 먹이 주고, 논밭 일을 하고 제재소에 들어가 나무 벌목도 했다. 17살이 돼서야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힘들게 일하는 동안 사촌 동생들은 중학교, 고등학교에 다녔다.
“사촌 형 보고 나도 학교 좀 보내달라 했거든. 그런데 ‘야. 공부해서 뭐 해’라는 말에 정이 뚝 떨어지더라고. 야간학교 두 달 다니다가 서울로 토꼈어.”
서울에 가서도 배운 것은 하나라 마포에 있는 제재소에 들어갔다. 그러다 톱에 손을 베였다. 제재소에선 더는 일할 수 없었다. 그러다 구한 일자리가 식당이었다. 처음엔 곰탕, 설렁탕, 냉면을 배웠다. 강윤원 씨는 가게를 옮기면서 여러 요리 기술을 배웠다 종로 5가에서 양식을 접했고 종로 3가로 옮겨선 전문적으로 양식 일을 배웠다. 단성사 영화관 맞은편 자리로 손님이 많았다. 선배 요리사 보조 일을 했는데 시간이 나면 옆에 가서 어깨너머로 하나하나 조리법을 익혔다. 열심히 하니 조리하는 일을 조금씩 시켰다.
“그다음엔 명동으로 들어갔어. 메트로호텔이라고 당시 일급 호텔이야. 선후배들이 ‘이놈이 일 잘해’ 하면서 호텔에 추천해줬어. 거기서 일하는데 월남전이 일어났어. 월남 가려고, 거기 일 그만두고 나왔는데 월남은 못 갔어.”
월남전 지원에서 떨어졌다. 그러면 다시 호텔 일로 돌아갈 법 한데, 그대로 외항선을 탔다. 해군으로 전역했기에 배를 탔다. 당시 한국엔 없던 큰 유조선을 탔다. 군 복무할 때도 그랬지만 배 안에서 주방장을 맡았다.
“남미는 못 가고. 공산국가도 못 가봤어. 독일은 동서로 나눠 있으니까 못 가고. 제일 많이 가 본 곳은 싱가폴. 수에즈 운하 타고 유럽도 갔어. 항구에만 있으니까, 뭐 못 봤어. 그래도 영국에선 한 달 정도 배를 수리하느라 좀 돌아다녔지.”
배 타는 일은 6년을 다 못 채우고 5년 차에 내려야 했다. 회사가 대만으로 넘어갔다. 많은 일이 일어났던 1970년대 이야기다. 배에서 내려 다시 호텔 요리를 하다 대전에 내려왔다. 유성 리베라 호텔이 자리에 있던 만년장에서 주방장으로 5년간 일했다. 아래 직원도 10명이나 되었다.
호텔 주방일을 하다 직접 가게를 차리기로 한다. 이때 은행동으로 들어왔다. 희락반점 맞은편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 시작은 무려 철판 스테이크였다.
“내가 양식 전공이야. 100평 규모에 6인 테이블 사이즈에 철판을 놓았어. 그 당시 스테이크 고기 두께는 지금보다 얇았어. 단가가 안 맞는다고. 미군에서 나오는 티본이나 립 아이도 있었지. 그때는 미국이 아니야. 미군이지.”
지금 들어도 괜찮았을 것 같은 식당이다. 철판을 중심으로 여섯 명이 둘러 앉아 익어 가는 고기를 보는 재미가 있었을 거다. 한창 대전에 극장도 많았을 때니 영화를 보고 분위기 있게 하루를 마무리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장사는 신통치 않았다. 가끔 서울이었으면 장사가 잘되었을까 생각할 때도 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시작한 것이 호수식당이다. 지금 자리 앞에 있던 건물에서 시작했다.
이야기는 시공간을 오가며 계속되었다. 호수식당을 시작하기 전까지 강윤원 씨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1937년생이다. 그때는 다들 그렇게 살았다고 한다. 한국 전쟁 때 동사무소가 파괴되어서 인적 정보가 사라진 이야기까지 나오던 참이었다.
“이야기 다 들었네. 한국 전쟁 이야기까지 나오면 이야기 다 들은거야.”
김해 김씨라는 사모님은 주인 아저씨가 옛날 이야기로 너무 붙잡는다고 걱정했다. 곧 바쁘게 장사해야 할 시간이다. 내일 다시 찾아오겠다 인사 하고 호수식당을 나왔다.
흘러온 시간이 50년이 되어 간다
다시 찾은 호수식당. 이번엔 점심 시간 지나고 일찍 가게를 찾았다. 가게는 한창 고기 손질로 바빴다. 오래된 집이라 덥다며 땀을 뻘뻘 흘리는 이는 강윤원 씨의 아들이었다.
“예전엔 아버지가 고기를 손질하셨어요. 그런데 요즘은 힘드시니까. 잠시 제가 근처에서 일하다가 고기 손질만 도와드리고 다시 가죠.”
고기는 제일 좋은 걸로 고른다. 질 좋은 선분홍색 삼겹살을 먹기 좋게 근막을 제거하고 오돌뼈가 있는 부분을 찾아 빼낸다. 그리고선 비닐랩으로 고기 형태를 잡아 냉동실에 넣는다.
“대패는 질 안 좋은 고기를 먹기 쉽게 얇게 기계로 써는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좋은 고기를 먹기 좋게 손으로 썰어 주는 거죠. 우리는 적당히 얇아요. 기계로 써는 것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썰죠.”
고기는 손으로 직접 썰었다. 이것도 강윤원 씨가 하던 일이었다. 그러다 최근에 고기 써는 기계를 하나 마련했다. 힘이 부치는 만큼만 기계를 사용하는 편이다. 얇게 썰어 나온 냉동 고기는 다 대패 삼겹살이라 생각했는데 냉동 삼겹이 다 같은 것이 아니었다. 다른 대팻집과 다르게 고기 모양이 반원 모양으로 둥근 것도 그 이유였다. 고기를 직접 손질하고 모양을 만든 거다. 그리고서 비계가 많은 부분은 잘라 낸다. 무게 손실이 있어도 좋은 맛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다. 두께도 일반 대패 삼겹살과 다르게 두껍다. 고기를 얇게 썰어 팔게 된 이유를 물어보니 답은 명쾌했다.
“먹기 좋게 하려고. 굽기도 빠르고.”
음식에 대한 자부심이었다. 예전엔 음식 맛으로 투정하는 손님이 있으면 숟가락을 뺏었다. 입맛에 맞는 다른 식당에 가라 했다.
“한번은 누가 가게 앞에서 오줌을 싸는 거야. 그래서 왜 여기서 오줌 싸느냐고 고추 잡는 손을 쳤지. 그 사람 그 후로 안 오더라고.”
주방을 책임지고 매번 같은 서비스를 유지하려는 그의 노력이 있었기에 누구는 추억을 찾아, 누구는 즐거운 경험으로 호수식당을 찾는다.
고집과 책임감으로 지금까지 가게를 유지했다. 처음 가게를 시작할 때 근처에 고깃집이 다섯 군데 정도 있었다. 그곳은 다 사라졌다. 호수식당은 앞 건물에서 17년, 지금 이 자리에서 30년 영업했다.
“우리 손주 돌잔치를 여기서 했으니까 30년이 맞아요. 그때는 돌잔치를 집에서 했으니까요.”
매번 같은 마음으로 가게 문을 열고 닫다 보니 시간이 이리 지난지도 몰랐다. 호수식당이 영합하는 집은 본래 요정 집이었다. 그때는 요정이 유행이었다. 돈 많은 사람이 술 마시러 가는 집이다. 예쁜 여자들은 다 요정에 있다고 했다. 요정 집이라 그런지 지금도 문을 닫으면 방음이 잘 된다.
“예전엔 아침, 점심 식사도 가능했어요. 점심에는 삼겹을 안 하고 두루치기와 찌개를 팔았죠. 그때도 자리가 없었어요. 점심시간에 미치는 줄 알았죠. 또 옛날 건물이다 보니 여름엔 더워요. 어머니가 항상 하시는 말씀이 손님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거죠. 더워도 땀 흘리면서 찾아와 주니까요.”
사모님은 우리 가게 손님들이 참 점잖다며 고맙다고 한다. 오랫동안 가게를 사랑하는 이들이 찾아오면서 생긴 문화일 거다. 야구선수 김태균도 자주 찾아오는 단골이었다. 마지막으로 서울 올라가기 전에 인사하고 갔다. 방 한 쪽에 자리 잡고 식사할 때도 손님들이 크게 방해한 적 없다. 예전엔 충남대학교 학생들도 많이 왔다고 한다. 국어국문학과는 외상으로 자주 밥을 먹고 갔다. 학생들 이름은 모르니 그저 과 이름을 적어두어 기억이 난다. 나중엔 충대 농대, 인문대로 외상값을 받으러 다니기도 했다. 식당 문을 연 지도 이제 50년이 되어 간다.
“나도 일하긴 해야겠지요. 근데 똑같이 해도 아버지가 하는 거랑 내가 하는 거랑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고기 손질을 거의 끝냈다. 금요일엔 손녀도 나와 일을 돕는다.
“그런데 왜 가게 이름이 호수식당이에요?”
“내 이름이 호관, 동생 이름이 수영. 그래서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서 호수식당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예전에 무교동에 호수가 있었어.”
“아버지. 서울 무교동 말이죠? 아버지가 하는 말은 잘 들어야 해. 낯선 동네 이름 나오면 대부분 서울 이야기야. 서울에서 사셨거든.”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사모님은 환타 한 병을 꺼내 준다. 어제는 사이다를 마셨으니 다른 거 마시라며 챙겨줬다. 음료와 함께 한 컵도 30년이 지났다. 가져가려 눈독 들이는 손님이 많다고 한다. 이렇게 오래 가게를 하면서 언제가 제일 기분 좋은지 물었다.
“홀이 잘 돌아갈 때가 기분이 좋지.”
어쩌면 호수식당이 곧 강윤원 씨였다. 집에 있으면 오히려 몸이 아프다며 가게에 나온다. 한 가지 일을 꾸준히 이어 온 그에겐 호수식당이 정말 작은 호수였다. 삶이 깊어질수록 무게를 더하는 도시 속 호수였다. 다시 일 보러 가야 한다는 호관 씨가 떠나기 전에 이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이 깊은 호수에 잠시 머물 수 있음에 감사하며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글 사진 황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