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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45호] 인간의 욕망, 호르몬의 비극
인간의 욕망,
호르몬의 비극
나는 답답할 때 과학책을 읽는다
크레이지 호르몬
랜디 퍼터 엡스타인 지음 / 동녘사이언스
시작은 다소 괴상망측했다. 오스트리아의 생리학자 오이겐 슈타이나흐. 1920년대부터 20년 가까이 정관수술을 받으면 회춘한다고 주장했다. 인터넷도 SNS도 없던 시절이었지만, 이런 종류의 정보와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솔깃했고 정관수술은 큰 인기를 끌었다. 심지어 어떤 의사는 정관수술의 효과를 검증하기 위해 다른 질병 때문에 병원을 찾은 환자를 대상으로 정관수술을 시행했다. 환자의 동의도 받지 않았다.
엽기적인 실험도 횡행했다. 독일의 의사 아놀드 베르톨트는 1848년 수탉의 고환을 모두 떼어 낸 후, 고환 하나를 수탉의 배에 이식했다.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실험을 통해 베르톨트는 고환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아도 혈액을 통해 모종의 물질(호르몬)을 분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떤 의사는 테스토스테론을 증강시킬 수 있다며 동물의 고환을 환자들에게 이식하기도 했다.
과학과 의학의 상당수는 엉뚱한 호기심으로 출발한다. 엉뚱한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괴이한 실험과 방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호르몬도 그랬다. 엉터리 건강 정보와 돌팔이 치료법이 횡행하면서도 내분비학은 서서히 발전했다. 마침내 1930년대 내분비학은 검증 가능한 과학으로 자리를 굳혔다.
돌팔이 치료법에서 진지한 과학으로
책은 100년 정도의 역사에 불과하지만, 어떤 분야보다 파란만장했던 호르몬 연구의 발자취를 더듬는다. 그곳에는 돌팔이라는 오명을 듣기에 부족함이 없는 의사와 연구자들의 엉뚱한 행동이 숨어 있었다. 그런 에피소드를 만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큰 즐거움이다. 동시에 우리가 미처 몰랐던 호르몬과 관련된 과학적 지식과 숨겨진 역사도 만나게 된다. 그런 이야기를 만나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얻는 큰 유익함이다.
19세기 의사들은 ‘화학물질을 분비하는 샘’이 사람의 온몸에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들의 연구는 20세기 초 호르몬 개념의 성립으로 귀결되었다. 1920년대가 되면 내분비학은 ‘미천한 과학’에서 가장 널리 논의되는 ‘전문 의학 중 하나’로 비약했다. 온갖 돌팔이 치료법을 선전하는 건강 서적이 범람하는 가운데서도 호르몬에 관련된 숨겨진 미스터리를 하나씩 정복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자 내분비학은 ‘진지한 과학’으로 자리 잡았다. 생화학에서 달성한 진보가 과학계의 해묵은 도그마를 뒤집었다. 에스트로겐과 테스토스테론의 사례를 보자. 이 둘은 크게 다른 물질이라는 것이 과학계의 통설이었다. 하지만 연구를 통해 에스트로겐과 테스토스테론은 겨우 히드록실기(基) 하나만 다를 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두 개의 호르몬이 기본적으로 ‘다른 옷을 입은 쌍둥이’였던 셈이다.
호르몬을 연구하는 내분비학은 승승장구했다. 마침내 20세기 후반 호르몬 측정 방법을 알아 냈다. 이전까지 호르몬은 미세한 꾸러미 단위로 돌아다니기 때문에 강력한 효능에도 불구하고 측정이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먹는 피임약을 승인했고, 폐경기 증상을 완화하는 호르몬이 병에 담겨 판매되었다. 다양한 호르몬 치료법이 등장했고, 호르몬을 통해 질병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다양한 시도도 이루어졌다. 어느덧 호르몬 치료는 19세기 말, 혹은 20세기 초와는 또 다른 양상으로 과학적으로 입증된 만병통치약의 수준까지 발전했다.
호르몬을 다루는 내분비학은 ‘진지한 과학’으로 자리 잡았다 (출처: pixabay)
회춘, 건강, 성장… 호르몬 오남용 시대
저자는 호르몬의 이점과 잠재적 위험의 사이에서 이렇게 경고한다. “젊음을 영원히 유지하는 새로운 방법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영원한 청춘에 대한 속설은 유행을 많이 타며, 지속적으로 다시 쓰여지고 있다. 둘째로 ‘자연스러운 것은 안전하다’고 맹신하는 경향에서 벗어나야 한다. 요컨대 호르몬은 우리 몸을 구성하는 물질이며, 우리의 몸속에서 자연스러운 화학 반응을 일으킨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란 말이 있듯, 천연물질인 호르몬도 오남용하면 탈이 나기 마련이다.”
남성성을 강화하는 호르몬, 여성성을 강화하는 호르몬만큼이나 성장 호르몬도 많은 관심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성장 호르몬은 이미 1960년대부터 유행했다. 자녀의 키가 자라지 않을까 걱정하는, 자녀의 키가 더 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기대한 부모들에게 성장 호르몬은 구세주와 같았다. 1984년 스무살 청년 조이 로드리게스가 비행기 좌석에서 쓰러졌다. 진단 결과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CID)이었다. 뇌에 스펀지처럼 구멍이 숭숭 나고, 치매가 신속하게 진행되는 희귀한 뇌 질환이다. 6개월 후 조이는 눈을 감았다.
성장 호르몬이 강력한 의심을 받았다. 조이가 어린 시절 성장 호르몬 주사를 맞았던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죽은 사람의 뇌하수체에서 추출한 ‘사람 성장 호르몬’을 어린이들에게 주입했다. 조이의 죽음 이후 비슷한 사례가 발견되었는데 시신에 잠복해 있던 병원체에 성장 호르몬이 감염된 것으로 조사됐다. 결국 미국 FDA는 사람 성장 호르몬 치료를 금지했다. 부작용이 거의 없는 합성 호르몬으로 대체됐다.
건강부터 기분까지 호르몬은 거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출처: pxhere)
100년 만에 풀린 비만과 호르몬의 미스터리
회춘에 대한 욕망이 상업주의와 결합하면 심한 부작용을 낳는다. 21세기 초 테스토스테론이 큰 인기를 끌었다. ‘저(低)테스토스테론증’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하지만 이 증세의 매뉴얼을 만든 존 몰리 박사는 이렇게 실토했다. “변기에 앉아 두루마리 화장지에 20분 만에 갈겨 쓴 쓰레기 같은 매뉴얼이었다.” 그런 질병은 존재하지 않았다. 질병이 없으면 치료법도 없다.
책은 비만에 관련된 일화로 시작해 비만에 관한 이야기로 끝난다. 1883년 몸무게 230kg의 블랜치 그레이가 죽자 밤마다 시체 도굴범들이 그레이의 무덤을 찾았다. 당시 의사들에게 그레이의 시체는 탐나는 ‘의학 재료’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00년 정도가 흐른 1984년 제프리 프리드먼 교수가 지방세포에서 호르몬 하나를 발견한다. ‘랩틴’이라고 명명된 이 호르몬은 식욕 조절에 관여한다. 비만과 호르몬에 얽힌 미스터리 하나가 100년 만에 풀린 것이다.
지인에게 전에는 안 그랬는데 봄이 되면 심란하다고 하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나이 들면서 여성 호르몬이 많아져서 그래.”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난 가을에도 심란했던 것 같다. 그건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지인은 또 “남성 호르몬이 많아져서 그렇다”고 말할까? 이 책을 다 읽는다고 호르몬에 관련된 모든 궁금증이 해결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호르몬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듯.
글 김형석(《나는 답답할 때 과학책을 읽는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