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42호] 계룡산 줄기에 기대어 여전히 따스한 마을

계룡산 줄기에 기대어

여전히 따스한 마을

 

대전여지도 126

대전광역시 유성구 중세동마을

     


     

 

모든 것이 완벽한 하루였다. 양지뜸에 햇살을 쏘아 대는 태양은, 움직이지 않을 기세다. 마을을 좌우로 감싼 산등성이를 넘어온 바람도 찬 기운을 품었지만 표독스럽지 않았다.
강경에서 소금 한 가마니를 짊어지고 논산 양정리를 거쳐 송정마을을 지나 세동에 들어섰다. 주막에서 하루 묵어 갈 생각이었다. 구억들 주막집에서 뜨뜻한 국밥 한 그릇 말아 먹고 잠을 청할지, 조금 더 걸어 성북동 가기 전 서낭댕이 백 선달이 지키는 주막에서 잠을 청할지 망설였다. 이곳이든 저곳이든 하루 묵은 뒤에 성북동 산징이재를 넘어 칠성댕이까지 갈 생각이다. 거기서 숨 좀 돌리고 유성이든 진잠이든 방향을 잡아 내려가면 강경부터 지고 와 어깨에 콕 박혀 버린 소금가마니는 처분할 수 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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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전에서 논산 가는 저 큰길(1호, 4호 국도)이 없을 때, 강경에서 대전 오거나, 대전에서 강경 가는 사람들이 우리 동네로 오갔지. 그래서 저 구억들에 주막이 있었어. 서낭댕이에는 백 선달이라는 사람이 하는 주막이 있었다고 하고.”
주민은 서낭댕이에 백 선달이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주막이 있었다고 전했지만, 기록에는 서낭댕이 근처가 100명의 선달이 날 명당이 있는 곳이라는 이야기도 찾아볼 수 있었다.
세동마을은 크게 세 덩어리다. 상세동, 중세동, 하세동. 상세동과 중세동은 각각 유성구 송정 1통과 송정 2통을 구성하고 하세동은 방동에 속한다. 그래도 주민은 이 세 마을을 더해 세동 한마을이라고 생각한다. 세동은 가늘 세(細) 자와 마을 동(洞) 자를 쓴다. 워낙 산이 많은 나라이니 곳곳에 골짜기 가득하지만, 세동처럼 긴 골을 만나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니다. ‘세동’이라는 마을 이름도 가늘고 긴 골짜기에 들어선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가는골, 가늠골이라는 옛 지명도 발견할 수 있다. 계룡산이 동남쪽으로 줄기를 뻗쳐 솟아오른 관암산에서 발원한 세동천이 남으로 길게 흐르고 그 좌우로 마을이 들어섰다. 계룡산 줄기가 만든 긴 골짜기에 안기듯 스민 마을이다.
양지뜸과 음지뜸, 구억들과 사봉이 자연마을로 중세동을 구성한다. 골짜기로 보면 맨 위에 양지뜸과 음지뜸이 들어섰고 그 아래로 구억들, 그리고 맨 밑이 사봉마을이다. 양지뜸에서 사봉까지 1km는 떨어졌다. 양지뜸과 음지뜸은 해가 드는 정도에 따라 마을 이름을 붙였고 구억들은 주민에게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구석’에 있어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는 대전역사박물관 기록이 신빙성 있어 보인다. 사봉마을은 모래 사(沙) 자를 쓴다. 주민은 한목소리로 마을에 모래가 하도 많이 나와 그렇게 이름이 붙었다고 설명한다. 하천 주변으로도 산으로도 온통 모래였다는 얘기다.
“지금 주민등록상으로는 중세동에 75가구 140명 정도 거주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대략 100명 남짓 살고 있어요.”
사봉마을에서 만난 이인영(72) 통장 얘기다.
 
1970년대 초반 마을 전경(사봉마을회관 액자 재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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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동 마을에 마을회관은 2곳에 있다. 양지뜸에 하나, 사봉에 하나다. 
양지뜸 마을회관 앞에 서서 세동천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시선을 두면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큰길에서 보면 여기에 마을이 있는지도 잘 몰랐지. 42번 버스가 서부터미널부터 우리 마을까지 하루에 열다섯 번 정도는 들어와. 어렸을 때 학교는 계룡시 삼군본부 들어온 곳에 있다가 자리를 옮긴 남선초등학교 아니면 두마면에 있는 두마초등학교에 다녔지.”
마을회관 앞에서 만난 민병환(81) 씨 얘기다. 민 씨는 비닐하우스에서 쑥갓을 뜯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가을에 심어서 올봄까지 계속 뜯는데, 날이 더울 때는 더 자주 뜯고 추울 때는 좀 덜 자주 뜯을 뿐, 일은 계속 있다.
중세동 들녘 대부분을 채운 건 비닐하우스다. 1970년을 전후해 농촌지도소 도움으로 시작한 상추 하우스가 지금은 쑥갓과 다른 작물로 확대되었다. 처음에 두세 집이 시작한 하우스 농사가 마을 전체로 퍼졌다. 상추와 쑥갓은 물론이고 딸기, 제주도에서나 나는 줄 알았던 레드향, 천혜향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농한기 겨울이지만 바쁘기는 매한가지다. 
양지뜸에 있는 마을회관 안은 흡사 마을잔치라도 여는 것처럼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이렇게 점심은 마을회관에 모여서 함께 먹는다. 이날은 노인회장인 정용섭(79) 씨 특별 주문으로 잡채를 만들었다. <6시 내 고향>에서 잡채 만드는 걸 보고 아침에 일찍 장을 보았다.
“아, 옛날에는 이 동네가 ‘녹두바둔머리’라고 농사를 짓기가 아주 힘들었어. 그러다 비닐하우스 재배하면서 살림이 폈지. 몸은 좀 고단해도.”
중세동 음지뜸에서 태어나 지금은 양지뜸에 사는 민병환(81) 씨는 처음 비닐하우스 농사를 지었던 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지금이야 비닐하우스 자재가 좋아졌지만, 옛날에는 대나무로 대를 세워서 만들었어. 새끼줄로 묶고. 지금처럼 폭이 넓은 비닐이 나오는 것도 아니어서 좁은 비닐을 붙여서 사용했지. 촛불로 비닐을 녹여 붙이거나 인두, 다리미로 지져서 붙였어. 그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 그러다가 폭넓은 비닐이 나와서 그걸로 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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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채 무치는 고소한 향이 회관 안을 가득 채우는 동안 남자 주민들은 방 한구석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냥 조용한 마을이었지. 한국전쟁 났을 때, 지금 버스 다니는 길로 인민군들이 오르락내리락했는데도 별 탈도 없었고.” 회관에 모여 있는 할아버지들은 대부분 80세 전후로 엇비슷한 나이대였다. 어린 시절부터 마을에서 깨벗고 함께 놀았던 사이라 그런지 이런저런 얘기에 연신 웃음꽃이 핀다.
“저 위에 한단골이라고 있는데, 전의 이씨 중에 군령 대장을 한 할아버지가 있었나 봐. 거기에 그분 묘를 썼는데, 자손들이 그곳에 와서 한탄을 해서 한단골이라지. 그 한단골에 수렁이 있는데, 소도 빠져 죽었지.”
여기저기에서 단편적인 마을 이야기가 쏟아져나오더니 급기야. “아, 저 양반이 그럼 호랑이도 잡았는데…”
이런저런 마을 이야기를 해 주는 끝에 호랑이를 잡았다는 이야기가 툭 튀어나온다. 아무리 마을이 계룡산 깊은 골짜기 안에 있어도 그렇지 50년 전에 호랑이라니.
“내가 처가가 기성면 우명동이야. 22살 먹었을 때, 처가에 있던 아내를 보려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는데, 안개가 꽉 쩔었었지. 근데 갑자기 뭐가 ‘쉭~’ 하니 달려들더라고. 내가 그때 기다란 우산을 들고 있었는데, 엉겁결에 그걸 들어서 내질렀는데, 호랑이 아구리에 푹 들어갔어. 그래서 주변에 칡넝쿨을 모아가지고 묶어서 등에 지고 30리 길을 걸어서 처가에 가지고 갔다니까. 그때 사람들이 약 해 먹는다고 뼉따구도 다 토막 내서 가져가고 그랬지.”
50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그때 그 짐승이 호랑이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지금도 논란인 모양이다. 얘기 끝에 ‘호랑이 종류…’라고 말끝을 흐렸지만 정용섭 할아버지 기억 속에는 틀림없이 호랑이인 모양이다.
“내가 저 집 아지매한테 물어봤는데, 그때 그 짐승을 짊어지고 걸어서 우명동에 온 건 맞더라고. 아주 장사여~.”
호랑이 논란을 잠재운 건 마침 다 된 잡채였다. 남자 몇이 벌떡 일어나 상을 펴고 상차림을 돕는다. 쏟아지는 햇살만큼이나 인심도 좋은 포근한 마을이다. 잡채 한 그릇에 마음까지 든든하게 불러와 점심을 들고 가라는데 사양하고 마을회관을 나섰다.
 
세동 2통 경로당에 모여 잡채를 나누는 마을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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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억들 앞에 서서 주막이었던 집을 가늠해 보고 산모퉁이를 돌며 사봉마을로 향했다. 눈대중으로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멀다. 참 길고 긴 골짜기다. 비닐하우스가 끝없이 이어지고 중간중간 개가 지키고서 낯선 이의 침입에 잔뜩 경계한다. 마을 안 개는 그악스럽게 짖지 않았는데, 비닐하우스를 지키는 개는 요란스럽다. 기분 탓일 수도 있다.
사봉마을 마을회관에 들어서니 그곳에서도 주민이 모여 식사를 함께한다.
“아, 오늘은 그래도 적은 편이여. 밖에 일보러 나간 사람이 많아서. 저녁도 같이 먹는데, 저녁에는 자리가 없어서 바닥에 앉아 먹어야 할 때도 있어.”
자리에 앉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밥 한 그릇과 시원한 콩나물국을 담아 수저와 함께 놓아 준다.
“지금이야 집집마다 한둘, 많아야 세 명 정도 살지만 예전에는 예닐곱이 기본이었지. 가구 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슷한데 인구는 많이 줄었어. 많을 때는 한 500명도 넘게 살았으니까. 이 건물 2층에는 공부방도 있었고 마을에 신협도 있었어. 아직도 장학회가 있어. 장학금 줄 애들이 없어서 탈이지만.”
정말 큰 마을이었다. 신협을 운영하고 마을 장학회까지 있을 정도였다. 지금도 들어와 2년만 살면 마을 동민으로 인정해 마을 장학금을 받을 자격이 생긴다며 이사 올 생각 있으면 오라고 권한다.
“아니여, 우리 마을이 그나마 전통을 지키고 화목하게 사는 게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이 많지 않아서 그런 거여. 함부로 얘기할 게 아니여.”
생각이 다른 주민도 있는 모양이다. 반백 년을 훌쩍 넘게 함께 울고 웃고 살아온 정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이 간다.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이 전원주택지로 팔리며 도시 근교 마을 공동체가 무너지는 걸 심심찮게 보았던 터라 이해 못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밥 한 그릇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골바람이 전혀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냥 빙글빙글 기분 좋은 웃음이 난다.
사봉 마을회관을 나서자 바로 200년을 훌쩍 넘긴 둥구나무를 만날 수 있었다. 느티나무다. 그곳에서 세동천을 건너 다시 양지뜸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동네 한 바퀴 걷는 길이 썩 괜찮다. 야생화라도 피는 계절이라면 더욱 좋겠다.
음지뜸 앞을 지나 다시 양지뜸 마을회관 앞에 도착했을 때 햇살은 여전히 한가득 마을에 쏟아지고 있었다.
 

글 사진 이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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