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44호] 4월이 오면, 눈부신 꽃잎의 그늘을 기억하자

4월이 오면,

눈부신 꽃잎의 그늘을

기억하자 

    

정덕재의 일상르포

  


  

“작가님 그거 믿으세요?”
홍래 어머니를 만났을 때 들은 첫마디였다. 커피숍 구석에 앉아 있던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휴대폰에 담겨 있는 사진 한 장을 보여 주었다. 아파트 베란다 난간에 앉아 있는 작은 새 한 마리였다. 
홍래가 세상을 떠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은 이사를 했다. 이사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오후에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아파트 난간에 앉았다. 가까이 다가가도 날아가지 않았다. 이상한 생각에 휴대폰으로 새의 모습을 담았다. 새는 서너 시간가량 난간에 앉아 두리번 거렸다. 여기저기 방안을 쳐다보기도 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어머니는 죽은 홍래가 새가 되어 돌아온 것이라 믿었다. 홍래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사할 집을 결정했기 때문에 어머니는 홍래와 함께 미리 집 구경을 한 적이 있다.
나는 홍래 어머니가 보여 주는 새 한 마리를 보며 울컥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세상을 떠난 단원고 학생들의 삶을 간략하게 기록한 약전작업이 경기도교육청 주관으로 진행됐다. 100명도 훨씬 넘는 작가들이 이 작업에 참여했다. 나는 하늘로 올라간 홍래를 통해 가족들을 만났다. 어머니가 들려준 홍래의 짧은 삶과 작은 새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도 종종 생각난다. 

  

4월의 죽음 
내가 소속해 활동하는 스토리밥 작가협동조합에서는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숨쉬는 4.16’이라는 주제로 세월호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여러 작가가 인터뷰와 원고 집필에 참여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이는 스무 살 청년 송인효이다.
스무 살 청년 송인효가 대전 대흥동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이유는 가만히 있지 않기 위해서였다. 세월호 사고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하면서 그는 자신의 역할을 스스로 물었다. 그래서 사고 발생 다음 달부터 기타를 메고 거리 공연에 참여했다. 그때 처음 부른 노래가 자작곡 <노래하는 건>이다. 어느새 5년, 그 사이 청년은 군대에 다녀왔고 여기저기 공연을 다니고 있다. 인터뷰 당시 했던 그의 말은 지금도 생생하다.
“풀무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이 들려주신 말씀인데요. 지금도 생활의 지표처럼 삼고 있는 말입니다.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픈 곳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곳도 아픈 곳이다. 이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어요.”
충남 당진에서 만난 정서희 씨가 세월호를 기억하게 된 계기는 참으로 극적이다. 죽음의 순간에도 삶은 탄생한다. 죽음을 목격하면서 얻은 삶이기에 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4년 4월 16일, 그녀의 뱃속에서 새생명이 태어났다. 제주를 밟지 못한 채 진도 앞 바다에서 푸른 청춘들이 숨진 그날이었다. 죽음을 통해 삶을 깨달았다. 정서희 씨가 당진버스터미널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한 것은 그들의 죽음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세월호 1인 시위를 시작하는 분을 보면서 많은 걸 느꼈어요. 저는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됐다는 핑계로 자기 합리화를 하며 가만히 있었는데 마음이 괴로웠어요.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되면서 나오게 됐죠. 제가 처음 나온 게 막내가 5개월 차 되던 때였어요. 엄마들 모임하는 인터넷 카페에 글을 올렸어요. 제가 나가고 싶은데 같이해 주실 분 없냐고 했죠. 사실 혼자 서기에 겁이 나기도 했거든요. 시간이 지나면서 한두 명씩 참여하는 분들이 늘었고 격려하는 분들도 생겼어요.”
이후 그녀는 남편의 직장관계로 경기도로 이사를 했다. 떠나기 전에 그녀는 그곳에서도 세월호 기억을 이어 가겠다고 말했다.
  

기억의 방식
또 다른 그녀는 평범했다. 아이 둘을 키우며 직장에 다니고 살림하는 엄마이자 아내였다. 정치적인 이슈에 크게 관심을 가진 적도 많지 않다. 사회적인 문제를 깊게 고민하던 시간도 거의 없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그녀의 궁금증은 단 하나였다. “어떻게 그 많은 학생들 가운데 한 명도 구하지 못했지?”
평범한 주부 박민선 씨는 오래 전부터 바느질을 좋아했다. 직장 생활하는 동안엔 바느질 할 시간이 별로 없었지만 둘째 아이가 조금 크고 난 이후엔 바느질과 퀼트를 했다. 재봉틀을 이용해 옷과 가방을 만들었다. 자신의 바느질 솜씨로 세월호를 기억할 줄은 그녀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세월호로 숨진 단원고 학생들 어머님들께 뭔가 해 드리고 싶었어요. 사고 이후에 집에 와서 슬퍼만 하고 있으니까 생활이 힘들더라고요. 남편도 교사인데요. 남편이 그러더라고요. 나도 거기에 탔다면 못 나왔을 거라고. 이런 말을 들으니까 너무 미안한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을 했죠. 그래서 바느질로 이름을 새기기 시작한거죠. 아이들을 숫자가 아닌 이름으로 한 명 한 명 기억하고 싶어서 하게 됐어요.”
박민선 씨는 250명 학생들의 이름을 적으며 작은 기억인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축구선수가 꿈인 학생에게는 축구공을, 의사가 꿈인 학생에게는 의사 가운을 바느질로 한 땀 한 땀 형상화했다. 이후 그녀는 대전을 떠나 남녘 땅으로 이사를 했다. 부부는 여전히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고민과 싸움을 이어 가고 있는 중이다.
대전에서 작은 공방을 운영하는 목수 고충환 씨는 나무고리에 불도장을 찍으며 세월호의 죽음을 기억한다. 그가 찍는 도장은 단순한 문구가 아니라 고통과 슬픔을 함께한다는 각인이다. 지금까지 수만 개의 나무고리를 전국으로 보냈다. 그는 작업을 하면서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더욱 경건해졌다.
“다른 작업과 달리 마음이 사뭇 다르죠. 보통은 일상적으로 들어오는 주문 작업을 끝내고 밤에 고리 만드는 작업 진행하는데요. 때로는 마음이 복잡하고 심란하기도 하지만 막상 불도장을 찍고 고리를 다듬고 있으면 새겨진 글처럼 ‘잊지 않겠습니다. 행동하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더욱 간절하게 갖기 마련입니다. 그러면서 세월호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죠. 참으로 작은 일이지만 이런 작업이 유가족들에 위로나 힘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합니다.”
변동의 작업장이 원내동으로 바뀌었고 주름이 한두 개 더 늘어난 것이 작은 변화이다. 그는 여전히 불도장을 찍고 세월호 리본문양의 고리를 만들고 평화의 물고기를 만들며 쓰러져 간 청춘들과 유가족을 기억한다.
매달 16일마다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라는 뜻에서 집회를 갖는 이들도 만났다. <매월 16일 세월호 기억행동>이라는 이름으로 피켓을 들고 서명을 받으며 잊혀질 수 없는 죽음을 말하는 이들은 참교육학부모회 대전지부 사람들이다. 또한 매주 화요일 으능정이 거리에서 세월호 리본을 나눠 주며 잊지 말아야 할 죽음을 애도하는 이들도 있다. 3년 동안 세월호를 기억하다가 자신이 기억의 대상이 된 유랑자 고 이명영 씨는 여전히 ‘노란리본 아저씨’로 하늘에서 우리를 내려보고 있다.

 
벚꽃의 찬란한 그늘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어느새 5년의 세월이 지났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는 게 상처라지만,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는 죽음의 그림자는 많은 이들의 가슴을 시리게 만든다. 아직도 논란이 되는 사안이 있고 규명되어야 할 문제도 남아 있다.
벚꽃잎 흩날리는 4월의 봄날은 찬란해서 슬프다. 살아 있는 자의 슬픔은 더욱 짙어졌고 여기저기 전염됐다. 많은 이들은 죽음을 통해 삶을 돌아본다. 그리고 망각한다. 잊고 싶은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지워지지 않는 꽃물처럼 그들의 죽음을 우리의 품 안에 새겨 잊지 말자.   
4월이 오면, 누군가는 혁명을 떠올리지만, 우리는 혁명보다 붉게 물든 청춘의 생애를 기억하며 꽃잎 같은 인생을 떠올려 보자. 자신의 삶이 소중하다면 누군가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외쳐 보면 어떨까. 떨어지는 꽃잎이 나무에 매달린 꽃잎에게 말을 걸듯이, 메멘토모리.

  


글 정덕재(시인,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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