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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7호] 5·18 열흘간 이어진 사람들의 행렬
5·18
열흘간 이어진
사람들의 행렬
전시 <열흘간의 나비떼>
사람이 걸어간다. 열흘. 사람들은 그 시간 동안 금남로를 향해 걸었고 죽거나 다쳤다. 여전히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전시 〈열흘간의 나비떼〉는 말한다. 그들을 따라 함께 걸으며 조금은 조심스럽게 알아 간다. 5·18이 현재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20일 화요일 저녁의 헤드라이트
1980년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에서는 시민군이 남아서 광주를 사수했다.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광주 도심 곳곳에 울려 퍼지던 그들의 마지막 목소리이다. 무장한 계엄군과의 교전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종료되었고 윤상원을 비롯한 많은 시민군이 죽었다.(5·18기념재단 홈페이지의 ‘기억해야 할 5·18민주화운동’ 참조) 광주 열흘, 마지막 날의 이야기다.
민주, 인권, 평화를 지키기 위해 피와 땀을 흘리며 광주시민이 사수했던 옛 전남도청은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성지이다. 반독재와 민주주의를 외친 민중의 목소리가 이 공간 곳곳에 남아 있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5·18민주화운동 39주년을 맞이하여 5·18 최후의 항쟁지인 옛 전남도청 일대를 시민들에게 5월 14일부터 오는 8월 18일까지 개방한다.
〈열흘간의 나비떼〉는 공개된 곳들 가운데 옛 전라남도 경찰국, 옛 전라남도 경찰국 민원실, 옛 전남도청 본관에서 선보이는 전시이다. 5·18 열흘간의 이야기를 기승전결 서사구조에 따라 예술적으로 승화했다. 이 전시는 안타깝게도 모두 완성되지는 못했다. 마지막 날 도청에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시할 예정이었던 옛 전남도청 본관은 아직 미완성이라 건물은 공개되었으나 전시를 관람하지는 못한다.
이번 전시는 5·18의 이야기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시작한다. ‘광주로 가는 길’은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나기 전 광주가 겪은 근대 100년의 역사, 배경, 의미를 소개한다. 광주 지명 유래를 설명한 전시물에서 이 문장이 눈에 띈다. “근래 광주시민들은 ‘빛고을’을 선호한다. 역사가 캄캄한 일식에 먹혔을 때마다 광주는 불가사의한 ‘빛의 도시’로 나타났기 때문이리라.” 철제 빔이 그대로 노출된 복도를 따라 걸으며 광주의 역사를 읽다 보면 다음 전시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오월엔 만인의 얼굴이 눈부시다’는 전시장 실내 세 개 층을 관통하는 상징 조형물로, 광주시민을 비롯한 국내외 시민이 관람객들을 맞이한다는 의미를 지녔다. 동학농민운동부터 일제 강점기, 6·25한국전쟁을 이겨 낸 광주시민들의 환하게 웃는 얼굴, 그리고 5·18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아시아인들의 얼굴 사진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봉인된 시간
‘봉인된 시간 : 1979년-1980년’이 전시된 공간은 온통 푸른빛으로 젖어 있다. 5·18민주화운동을 맞이하기 전에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는 ‘씻김’을 형상화하는 체험 미디어 아트를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위에서 아래로 빛의 입자가 흘러내리는 푸른빛 화면은 사람의 움직임을 따라 쓸려 나가며 파동을 일으킨다. 거대한 물세례가 사람을 씻어 주는 형상이다. 그 맞은편에는 79년부터 80년까지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과 한국에서 일어난 사건이 거울 위에 적혔다. 그리고 한 방향으로 걸어가는 이목구비가 없는 검은 군상이 등장한다. 그 군상이 향하는 곳은 다음 전시실인 ‘빛의 정거장 : 분수대 집회’이다. 5월 16일 밤, 전남도청 광장 분수대를 2만여 학생과 시민이 동심원처럼 에워싸고 민주화를 요구했던 횃불성회를 재현했다. 조금은 아래로 꺼진 둥근 전시 공간 가운데 서서 관람객들은 360도로 에워싼 화면으로 민주화의 열망이 한껏 고조된 당시의 광경을 만난다. 5·18의 서막이다.
전시실과 전시실을 잇는 복도에도 하나둘 등장하는 군상의 존재가 의미심장해 보인다. 이 군상은 다른 전시실에서도 등장한다.
‘광주를 지나간 시간 : 5월 18일-27일’은 광주 열흘의 시간 전체 내용을 보여 준다. 경험자 증언(광주민중항쟁사료전집)을 발췌해 일자 별로 구성, 터치스크린 좌측 하단의 이야기를 선택해 누르면 해당 이야기가 텍스트와 이미지로 떠오른다. 차례로 이야기를 따라가면 광주 열흘의 사건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다. 이 전체의 서사를 가슴에 넣고 결정적인 순간들을 다음 전시실에서 만나는 셈이다.
18일 일요일의 아우성
5월 18일 일요일, 80만여 시민들은 여느 날과 같은 일상을 살고 있었다. 교회에 다녀오던 어느 부부, 결혼식에 다녀온 누군가, 낚시 하러 가는 길 터미널에서 그들은 상상도 못할 장면을 목격하고 여기저기 비명과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18일 일요일의 아우성’ 전시실 초입의 전시 설명이다. 공수부대의 전시적(展示的) 폭력이 자행되고 순식간에 폭력극장으로 변모한 그날을 목격한 관람객들이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확성기와 마이크를 설치해 두었다.
‘20일 화요일 저녁의 헤드라이트’는 5월 20일 금남로 차량시위를 재현했다. 그날 그 순간 헤드라이트 불빛에는 두려움에 숨지 않고 싸우기를 택한 시민의 의지가 담겼다. 금남로에 모여든 3만 명의 시위대, 밀고 밀리는 공방전 가운데서 오후 6시 무등경기장에 택시 100대가 집결, 대여섯 대의 버스와 트럭을 앞세우고 경적소리와 함께 도청 앞 관광호텔까지 진출했다.
‘21일 13시 0분의 애국가’ 전시실에 들어서면 매캐한 냄새가 난다. 5월 21일 금남로 집단발포의 순간에 났을 법한 냄새다. 최루탄 냄새와 화약 냄새. 어두운 전시실 중앙에 군중이 걸어간다. 어두운 전시실 한가운데를 가득 메운 군상은 그들이 죽이고 은폐하려 한 이름 없이 사라져 간, 여태 주검도 찾지 못한 혼령들 같았다.
“그들은 사선을 향하여 갔다. 그들은 사선을 ‘넘어서’ 계속 갔다. ‘죽어도 간다’는 이 필사적인 자유에의 의지는, 그들이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역사의 다른 페이지를 열게 했다.”
거울처럼 실내 공간을 되비추는 벽면에 쓰인 글귀이다. 오후 1시 도청 옥상 확성기에 애국가가 울려 퍼졌고 공권력은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무차별 집단발포의 위협에도 사람들은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전시는 옛 전라남도 경찰국 민원실로 이어진다. ‘환희 : 22일-26일’은 21일 저녁 공수부대가 도청을 비우고 시 외곽으로 철수한 이후 나흘간의 해방광주를 형상화했다. 광주는 나흘 동안 시민 자치를 이루어 냈다. 이 환희의 시간을 윤이상이 작곡한 〈광주여, 영원하라〉라는 곡과 함께 전시실에서 만날 수 있다. 여태까지의 전시실과 달리 이 공간은 밝고 환하다. 높은 천장에 흰 운동화가 매달려 있고 햇빛이 천장 나무 사이로 흘러든다. 금남로 도로 위를 몇 명의 군상이 힘차게 걸어간다. 죽음의 위협에도 27일 새벽까지 200여 명의 시민은 공수부대에 맞서 도청을 지켰다.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민주주의이고 인간의 존엄이었다.
환희
도청에서의 마지막 날을 다루었다는 미완성의 전시가 궁금했지만 아쉬움을 뒤로 하고 옛 전남도청 회의실과 옛 전남도청 본관을 둘러보았다. 〈열흘간의 나비떼〉도 전남도청 복원사업으로 인해 2021년 철거될 예정이라고 한다.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장소의 역사적 복원은 중요하다. 하지만 5·18민주화운동 열흘간의 시간을 한눈에 보여 주는 예술 작업의 결과물들 역시 그날의 광주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광주 열흘의 시간을 짧은 시간 동안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돕는 전시였다.
하늘마당 잔디밭에 여유롭게 노니는 사람들과 그 앞에 무리지어 있는 청년들의 모습을 보며 열흘의 어둠속에서 빛을 찾고자 한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찾고 싶은 곳, 왠지 가슴이 뜨거워지는 곳, 그곳이 이제 광주다.
글 사진 이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