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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7호] 생물학적 속박도, 출산의 권력(?)도 없다면
생물학적 속박도,
출산의 권력(?)도 없다면
로와의 책탐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
마지 피어시 지음 / 민음사
소설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는 페미니스트 슐라미스 파이어스톤과 연관이 깊다. 파이어스톤은 1970년에 출판한 기념비적 저서 《성의 변증법》에서 “유토피아적 페미니스트 문학조차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p.320)”라고 일갈했다.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는 그녀의 지적에 대한 문학적 응답처럼 보인다. 파이어스톤은 또한 과학기술을 활용한 인공 자궁으로 여성을 임신과 출산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가족 제도를 해체하며, 아동의 독립성을 위해 사이버 코뮤니즘을 형성하자고 제안했다. 여성과 아동을 서로에게 족쇄로 작용시키지 말고, 아동을 독립적인 개체로 인정해 주고, 공동체에서 양육하자는 것이 주요 주장이었다. ‘내’ 아이를 위해 다른 아이들에게 조금쯤은 피해를 줘도 괜찮다는 이기적인 발상과 폐해는 ‘모든 아이들’이 ‘내 아이’가 되는 순간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 제도라면 여성도, 아이도, 사회 구성원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누구누구의 엄마’와 ‘누구누구의 아이’라는 한 쌍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모성애라는 게 학습되고 강요된 게 아니라는 증거는 어디에 있겠는가. 아이다움을 강요하는 사회문화의 속내가 무엇인지 들여다본 적은?
그녀의 파격적인 발언은 당시 사회에서, 심지어 페미니스트들에게조차 환영받지 못했다. 너무 솔직해서다. 아마 지금도 썩 환영받기 힘들지도 모른다. 우선 책의 인용문을 보자.
임신은 야만적이다. (중략) 임신은 종을 위해 개인의 육체가 임시로 기형이 되는 것이다.(p.287) 출산은 잘해 봐야 참을만한 일이다. 즐거운 일이 아니다.(p.288) 여성은 나머지 절반(남성)을 세상에서 일을 하도록 자유롭게 해 주기 위하여 종족을 유지시켜 주는 노예계급이었다.(p.293) - 《성의 변증법》,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속이 뻥 뚫리는 명료한 표현을 나는 몇 번이고 읽었고, 시원하게 웃었다. “이런 이야기는 내가 먼저 하고 싶었는데!” 출산은 남자들이 상상하듯이 그저 숭고하고 아름답기만 한 것이 결코 아니다. ‘무한하고 숭고한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고상한 이름의 베일 뒤에 감춰진 임신과 출산의 실체는, 지겹도록 괴롭고 억지로 잊을 정도로 아프며, 피와 오물이 뒤섞여 있으며, 아무리 잘 봐줘야 간신히 참아 줄 만한 것이다.
상상해 보라. 9개월 내내, 주량에서 딱 한 잔 더 마신 다음 날 같은 몸 상태와 흐릿한 정신으로, 매일매일을 그저 버텨야만 하는 임신 기간. 배는 차츰 무겁고 커져서 나중에는 20킬로에 가까운 무게까지도 늘 배 안에 넣고 살아야 한다. 잠시도 벗어 놓을 수가 없다. 임신부의 기형적인 신체변형은 허리에 엄청난 무리다. 이건 오로지 여자의 몫이다. 평생 허리 질병을 앓을 수도 있는. 그뿐이랴. 산부인과 환자용 의자에 가랑이를 넓게 벌린 자세로 앉아 진료받을 때 느껴지는 굴욕감이란. 출산 때가 되어 산과 침대를 차지하면 다른 차원의 굴욕이 시작된다. 병동의 모든 의료진이 복도를 오갈 때마다 내게 들러, 일회용 장갑을 끼고는, 그 손을 내 질 안에 쑥 집어넣어 무심하게 휘저어 대는 ‘내진’. 그들이 손을 빼낼 때 장갑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 이렇게 함부로 다뤄질 음부였다면 왜 나는 여태껏 그리 감추고 꽁꽁 싸매고 다녔던 걸까.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면 간호사가 말끔히 음부를 제모해 주고, 의사는 아기 머리가 나오기 쉽게 질 입구를 매스로 짼다. 아니면 질 입구가 갈기갈기 찢어지니 이렇게 칼로 쨌다가 출산 후에 다시 꿰매는 편이 낫다는 게 의사 설명이다. 이제 수 시간이 걸리는, 출산이라는 이름의 전투가 시작된다. “똥 쌀 때처럼 아랫배에 힘주고 밀어요. 소리 지르지 말고. 하나, 둘, 셋” 하는 타박 섞인 구령을 들어 가며. 이게 현실의 출산이다. 아름다운가? 축복인가? 대체 어느 구석이?
임신과 출산은 야만이 맞다. 파이어스톤의 문장을 아무리 뜯어봐도 무엇 하나 틀린 말이 없건만, 당시 25세의 저자 파이어스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페미니스트들이 신성시하는 모성의 위대함을 건드렸기 때문일까. 그때나 지금이나, 팩트폭력은 다들 싫어하는가 보다.
파이어스톤의 책이 나온 지 6년 뒤 출판된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의 유토피아는 많은 부분을 파이어스톤의 아이디어에 기대고 있다. 인공 자궁에서 탄생하는 아기, 성 구분 없는 육아, 정밀하게 조절되는 인구, 12세부터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는 독립적 인간, 인종과 문화에 차등 없이 완벽에 가까운 평등이 구현된 사회, 자유롭게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사회 구성원들. 무엇보다도 생물학적으로 무관한 세 명의 어머니 - 남성도 어머니가 된다 - 와 교류하며 성장하는 인간상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피어시의 유토피아에서는 어머니가 된 남성은 호르몬을 조절하여 모유 수유도 한다! 미래 시간여행 중에 남자가 가슴을 열어젖히고 우는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광경을 바라보며 역겨움을 느끼는 주인공 코니. “이곳 여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권력의 마지막 유산, 피와 젖으로 봉인된 소중한 권리를 남자들이 훔쳐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p.212)”며 불만에 싸인 코니에게 미래여성 루시엔테가 말해 준다. “생물학적으로 속박되어 있는 한 우리는 절대로 동등해질 수 없어요. 남성들도 결코 다정하게 사랑을 베푸는 인간으로 교화될 리 없고요. 그래서 우린 누구나 어머니가 될 수 있게 하기로 했어요.”(p.164)라고. 여성이 유일하게 누려 온 권력인 - 권력인지 의무인지 모르겠지만 - 세대 생산 권력을 포기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은 평등해졌다고. 어머니가 평생을 바쳐 아이를 키우는 게 생물학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당연하다는 모성본능 신화는 그동안 얼마나 여성과 아이에게 족쇄가 되어 왔는가. 지금처럼 엄마-아이의 합이 아닌, 아이들이 공동체 모두의 아이로 받아들여진다면, 그런 세상에는 더이상 ‘맘충’도, 되바라진 아이도 없을 것이다. 쓸데없이 감정에 소모되는 시간도 줄이고. 인류의 역사도 달라질 거다.
1970년대 미국 페미니스트들이 꿈꾼 유토피아는 생식의 압제에서 해방된 여성이 독신의 직업인으로 남성과 함께 협동노동을 하는 공동체였다. 혈연관계로 이루어진 가정이 아닌, 약 10년 동안만 지속되는 제한된 계약 관계로 맺어지는 공동양육으로 12세에는 스스로 인생을 결정하는 다음 세대 구성원을 길러 내는 사회. 학교와 가정이라는 굴레를 없애서 아이와 여성을 사회에 통합시킨 공동체 사회. 유토피아라고까지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 보인다. 이 책이 나온 지 5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세상은 그다지 변한 게 없다는 사실, 여전히 가정이라는 공동체는 일부일처제와 혈연을 전제로 여성과 아이를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에, 한숨이 먼저 나온다. 대체 인간 여성은 언제까지 세대 생산을 전담해야 하나? 만일 다음 생이란 게 있다면, 나는 포유류 암컷으로 다시 태어나느니 공해 심한 도시에서 수컷 은행나무 가로수로 사는 쪽을 택하겠다.
그렇다면 이런 유토피아에서 섹스란 과연 무엇일까? “고통이나 강압이 동반되지 않는 한 짝짓기를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p.219)”가 유토피아의 섹스관인지라, 동성 간이든 이성 간이든, 나이가 몇 살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감정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질투심은 있지만 다자간연애가 보편적이다. 그런 사회에서 나고 자랐다면 나도 좀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이 불행하거나 뭔가 결핍을 느낄 때 섹스를 원한다고 여기는 건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따져 보면 흔히 우리가 원하는 건 좀 더 고상한 행위란 말이야.(p.131)”가 저자의 섹스관인가 보다. 그래서인지 유토피아에서 섹스는 별로 대단한 것이 못된다. 대신 유토피아인들은 공부하느라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예술작품을 만드는 데 공을 들인다. 위대한 예술품에는 찬사를 보내고, 너무 젋어 사망한 예술인은 같은 유전자로 다시 ‘태어날’ 기회를 줄 정도로. 유토피아에서 벌이는 유토피아적 섹스 묘사를 기대했던 나라는 독자에게는 너무나 가혹하게도, 700쪽에 달하는 책 두 권에 걸쳐 섹스 비슷한 장면은 단 한 장면뿐이다! 유토피아가 되면 인간은 섹스를 멀리하고 이성적 탐구행위에 탐닉하게 될까?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혹시 저자가 만족스런 섹스를 못해 본 건 아닐까, 하는 불순한 생각이 먼저 드니 말이다. 프로이트는 거꾸로 이야기했었다. 충족되지 못한 성욕이 승화된 결과물들이 예술품이라고. 그리고 우리는, 나는, 그렇게 교육받았다. 여기는 유토피아가 아니기 때문인가.
저자 마지 피어시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도 보여 준다. 극소수의 가진 자들이 모든 자원을 차지한 채, 대다수는 하늘도 보이지 않는 더러운 환경에서 인공합성물질들을 먹으며 사육된다. 그들의 존재 가치는 자기실현 따위의 고상한 이유가 아니다. 가진 자들이 200년 이상 누릴 수명을 위해 필요할 때마다 새것으로 보충할 장기기증자로, 그리고 가진 자들의 무한한 성욕을 채워 줄 섹스 상대자 ‘계약녀’로 사는 게 바로 그들의 존재 이유다. 이러한 디스토피아에서는 섹스가 대단한 것이다. 하층계급의 생존 수단이자 상층계급의 유희 수단이니까. 그들 문화의 최고 소비재는 섹스가 모티브인 홀로그램 동영상이다. 코니가 잘못 찾아간 미래사회인 디스토피아의 계약녀 - 마치 이번 세계의 조카와 판박이처럼 닮은 삶을 사는 - 가 보여 준 상품 목록에는 ‘대형 투견과 재미를 보는 풍만한 계약녀 이야기(175)’ 등이 소개되어 있었다. 왠지 지금 내가 사는 이곳이 작가 피어스가 그린 유토피아보다는 디스토피아 쪽에 더 가깝다고 느끼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21세기 여성인 나는 어떤 유토피아를 원하는지, 시간의 경계에 선 코니가 내게 묻는다.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당신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과연 어떤 모습인지, 나도 독자께 묻고 싶다.
글 로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