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46호] 내 인생 설계도는 누가 그렸을까?

내 인생 설계도는

누가 그렸을까?

 

로와의 책탐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

마지 피어시 지음 / 민음사

  


   

그건 여성들이 오랫동안 추진해 온 개혁의 결과였어요. 오랜 계급제도를 전부 무너뜨릴 때였죠. 우리가 누렸던 유일한 권력이었지만 마침내 역시나 포기해야 할 게 남아 있었어요. 그 대신 누구에게도 더 큰 권력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죠. 그건 바로 생산의 원천인 출산의 권력이었어요. 생물학적으로 속박되어 있는 한 우리는 절대로 동등해질 수 없어요. 남성들도 결코 다정하게 사랑을 베푸는 인간으로 교화될 리 없고요. 그래서 우린 누구나 어머니가 될 수 있게 하기로 했어요. 아이들은 전부 어머니가 셋이에요. 지나치게 긴밀한 유대감을 깨뜨리기 위해서죠. (p.164) 

  
생물 분류상 나는 포유류, 좀 더 정확하게는 호모 사피엔스 암컷 개체다. 이 사실은 잊고 살기 일쑤다. 사무직 직장인의 일상은 이러하다: 영혼 따위 서랍 안에 고이 접어 넣어둔 채 밀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 출근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건물 안에 틀어박혀 좀비처럼 약속된 노동을 제공하다가, 퇴근하면서야 비로소 다시 눈빛에 생기를 되찾는다. 매일 반복되는 무한 사이클, 여기엔 암수 구별이 없다. 이렇듯 출근하고 야근하며 조직체 부속품으로 꾸역꾸역 살다가도, 매달 나는 잠시 잊었던 진실인 포유류 암컷임을 어김없이 깨닫곤 한다. 거의 일주일 동안이나 나는 내 몸에 꼼짝없이 구속된다. 여행이나 휴가, 목욕, 심지어 배설조차 내 의지대로 할 수가 없다. 내 몸에, 평소에는 잊고 있던 난소와 자궁이라는 신체 기관에 모든 결정권을 내주어야 한다. 속절없이.
두 시간에 한 번씩은 화장실에 들러 생리대를 바꿔야만 비교적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기간. 평생 생리를 하지 않는 세상의 반을 차지한 부러운 인간들-남자들-이 흔히 짐작하는 것과는 다르게, 생리통은 하루 지난 치킨에 김빠진 맥주를 야식으로 먹은 다음 날 배탈처럼 뱃속이 조금 불편한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다. 혹시 또 모르겠다, 그런 정도로만 지나가는 운 좋은 여자가 있을지도. 최소한 내 주변 여성 중엔 없다. 내 친구는 학과 신입생 환영회에서 억지로 선배들이 권하는 술을 마시다가 쇼크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간 적도 있다. 그녀는 의사로부터 생리 중 절대 금주령을 받았다고 말했는데도, 고작 생리 따위를 핑계로 감히 신입생이 선배가 하사하는 음주를 거부하다니 당치도 않다며 선배들이 억지로 먹여 댄 거다. 응급실에서 잰 그녀의 혈압은 고작 38! 의료진은 목숨이 붙어 있는 게 신기하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도 만만찮다. 전생에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지만, 28일 중 꼬박 6일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프다. 척추에 에어컨 냉매가 흐르기라도 하는 듯 차가운 기운이 뻗쳐 나가서 한여름에도 뼈를 가르는 듯 춥다. 생간이 갈린 듯한 끈적한 핏덩어리는 적색 피와 섞여 생리대를 흠뻑 적신다. 가끔 무언가 집중하느라 두 시간을 넘겨 버리기라도 하면 하의까지 피에 물든다. 허리춤에 카디건을 질끈 묶어 엉덩이를 가리고 서둘러 퇴근하든지, 매일 여벌 바지를 가방 속에 넣고 다니든지 둘 중 하나다. 짜증 나는 저주의 기간은 사람 간 크기 정도의 배출물을 쏟아낸 후에야 끝이 난다. 가끔 의아하긴 하다. 나는 몸속에 얼마나 많은 간(?)을 가지고 태어난 걸까, 하고. 
그뿐이 아니다. 머릿속엔 먼지가 뒤엉켜 떠다녀서 모든 생각의 고리를 끊어 놓는다. 원한 적도 요청한 적도 없건만 꼬박꼬박 반복되는 생리 기간. 이때마다 나는 내가 여자라는 사실이 저주스럽다. 임신과 출산을 원하지 않는 지금의 내게 대체 생리 따위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이런 마음은 오직 나만 가지는 게 아니다. 사회에서 은근히 떠넘긴 숙제인 임신과 출산을 이미 마쳤거나, 않겠다 결심한 여성 직장인들은 나와 생각이 같다. ‘귀찮은데 왜 자꾸 생리는 하고 난리야. 쓸데없이.’ 그렇다. 정말이지 무용한 허비다. 
만약 내게 임신과 출산, 생리라는 현상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얼마나 더 풍부해졌을까. 산술적으로만 따져 봐도 28일 중의 6일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좀 더 창조적인 일을 하고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잠시 계산기를 두들겨 보았다. 내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생리 기간으로 허비한 시간은 무려 2,659일, 그러니까 7년도 넘는다. 여기에 임신, 출산, 수유 기간을 더하고, 대신 생리 기간을 빼 보자. 대충만 따져도 12년이다. 내가 포유류 암컷 노릇을 하느라 낭비된 시간이 말이다. 12년이면 고등학생이 박사학위도 딸 수 있는 긴 시간이다. 인류의 반-여성-이 원하지도 않는데도 이렇게 인생을 낭비 당한다. 만약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하지 않아도 다음 세대 생산에 문제가 없다면, 여성의 삶은 어떻게 달라지고 세상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마지 피어시의 소설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가 이런 내 의문에 답한다. 

 

1976년에 발표된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는 SF 소설이자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 주인공은 1976년 미국에 사는 멕시코인 유색인종이며, 마약, 매춘, 인체실험 대상이 되는 등, 극도로 신산한 삶을 살아가는 여성 코니다. 조카사위의 주먹질에 기절해 버린 코니는 의도치 않게 매터포이세트라는 장소의 2137년의 미래여성 루시엔테와 접속하여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 그곳은 지리적으로는 같은 나라 미국이었지만, 시간대도 다르고 무엇보다도 문화가 완전히 다른 사회였다. 성과 계급의 완벽한 평등이 구현된 유토피아. 코니처럼 자존감이 낮은 ‘수신자’만이 접속이 가능한 미래사회. 코니는 처음에는 루시엔테의 의지로, 나중에는 자신의 의지로 미래와 현재를 오가는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 그녀는 차츰 변화한다. 자존감과 자기 결정권을 되찾는 쪽으로. “여자로 살아가기에 완벽히 어울리는 방식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자신만만하고,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너무도 적극적이고, 확신에 차 있고, 우아했지만 그래도 여자인 것이 확실한(p.154)” 미래여성 루시엔테처럼. 이런 관점에서라면 어쩌면 이 소설은 성인 여성의 젠더 발견과 그 후의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은 첫 장부터 흡입력이 뛰어나다. 주인공 코니는 침실에서 환상인지 현실인지, 남성인지 여성인지도 구분이 어려운 누군가와 처음으로 진지하게 대화 중인데, 현관문을 절실히 두드리며 이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조카가 등장한다. 임신부 조카는 남편이자 포주인 남자에게 배를 걷어 차이고 사정없는 주먹질에 이까지 부러져 온통 피투성이다. 남편이라 불리는 수컷은 부인에게 매춘을 시켰고, 부인이 매춘으로 번 돈으로 자기 옷이나 구두를 사서 휘감았으면서도 정작 그녀 뱃속 태아는 자기 아이가 아니라며 낙태를 요구한다. 아주 당당하게. 아내가 낙태를 거부하자 포주이자 남편은 주먹으로 아내 배와 얼굴을 때렸고, 임신부는 태아를 살리고 싶어 이모에게 도망쳐 온 것. 이 정도 막장은 아침드라마에서도 방영금지다.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걸까, 충격적인 첫 장면에 독자는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마지 피어시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책을 책장에 꽂아만 둔 지 어느덧 1년. 아침에 문득 ‘몇 페이지 구경이라도 해 볼까’ 하며 펼치기 시작한 소설을 나는 결국 하루만에 다 읽고야 말았으니 말이다. 올해 벚꽃 구경을 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을 깔끔히 포기하고, 위장에 커피를 쏟아부어 가며 단숨에 두 권을 끝낼 만큼, 이 소설은 재미가 있었다. 저자가 자란 녹록지 않은 환경과 당시 미국에 만연했던 유색인종 차별, 저자의 계급투쟁의식이 소설 전반에 맛깔나게 녹아 있어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는 것. 
코니가 기절까지 해 가며 지켜 내려던 임신부 조카는 결국 어떻게 되었을까? 소설은 모든 캐릭터를 구원하지는 않는다. 남편이라는 이름의 포주에게 착취당하면서도 그걸 굳이 ‘사랑’이라 믿고 싶은 나약한 조카는, 마약에 절어 이모를 배신하고 그녀를 정신병원에 감금해 버린다. 그러고는 계속 남편이 시키는 대로 매춘하고, 돈을 벌어 갖다 바치고, 가끔은 정신병원의 이모를 보러 온다. 약물에 절은 그녀에게는 희망도 용기도 없다. 그녀에게 유일하게 남은 의지라면 돈을 더 벌겠다는-결국 남편이 쓸 돈-강렬한 욕구가 전부다. 이런 상태에서는 다른 세계의 누군가가 접속이라도 해 주지 않는 한, 누구라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는 한, 변화라는 게 애초에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그저 더 늙어지고 낡아지다가 결국에는 버려지게 될 뿐. 자신의 결정대로 인생을 살고 있지 않다면, 다른 이가 설계한-부모이든, 사회이든, 소설에서처럼 포주나 남편이든 간에-인생 설계도를 따라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단지 얼마나 더 비참한가 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코니는 달랐다. 그녀는 남자의 주먹으로부터 조카와 조카손자를 보호하려고 몸으로 막을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미래를 보았다. 지금 그녀의 선택에 따라 현실이 될 수 있는 미래들을. 인종도 성별도 차등이 없는 유토피아, 그리고 지금 사회보다도 더 격심하게 차별이 고착화한 디스토피아를. 코니는 선택해야 했다. 자신의 미래를, 자신의 손으로.


글 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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