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41호] 단 한 번, 그리고 웃음

단 한 번,

그리고 웃음

 

로와의 책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언제 어느 때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들 아무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아직 안 받았던가?” 하며 독자들 머리를 갸우뚱하게 할 작가. 수상 발표될 때 꼭 함께 거론될 대표작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이 책은 첫 장부터 니체의 영겁회귀나 파르메니데스의 가벼움과 무거움이 거론되면서 만만치 않다는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오히려 책장을 넘길수록 책은 쉬워지는데, 로맨스물이라도 되는 듯 두 쌍의 남녀가 축을 이룬다. 개도 한 마리 등장하고. 극도의 가벼움을 추구하는 토마시와 사비나, 그리고 무거움을 추구하는 테레자는 작품 내내 대조되고, 남녀 동수로 짝을 맞추느라 투입된 듯한 프란츠도 주요 캐릭터다.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 난잡한 수컷 생활이 몸에 밴 의사 토마시. 어느 날 그는 문득 “강보에 싸인 아기”라는 얼토당토않은 메타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안나 카레니나》를 안고 찾아온 테레자에게 구속되어 버린다. 안나 카레니나가 누구던가. 일편단심 낭만적 사랑과 극단적 행동파의 상징 아니던가. ‘안나가 되고 싶어’라는 테레자의 무언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순간부터 토마시는 결코 예전처럼 살 수 없었다. 그녀 덕분에 무거워져서인지 그때부터 토마시 인생은 끊임없는 추락이다. 의사도 포기하고, 도시도 떠난다. 마치 발목에 추를 달고 깊은 강물 속으로 익사해 가듯. 그렇다 해서 그와 끝까지 함께했던 테레자는 행복했는가 하면 그조차도 아니다. 결코 그녀 하나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여전히 수많은 여자들과 섹스하는 토마시. 매일 같은 침대에서 자고 결혼까지 했는데도, 아니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테레자는 끊임없이 불안하고 불만이며 소용도 없는 감시를 하느라 안달이다. 그깟 섹스가 뭐라고. 
아니다. 섹스는 뭐긴 뭐다. 결혼이라는 것은 이런저런 미사여구를 지우고 보면 결국 독점적 섹스 상대자를 국가에 등록하는 제도다. 토마시는 지키지 못할 약속인 결혼 따위 하지 말았어야 했고, 테레자는 그깟 서류 조각 한 장으로 토마시를 제어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접었어야 했다. 호색은 치료 가능한 질병이 아니고 습관은 고치기 어려운 법. 침대에 들어오기 전에 다른 여자 냄새는 깨끗이 없애라는 예의범절을 토마시에게 가르칠 일이지, 오히려 스스로 피험자가 되어 다른 남자와 시험적 섹스까지 해 보는 테레자. 그녀는 자동차 사고로 토마시와 함께 세상을 떠날 때쯤에야 비로소 무게를 강요했던 삶을 약간 후회한다. “하느님 맙소사,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확신을 갖기 위해 정말 여기까지 와야만 했을까!” 섹스가 뭐라고, 혹은 결혼이 뭐라고, 그녀는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다. 함께하는 시간 그 자체를 충분히 즐길 수 있었는데도. “그들은 서로 사랑했는데도 상대방에게 하나의 지옥을 선사했다.” 
반면 “배반의 나팔소리”가 들리기가 무섭게 발바닥 먼지까지 깔끔히 털어버리고 떠나던 사비나. 헬륨 든 풍선마냥 절대로 안주하지 못하던 그녀도 충분히 나이든 이후에는 철저하게 혼자이며 결국 자신이 추구한 궁극은 공허일 뿐임에 허무해 한다. 인간이란 각자의 사전에 적힌 단어의 의미 공유나 소통이라는 게 애초에 불가하다는 예제를 보여주느라 등장한 프란츠는 어느샌가 작품에서 조용히 사라진다. 소설의 모든 등장인물은 행복하지 못하고, 독자가 짓는 웃음은 쓴웃음이다. 소설을 통틀어 행복한 캐릭터는 오직 카레닌, 테레자의 개뿐이다. 
하긴 무한한 우주에 비하면 한낱 부스러기에 불과한 지구, 그 지구 위에 발붙인 하찮은 생명체들이, 우주의 나이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한 인생 동안 겪는, 사소하디 사소한 일들. 그게 다 뭐라고. 이런들 어쩌고 저런들 어쩌리. 삶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모두 희극이라는 명언을 남긴 희극인도 있지 않던가.

 

쿤데라는 태어난 이후로 민주주의 체제이지 않았던 체코를 46세인 1975년에 떠났다. 조국과 모국어를 함께 떠나 버리며 새 거주지 프랑스에서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야 했던 작가. 1982년에 모국어로 쓴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Nesnesitelná lehkost bytí》조차도 2년 후에 프랑스어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으로 먼저 출간되고, 체코어로는 오히려 다음 해에 출판된 이력을 가진 작가. 그는 남겨짐과 무거움보다는 떠남과 가벼움을 칭송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한편 체코에서 모국어로 비밀출판을 지속한 작가도 있다. 쿤데라보다 15세 연상인 보후밀 흐라발(Bohumil Hrabal)은 조국을 떠나기에는 너무도 무거운 삶을 살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체코에 남아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모국어로 밀도 높은 소설들을 남겼다. 그의 대표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 Příliš hlučná samota》은 내게 흐라발의 살과 피를 갈아 넣은 진액을 잉크 삼아 써진 듯 읽혔다. 

  

삶은 살아 내는 실존의 의지와 무관하게 시작되었고, 삶의 실제 주인은 목적도 방향도 없는 우연이며, 그런 삶조차도 단 한 번, 오직 한 번이 전부라는 가혹한 진실. 리허설도 미리 보기도 없이 가차 없이 내던져진 삶에서 언뜻 선택처럼 보이는 행동들도 곰곰이 따지고 보면 우연의 겹침과 접힘일 뿐이고, 《농담 La Plaisanterie》에서처럼 사소했던 에피소드가 어느 날 갑자기 인생 최대의 무게 있는 선택으로 자라나 호되게 뒤통수를 치는 날들도 있으니, 이러한 삶의 외줄타기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헛웃음을 짓는 정도가 아닐까? 
쿤데라가 토마시 입을 빌어 말하는 ‘한번은 아무것도 아니다 Einmal ist keinmal’라는 주장은 어쩌면 ‘한번이 전부다 Einmal ist alles’라는, 삶의 가혹한 진실을 애써 부정하려는 시도인지도 모른다. 한없이 가벼워지고 싶대도 중력에 속박된 지구인으로 살아가는 한 우리는 무게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럴 수밖에 없고 “그래야만 한다 Es muss sein.” 
떨쳐낼 수 없는 무거움을 덜어 주는 것은 아마도 웃음이리라.

 


글 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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