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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45호] "그렇다고 서둘고 싶진 않다"
"그렇다고
서둘고 싶진 않다"
신동엽 시인 50주기
신동엽 시인 50주기를 맞이해 1월부터 시인의 고향 부여는 물론이고 서울 등 전국에서 다양한 행사를 진행했다. 지난 4월 13일 열린 ‘제17회 신동엽 시인 전국 고교백일장’에는 전국에서 학생 500여 명이 참여했다. 대전에서도 <신동엽 시인 50주기 추모 전국문인시화전>이 지난 4월 16일에서 21일까지 열렸다. 15개 지역 작가 55명이 시인의 삶과 시정신을 추모하는 시를 출품했다. 시화전은 오는 6월 27일 대전 산내 골령골과 9월 28일부터 9월 29일까지 부여에서 열리는 ‘전국문학인대회’에서도 만날 수 있다.
4월 5일에는 신동엽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신동엽학회가 주관한 ‘신동엽 50주기 학술대회-따로, 다르게, 새로 읽는 신동엽 문학’이 열렸다. 학술대회에서는 신동엽 시인의 위치를 확인하는 연구부터 젊은 연구자들이 바라본 신동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의 발표가 이어졌다.
신동엽기념사업회는 ‘신동엽 50주년 특별기획 유튜브 제작’을 비롯해 ‘부여에서 만나는 전국문학인대회’, ‘신동엽 50주년 문학제’ 등 1년 내내 다양한 행사를 기획, 진행한다.
언젠가 부우연 호밀이 팰 무렵 나는 사범학교 교복 교모로 금강 줄기 거슬러 올라가는 조그만 발동선 갑판 위에 서 있은 적이 있었다. 그때 배 옆을 지나가는 넓은 벌판과 먼 산들을 바라보며 ‘시’와 ‘사랑’과 ‘혁명’을 생각했다.
내 일생을 시로 장식해 봤으면.
내 일생을 사랑으로 장식해봤으면.
내 일생을 혁명으로 불질러봤으면.
세월은 흐른다. 그렇다고 서둘고 싶진 않다.
《신동엽 산문전집》 수필 <서둘고 싶지 않다> 중에서
낙화암 앞에 선 시인의 흑백사진은 강한 인상을 남긴다
부여의 백마강 앞에 선 신동엽 시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넓은 벌판과 산들을 바라보며 시와 사랑과 혁명을 생각했다는 시인의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다.
사진으로 만나는 신동엽 시인의 눈빛은 왜인지 슬프다. 또렷하고 맑은 눈빛으로 시인은 자신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인 신동엽. 올해는 신동엽 시인 타계 50주기이다.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봄날, 부여군에 위치한 신동엽 문학관을 찾았다.
신동엽 문학관은 시인의 생가 바로 뒤 공터에 자리했다. 문학관에 들어서면 건물 외벽에 걸린 사진으로 시인을 먼저 만난다. 낙화암 앞에 선 시인의 흑백사진은 특별한 것이 없는데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앞마당에는 시인의 시가 적힌 깃발을 설치했다. 부여 출신 화가 임옥상의 작품이다. 시인의 시는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퍼져 나가고 있는 듯 보인다.
지난 2013년 ‘신동엽 문학관’이 개관했다. 신동엽 문학관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역 등을 설계한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했다. 문학관은 신동엽의 시 <산에 언덕에>를 모티브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신동엽 <산에 언덕에> 중에서
신동엽 문학관은 신동엽 시인의 생애를 정성스럽게 담았다. 짧지만 강렬했던 시인의 삶을 문학관에서 만날 수 있다.
1930년 시인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하고 키도 작은 편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시인의 사진을 보며 ‘고놈 참 똘똘하게 생겼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해 본다. 신동엽 문학관에 전시한 시인의 노트를 보면, 시인이 얼마나 넓고 깊게 공부하고 사유하는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 청년 시절 노트에는 경제, 종교, 생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공부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신동엽 시인은 학창 시절 노자나 장자 책을 늘 끼고 다녔다고 한다. 김소월, 정지용 등 시인의 시집과 문학 서적을 즐겨 읽었던 시인은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에 유년 시절을 보낸 시인은 청년이 된 이후 한국전쟁을 겪었고,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의 염원과 함께했다. 시인은 자신의 언어로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냈다.
신동엽 문학관을 돌아보며, 그의 작품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시인의 필체다. 시인은 자신의 눈처럼 동그랗고 예쁜 필체를 가졌다. 시인은 어여쁜 글씨로 시대가 가진 문제를 가감 없이 써 내려갔다.
신동엽 시인의 필체는 동그랗고 예쁘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중에서
현재까지 신동엽 시인의 시는 많은 이에게 울림을 준다. 신동엽 시인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게 시대의 아픔을 이야기한다. 박근혜 정권의 퇴진을 위한 촛불집회 때도 국민들은 “껍데기는 가라”라고 외쳤다. 40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넘었지만, 민주와 자유를 향한 외침에는 시인의 시가 여전히 함께한다.
신동엽 시인은 1969년 향년 40세에 간암으로 별세했다. 국민방위군을 지내고 귀향하던 도중 잡아먹은 게는 디스토마의 원인이 되었다. 요양과 회복을 반복하면서도 시인은 펜을 놓지 않았다. 만년필을 힘껏 움켜쥔 시인의 흉상처럼 말이다.
창작과 비평은 1975년 《신동엽전집》을 발표했으나 책 내용이 긴급조치 9호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판매 금지되었다. 당시 창작과 비평의 편집인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책 판매는 금지되었지만, 시인의 시는 당시 젊은이들의 입으로, 손으로 전해졌다. 숨어서 함께 시를 읽고, 벽보를 만들어 대학 교정에 붙였다. 1980년 긴급조치가 해제되면서 전집을 다시 발표했지만,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판매 금지 서적으로 분류했다.
신동엽 시인이 세상에 전하는 메시지는 어느 누군가에겐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 주는 위로이자 힘이었지만 누군가에겐 두려움이었다.
창작과 비평은 신동엽 시인의 50주기를 맞아 《신동엽 산문전집》을 발행했다. 《신동엽 시전집》에 이어 6년 만이다. 신동엽 시인의 시극부터 수필, 일기, 기행, 방송대본 등을 수록했다. 신동엽 문학관에서 느꼈던 정성스러움이 책에서도 묻어난다. 아내 인병선 여사에게 쓴 편지에는 애정이 그득하다. 편지는 대부분 “경”, “경에게”라고 시작한다. 병으로 인해 한동안 부여와 서울에서 떨어져 지낸 두 사람의 애틋함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경에게
조선일보에 입선되었구려. 수상(授賞)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소. 있게 되면 곧 상경해야 할 게고. 신문사 연락이 있는 대로 다시 또 편지 쓰겠소. 이런 때 옆에 있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운 일이겠소만, 그럴 수 없는 처지 가슴 아프오.
1959년 1월 1일 편지 중에서
1985년 신동엽 시인의 생가를 복원했다. 작고 소담한 집이다. 시인이 자라고, 신혼 생활한 생가는 한때 타인의 소유였지만 아내 인병선 여사가 되사서 재건축했다. 초기에는 시인이 살았던 초가집이었으나 이제는 파란색 기와로 바뀌었다. 고개를 들면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오는 툇마루에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신동엽 생가 마당에서 시인이 꿈꿨던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생각해 본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네가 본 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갔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중에서
글 이지선
사진 이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