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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45호] 강가에서 가만히
강가에서
가만히
함순례 시인
대동천이 흐르는 강가에 봄이 왔다. 버드나무 이파리 돋고 꽃나무에 연한 꽃잎이 매달렸다. 함순례 시인의 일터가 삼성교 곁이다. 소박한 강변의 풍경이 시인을 만나러 가는 길답다고 여겨졌다. 붉은 벽돌 2층집 마당 한쪽에 아기자기한 꽃밭이 있다. 정성스럽게 가꾼 그 꽃밭이 시인이 오래 일하고 있는 도서출판 심지와 도서출판 애지를 보여 주는 듯했다. 도서출판 심지는 2004년에 문을 열어 지금까지 대전 지역에서 출판을 하고 있다. 도서출판 애지는 애지시선을 꾸준히 발간해 4월에 80번째 시집을 낸다. 함순례 시인은 편집부장으로 일하며 애지시선집을 기획하고 편집한다.
“저는 시인이잖아요. 시가 안 읽히는 시대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시 확산 운동이자, 문화운동이죠. 심지는 종합 출판으로 다양한 책을 발간하고 이를 통해 애지시선을 낼 수 있는 재정을 마련해요.”
지역에서 출판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전국의 시인들이 애지시선으로 시집을 내고 싶어 애지의 문을 두드릴 때 함순례 시인은 보람을 느낀다. 그녀는 이뿐만 아니라 2018년 2월부터 대전작가회의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가 회장을 맡은 건 선배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예요.”
출판사 일을 하면서 대전작가회의 회장 활동을 하는 것은 녹록하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회원들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고민하며 다양한 일을 추진하고 있다. 작년에는 대전작가회의가 처음으로 대전 단독으로 작가회의를 열었다. 또 2019년 전국문학인대회 대전 행사로 〈문학과 놀자 대전을 읽자〉를 개최했다. 신동엽 시인 50주기와 대전방문의해 원년을 맞아 방대한 규모의 사업이 진행된다. 차돌처럼 단단하고 짱짱하게 앞으로 나아가며 일하는 그녀의 힘이 어디서 비롯되었나 했더니 그것이 다 ‘시’ 때문이었다.
“시를 읽고 쓸 때 힘이 나요. 시와 놀 때, 내가 살아 있다는 감정이 강렬하게 느껴지니까 힘이 되죠. 제가 일을 열심히 하는 이유는, 얼른 일을 마치고 시와 놀기 위해서예요. 사람들이 저보고 탱크처럼 일한다고 해요. 얼른 일을 끝내 놓고 시와 단 둘이 있으려고 열심히 하는 거죠.”
시는 그녀에게 힘이 되는 존재지만 시를 쓰며 상상언어와 이미지언어가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 고통스럽다. 함순례 시인은 자신이 경험의 언어, 진술의 언어가 강한 편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상상력과 이미지의 발현을 위해 노력한다.
함순례 시인은 대전에 오래 살았다. 오장환 문학관 생가터가 있는 충북 보은 회인면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고향에 살았다. 고등학교를 청주에서 다녔고 스무 살에 대전으로 와 취직을 했다.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며 청춘을 다 보냈다. 그렇게 대전에서 일하고, 결혼하고, 등단도 하고 30년을 살았으니 대전이 제2의 고향이다. 3년 전부터 세종시에 살지만 여전히 대전이 일터이자 삶터이다. 올해 네 번째 시집 발간을 앞두고 있는데, 다섯 번째 시집에서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한 형상화 작업을 해 보고 싶다.
“회인 하면 추억도 많지만 상처와 결핍도 있어요. 대전은 친정 같은 따듯함이 있어요. 그래서 늘 대전을 먼저 챙기고, 대전이 중심에 있어요.”
그녀는 초등학교 때부터 글을 썼다. 처음에는 산문을 썼고 백일장에도 다녔다. 1993년에 시인으로 등단을 하고 소설을 쓰고 싶어 기웃거린 적이 잠깐 있지만, 글쓰기 이외에 다른 일은 넘보지 않았다.
열일곱 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부재에서 비롯된 통증과 결핍이 그녀를 쓰게 만들었다. 시를 쓰며 스스로를 치유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가족, 주변 사람들을 읽는 일에 깊이 몰두해 있었어요. 다른 사람의 그늘과 아픔도 깊이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죠.”
이렇게 시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진짜 시는 고통과 함께 찾아왔다.
“사람이에요. 사람. 저에게 시의 대상은 사람이에요. 4월 벚꽃잎 흩날리는 풍경만으로는 시가 안 와요. 그 아래 노인이 한 걸음 한 걸음 힘들게 걸음을 떼며 벤치까지 천천히 걸어갈 때, 풍경이 시로 와요. 사람과 연결될 때요.”
세 번째 시집 《나는 당신이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에 실린 〈저녁강〉도 풍경과 사람이 이어진 시이다. “전화기 너머/ 가라앉은 목소리가 강물을 적신다/ 너의 강가에 앉은 나도 억새 물결이다(〈저녁강〉 중에서)”
“세종에 이사 가서 강가에 살게 되었어요. 이사 가서 강변 산책을 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는데 〈저녁강〉, 〈나는 하수다〉를 강을 보면서 쓰게 되었죠. 금강 가까이 가면 물결이 제법 세게 흐르는 것을 느껴요. 억새가 흩날리는 계절에 살구나무 한 그루가 있는 걸 보고 오래전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이것이 연동되면서 이미지로 떠오른 거예요.”
“살아있으므로/ 나는 매일매일 격렬하다/ 기꺼이 하수다(〈나는 하수다〉 중에서)” 강물 앞에서 마음을 내려놓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시인의 글귀가 기꺼이 누군가에게 또다시 힘이 되어 준다.
함순례 시인은 어떤 정신으로 살 것인가를 고민한다. 첫 시집 첫 번째 시 〈꼴림에 대하여〉에서 “꼴림은 떨림이고 싹이 튼다는 것/ 무언가 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라고 썼다. 20대의 그녀에게 ‘꼴림’은 화두였다. 모든 사람을 작동시키는 에너지로써의 꼴림이다. 그녀는 무기력함만큼 큰 병이 없다고 말한다. “꼴리면 하고”라는 식의 말투가 그녀의 습관이었다. 인생을 어떻게 끌고 가고 싶은가 하는 끊임없는 자기 질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정신에 대해 생각한다.
“〈옥주〉라는 시에 사할린에서 만난 조옥주 가이드 선생님이 나와요. 그분이 굉장히 멋진 분이었어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척박한 땅에서 자기 정신을 지키면서 자기 세계를 일구어 나가는 분이었죠. 그 깡깡한 정신이 감동적이었어요. 이런 사람들이 나에게 주는 정신, 표상들을 통해서 50세까지 이렇게 살아왔다면, 앞으로 어떤 정신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해요. 시인으로서, 인간 존재로서.”
정신. 참 오랜만에 듣는 단어였다. 시간을 초월한 힘과 빛이 그녀의 얼굴에서 흘러나왔다. 다시 사할린을 방문해 조옥주 씨를 인터뷰하고, 그 삶을 책에 담고 싶다는 계획도 있다.
고단하지 않은 사람은 없겠으나, 그 고단함을 가뿐히 뛰어넘는 힘이야말로 정신으로부터 비롯될 것이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은근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불 땐 아궁이 앞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참 힘나고 따듯했다. 그녀의 시에서, 그녀에게서 쌉쌀하고 쨍하며 한편으로는 몸에 좋은 그런 맛을 느낀다. 봄날, 머위나물처럼.
“내일은 알 수 없는 세계// (…) 절름거리는/ 단 하루의 빛// 내일은 도무지 알 수 없는 세계(〈무늬들〉 중에서)”
지역에 살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결국 시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함순례 시인은 말한다.
“내가 얼마만큼 쓰고 싶은가, 나는 정말 이 일이 재미있어서 하는가, 이 일을 즐기는가가 중요해요.”
이 알 수 없는 세계에서 흐르는 물결 위에 시로 정확하게 물수제비를 뜨는 함순례 시인의 다음 시집이 참 궁금하다. 그 시들을 읽고 기운 차린 사람들이 또 다시 그의 시로 들어간다. 시인은 강가에서 가만히 그들을 바라본다. 이 봄날.
글 사진 이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