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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2호] 슬기와 나, 스포트라이트를 빼앗으러 왔습니다
슬기와 나,
스포트라이트를 빼앗으러 왔습니다
영화 엑스트라 도전
“내일 구석으로부터에서 영화 찍는다고, 엑스트라 할 수 있냐는데?” 저녁을 먹다 들은 소식에 나와 슬기는 단번에 하겠다 말했다. 영화 엑스트라는 꼭 한 번 해 보고 싶었던 일이기도 했다. 이렇게 기회가 쉽게 오다니. 하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여기가 그 영화 촬영 장소인가요?
슬기와 나는 퇴근 후 밥도 든든하게 먹었겠다, 영화 촬영 장소인 ‘구석으로부터’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커튼이 쳐져 있어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 담당자에게 소심하게 문자를 보냈다. ‘저희 다 왔는데, 들어가도 되나요?’ 그 와중에 슬기가 커튼 속으로 머리를 살짝 집어넣고 동태를 살폈다. “들어가도 되겠는데?”
그 타이밍에 ‘네, 들어와도 돼요’라고 문자가 왔다. 커튼을 걷고 들어가니, 밴드 리허설이 한창이었다. 오늘 우리가 참여하는 장면은 영화 마지막 부분이다. 주인공이 공연을 관람하는 장면에서 우린 관객 역할을 맡았고 아마도 관객 3, 4역 정도 될 거다. 나와 연락을 주고받은 담당자가 사람들을 모아 놓고 1명 1명 소개했다. 주연과 조연, 엑스트라가 모두 함께한 자리다. 그중에 엑스트라는 한 예닐곱쯤 있었다.
관객씬에 앞서 밴드 공연 모습 먼저 촬영에 들어갔다. 이중훈 감독이 “카메라 롤”이라 말하자 이어 카메라 감독과 오디오 감독이 차례로 “카메라 롤”이라고 반복했다. 스크립터가 “씬 6-4-1”이라 말하며 슬레이트를 치고 이중훈 감독이 ‘액션’을 외쳤다.
순식간이었다. 액션이라는 말 한마디에 공기가 차분히 내려앉았다. 침 한 번 삼키기도 어려워 입 안 가득 침이 고였다. 꼭 이런 순간이면 괜히 헛기침도 한 번 하고 싶고, 목도 가다듬고 싶어지는 청개구리 정신이 발동한다. 꾹 참았다.
보컬이 가사를 틀려 첫 촬영 후 첫 NG가 났다. NG를 보는 것만으로도 어찌나 영광스러운지, 그냥 촬영장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지루함과 추위와 싸우다
세 번 정도 밴드 공연 촬영을 하고 드디어 우리 차례다. 씬 6-8-1, 우리 연기의 첫 시작이다. 아무에게도 보일 일 없던 우리의 멋진 연기를 선보일 차례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대단할 것도 없는, 사실 연기랄 것도 없는 장면이긴 하다. 우리가 할 거라고는 그저 공연을 관람하듯 고개를 흔들흔들, 까딱 거리는 것뿐이다.
별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긴장이 되고 어색한지, ‘카메라 롤’ 소리가 들리자마자 웃음이 삐져나왔다. 웃을 일 하나 없이 진지한 상황이었지만, 그 진지한 상황이 참을 수 없게 간지러웠다. 아무런 노래도 없는데 노래가 들리는 것처럼 음미하라니. 촬영 중 들리는 소리라고는 패딩을 입은 사람들이 몸을 좌우로 살짝 살짝 흔드느라, 스윽-스윽 의자에 외투가 쓸리는 소리뿐이었다. 통나무처럼 앉아 있던 사람들이 ‘카메라 롤’ 소리에 몸을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게 ‘카메라 롤’은 예열 단계 같은 거라 본격 촬영은 감독의 액션 사인이 떨어지면 들어간다. 나는 액션 사인이 떨어지기 전에 웃음을 참으려 입을 마구 비틀었다. 다행히 고비를 넘겨 민폐를 끼치진 않았다.
그 후로 몇 번인가 있지도 않은 리듬에 몸을 맡겨야 했다. 또 웃음이 터져 나올까봐 걱정되어 촬영하지 않을 때도 계속 몸을 흔들고 있었다. 나중에는 배우들이 앞에서 노래를 불러줘 더욱 자연스러운 그루브(?)가 나왔다. 여유가 생겼는지 슬기는 웨이브를 나는 헤드뱅잉이 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물론 남의 영화 망칠 생각은 없어 얌전히 하라는 대로만 했다.
우리는 본격 촬영에 들어갔고, 그제야 알았다. 이제부터는 지루함과 추위와의 싸움이란 것을. 공간을 데울 만큼의 난로와 열은 부족했고 움직이질 않으니 계속해서 추워지기만 했다. 위에는 외투를 입어 그나마 나았지만, 하필 발목이 보이는 바지를 입고 와 시간이 지날수록 발목이 차가워졌다. 추위와 더불어 지루함도 더해졌다. 중간에 장비를 재정비하고 스텝들이 이야기를 나눌 동안 우리는 할 일이 없었다. 그냥 우두커니 자리에 앉아 수다나 떠는 게 전부였다. 슬기는 많이 심심했는지, 아코디언을 연주하던 배우에게 다가가 3분 아코디언 강습을 받기도 했다.
구경만 할게, 구경만!
우리가 한 거라곤 없었다. 그저 앉아 있으라니 앉아 있었고, 리듬을 타라니 시키는 대로 리듬을 탔을 뿐이다. 이들에게 우리가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을 거란 생각에 사로잡혔다. 우리야 새로운 경험 한번 해보자는 심산으로 신나게 갔던 거지만, 정말 우리가 쓸모 있긴 했나 싶다. 그래도 민폐나 안 끼쳤으니 그걸 다행으로 삼았다.
촬영장 안은 더없이 추웠지만, 또 더없이 즐겁고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본래 이 영화의 카메라 감독은 밴드 기타리스트 배역이 없어 카메라를 잠시 내려 두고 기타를 들었다. 영화를 찍는다고 하니 돕는 이도 많았다. 서로 건너 건너 아는 사이다 보니 몇 없는 NG가 나도 그저 즐겁다. 추위와 기다림에 질색한 건 우리 둘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티를 낸 건 우리밖에 없었다. 하루 온종일 촬영을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머문 3시간은 ‘고작 3시간’ 정도일지도 모른다.
왠지 모르게 불청객이 된 건 아닌지 불안감과 미안함이 한가득이다. 안 나올 수도 있지만, 나와도 엄청 짧은 시간일 텐데 그 짧은 시간에 내가 아닌 석상 하나가 앉아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혹시 다들 알지 모르겠지만, <개그콘서트>에서 한창 인기몰이를 했던 코너 ‘불청객들’에 불청객이 된 것만 같다. 그 코너에도 딱 개그맨 두 명이 나왔지. 코너 속 유행어처럼 ‘구경만 할게, 구경만’ 하고 들어가서 정말 딱 구경만 하다 온 것 같다. 영화 제작이 완료되면 상영회를 한다는데 가도 될는지, 그보다 우리가 나오긴 하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머리털 한 가닥이 나와도 우리의 흑역사를 마주하러 가 볼 셈이다.
함께 엑스트라로 참여한 슬기의 한마디
갑작스럽게 들어온 영화 엑스트라 알바.
현장에 찾아가는 동안 신났던 마음은 사라지고, 긴장되고 왠지 초대받지 못한 파티에 가는 불청객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기다림의 시간이 지나 촬영에 들어가자, 나의 작은 행동도 방해가 될까 봐 움직이지도 못하고 뻣뻣하게 굴었다. 재밌지만 지루하고, 그렇지만 색다른 경험이었다. 내가 언제 영화에 출연해 보겠는가. 그렇게 이슬기는 10년 뒤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게 되는데…
글 사진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