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43호] 내 취향은 어느 부위?

내 취향은

어느 부위?

  

로와의 책탐

《미친 노인의 일기》 다니자키 준이치로

  

  

죽어서라도 나는 느껴 볼 것이다.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마찬가지로 사쓰코도 땅속에서 기꺼이 그녀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내 혼의 존재를 느낄 것이다. (178p)   

 


 

몇 년 더 살았더라면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리라는 일본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 그는 평생 일관되게 탐미주의 ― 좀 더 구체적으로는 패티시즘, 마조히즘, 금기타파 ― 를 추구했고, “일본인 미의식 저변에 잠재하는 호색과 에로티시즘의 전통에 서양 문화를 융화하여 순수 문학으로 격상시킨 천재 작가”라 일컬어지는 독보적인 존재다. 그는 1958년에 처음으로 노벨상 후보에 올랐고, 1960년에는 최종 후보 5인에 포함되기도 했다. 일본 최초의 노벨문학상은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인데,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그보다 고작 3년 전인 1965년에 심장마비로 별세하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수상자 이름이 바뀌었으리라는 게 문단의 평이라 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전집에서 나는 세 권을 골라 연달아 읽었다. 《치인의 사랑》, 《열쇠》, 《미친 노인의 일기》. 세 권 모두 1인칭 시점이라 몰입도가 높다. 《치인의 사랑》은 15세 소녀 나오미를 데려다가 씻기고(!), 먹이고, 가르친, ‘파파’이자 남편인 열세 살 연상남 조지가 부인을 여신처럼 숭배하며 그녀의 육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야기, 《열쇠》는 뒤늦게 눈뜬 희락에 빠져들어 결국 한쪽이 죽을 때까지 섹스하는 중년 부부의 건전한(?) 이야기다. 곳곳에 여성의 신체를 탐미적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표현으로 가득하다. 사회문제, 계급의식, 역사의식, 이런 건 1밀리그램도 함유되어 있지 않은 소설. 이런 책도 일본에서는 출판이 되고, 순문학으로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호색은 진즉 넘었고, 변태, 엽기, 금기까지도 사뿐히 즈려 밟아 버린 그의 소설들. “일본 작가가 아닌 한 이렇게 쓸 수가 없어!” 

 

세 번째 소설 《미친 노인의 일기》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나는 깨달았다. 준이치로를 읽기 전과 후의 나는 절대 같은 사람일 수가 없음을.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내 안의 음흉한 인격이 깨어나고야 말았음을. 내가 남녀불문하고 신체를 유심히, 그것도 부위별로 조목조목 관찰하고 있다니! 어떤 음식을 먹느냐가 몸을 이룬다면, 어떤 책을 읽는지는 영혼을 만든다. 대체 누가 내게 이 소설을 추천했는지 잠시 기억을 더듬어 봤다. (그리고 나는 독자들께 이 소설을 추천하고 있다. 우훗)

 

내게 생전 처음으로 ‘한 번만이라도 만져 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저절로 손이 뻗어지려는 낯선 경험을 유발한 완벽한 엉덩이가 있다.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만난 그것은, 안타깝게도 따스한 피가 흐르지 않았다. 오호통재라! 아폴론 또는 다비드 상이었던 것 같은데 (죄송하다. 엉덩이만 뚫어져라 보느라 그게 누군지도 확인 안 했다.) 글자 그대로의 ‘군침 도는 엉덩이’란 게 무엇인지 나는 처음 느꼈다. 내가 얼마나 그 엉덩이 곡선을 느껴 보고 싶었던지. 한 번만이라도 쓰다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경보기가 울리고 무서운 표정의 박물관 관리자에게 추궁당하다가 국제망신을 당할까 두려워 용기를 못 냈다. 대신 군침 삼키며 카메라 셔터만 눌러 댈밖에. 그 전에도 그 후로도, 내게 그만큼의 욕정을 불러일으킨 엉덩이는 없었다. (쳇, 인간 엉덩이 따위!) 
이런 낯 뜨거운 이야기를 이렇게 스스럼없이 글로 써 댈 수 있는 이유는 단연 다니자키 준이치로 덕분(?)이다. 그가 76세에 쓴 성애탐구소설 《미친 노인의 일기》에서 주인공이자 화자인 ‘나’는,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닌 며느리의 발에 푹 빠지고 만다. 설정부터 금기타파다. 며느리 발을 만져 볼 수만 있다면, 혹은 핥아 볼 수만 있다면, 노인의 머릿속엔 오직 그런 생각뿐이다. 매저키스트이자 발 패티시인 노인은 며느리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 준다. 어차피 앞으로 살날은 많지 않고 돈은 죽을 때까지 쓰고도 남으니, 며느리가 갖고 싶다는 3천만 원짜리 호안석 반지쯤이야 키스 한 번과 교환할 가치가 충분하고도 남는다. 체면이나 거리낌이 없는, 호색과 탐미의 극치. 담당의사조차도 노인이 살아가는 힘이 오직 호색이라 진단했기에 가족들도 노인의 행동을 용인해 주는 분위기다. 오히려 며느리에게 시아버지의 도발을 조금만 참아 주라는 식이니, 우리나라와는 문화가 달라도 아주 많이 다르다. 한편 노인의 발에 관한 집착은 대단하다. 죽은 뒤에 자기 묘지 위에 며느리 발을 본뜬 조각상을 세우겠다는 대목의 일부다. 

 

어쩌면 흙 속에서 뼈와 뼈가 딱딱 소리를 내며 뒤얽혀서 서로 웃으며 노래하고 삐걱거리는 소리까지 들릴지 모른다. 아니, 그녀가 실제로 돌을 밟고 있을 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자신의 발을 모델로 한 불족석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 돌 아래에서 뼈가 울고 있는 소리가 들릴 터다. 나는 울면서 ‘아파, 아파,’ 하고 외칠 것이며, ‘아프지만 즐거워, 더없이 즐거워, 살아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즐거워’라고 외칠 테다. 또 ‘더 밟아 줘, 더 세게 밟아 줘’라고 외치리라. (179p)

 

그래, 이것이 진정한 패티시구나, 하는 깨달음을 주는 대목이었다. 노인은 마조히즘적 발 패티시라서 여성의 발에 밟히면서 쾌감을 느끼는 풋잡을 죽어서라도 느껴 보고 싶은 거다. 이 대목에서 나는 잠시 독서를 멈추고 내 발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한참 뚫어져라 바라봐도 얻은 것이라고는 오직 이것뿐 ― ‘음. 발톱을 깎을 때가 되었군.’
작가와 작품은 별개라는 상식(?)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에게는 적용하기 어렵다. 소설에서 1인칭과 일기 형식을 적절히 활용해서 독자의 몰입도를 최대로 끌어올리던 저자는 여성의 발과 ‘나쁜 여자’에게 끌리는 성향이었다고 전해진다. 기생 출신이라 결혼했는데 알고 보니 순종적인 현모양처형이라며 실망하고 부인을 구박하다 못해 심지어 친구에게 양도하겠다는 신문광고까지 낸 양반이다.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일본 문학계 최대의 스캔들이라 한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처제(《치인의 사랑》 나오미의 모델)와 묘한 사이가 되기도 했었고, 현모양처 부인과 이혼 후에는 꿈에도 그리던 ‘나쁜 여자’와 50세에 재혼, 남은 생은 그녀를 (그녀 발을?) 숭배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소설뿐 아니라 삶에서도 일관되게 패티시즘과 탐미주의를 추구했다고나 할까. 70대에 쓴 《미친 노인의 일기》에서는 그의 소망과 취향을 문학으로 승화시켜 영원히 후세에 남긴 셈이다. 그의 소설에는 다양한 ― 발, 어깨, 등, 심지어 체액까지 ― 패티시가 등장하곤 한다. 특히 발. 어쩌면 남성이 더 시각에 예민하다는 속설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모든 헬스장 선전사진에는 쵸콜릿 복근을 자랑하는 웃는 얼굴의 코치 사진이 나오는지도.
나는 좀 다르다. 특히 울퉁불퉁한 배 ― 복근이던 지방이던 ― 는 질색이다. 어쩌면 식스팩은 남성의 자아도취일지도 모른다. 마치 풍만한 가슴이 여성 자신의 희망사항이듯이. 나는 다비드 상의 엉덩이로 한껏 눈이 높아진 이후로는 현실세계의 남자 엉덩이에는 흥미를 잃었다. 아무리 유심히 뜯어봐도 현실세계 남성의 신체는 썩 섹시한 구석이 없다. 애초에 노출된 부분이 적기도 하나 옷 위로 보이는 곡선도 그다지다. 아무리 어깨, 손, 무릎, 종아리를 샅샅이 분석해도, 만지고 싶다거나 핥아 보고 싶은 부위가 없다. …굳이 궁금한 신체부위라면 엉덩이와 그 앞쪽 정도랄까? 안타깝게도, 둘 중 어느 곳도 쉽게 구경할 수가 없는 부위인 데다가, 구경이라도 할라치면 나 역시 그에 상응하는 부위를 보여 줘야만 할 터이니 선뜻 엄두가 안 난다. 게다가, 사회에서 세뇌당한 때문인지는 몰라도, 오히려 내게는 여성의 가슴이 더 섹시하게 느껴진다. 특히 내게는 없는 깊은 가슴골은 내 심장을 빨리 뛰게 만든다. 하얀 피부에 D컵 가슴인 여성을 보면 나는 부러움과 시샘이 섞인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고야 만다. ‘상의 벗고 거울만 봐도 행복할 테니 평생 우울증에 걸릴 일도 없겠네. 좋겠다’ 하는 생각. (이거, 커밍아웃?)
나는 시각보다는 후각이다. 열 가지 향수 중에 그날의 기분과 업무에 맞는 향기를 입고서야 출근하는 나는 갖다 쓸 데도 없는 식스팩 따위보다 체취가 더 본능을 강하게 자극한다. 나는 꽤 코가 민감한지 일상이 만만치 않다. 이를테면 쩌는 담배 냄새나 구운 삼겹살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2미터 이내로 접근하면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자리에서 벗어나고야 만다. 산소가 모자란 방에서 호흡이 곤란하듯이, 나쁜 냄새가 가득한 공간에서는 숨쉬기 힘들어서다. 반면에, 들이마시고 싶은 향기를 풍기는 사람도 가끔씩, 아주 가끔씩은 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를 나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기에, ‘뜯어 먹어 버리고 싶은 향기’를 가진 사람을 한번쯤은 만나봤으면 좋겠다는 꿈도 갖고 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가슴에 코를 박고, 흠뻑 냄새 맡고, 몸을 핥고, 침을 빨아 먹게 해 달라고, 한 번만이라도 허락해 달라며 무릎 꿇고 애걸할지도 모른다.
뭐니뭐니 해도 향기의 향연은 침대 위이리라. 다비드의 엉덩이를 가진 채식주의자 남성과 나체로 침대 위에서 뒹군다면 그에게 뿜어 나오는 체취만으로도 황홀할 텐데. 아마도 내 절정의 최고치가 갱신되리라는 예측, 여기까지는 쉽다. 그러나 이건 오직 시뮬레이션, 실증 없이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사고실험. 같은 사고실험이라도 아인슈타인의 게당켄익스페리먼트(Gedankenexperiment)는 상대성원리를 만들었건만, 나의 사고실험은 이런 결론만 내줄 뿐이다: “지난 40여 년간의 데이터를 토대로 한 객관적 추론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이번 생은 여기까지라고 판단된다.” (한 줄 요약: “알잖아, 이번 생은 틀렸어!”)
뭐, 그렇다는 얘기다.

 


글 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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