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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41호]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부여를 디비다
어릴 적 할머니가 살았던 충남 부여군은 명절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가는 곳이었다. 지금은 어느 마을인지 정확하게 기억조차 할 수 없지만, 부여하면 아랫목이 굉장히 따뜻하고, 화장실이 집 밖에 있어 무서웠던 시골집이 먼저 떠오른다. 언제 다시 가보기는 할까 싶었던 부여를 공정여행을 위해 찾았다. 총 두 차례에 걸쳐 부여에 내려갔다. 수없이 많이 다녀왔지만,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부여를 공정여행을 통해 알아 가는 시간이었다.
마을 사람에게서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부여는 사비(泗沘)라고 불렀다. 약 2,500년 전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송국리 문화가 개화한 곳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부여에는 문화자원이 풍부하다. 시간 흐름에 따라 많이 변하기도 했지만, 고유의 문화를 잘 간직한 지역이다.
첫 번째 공정여행의 주제는 ‘단군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부여군 장암면은 부여군 동부에 위치한 면이다. 북고리부터 상황리, 석동리, 원문리, 장하리, 점상리, 정암리, 지토리, 하황리, 합곡리까지 총 10개의 리가 장암면에 속한다.
“장암면은 문화와 관광의 도시입니다. 오늘 주제가 ‘단군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장암면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특히 60대 전후반 분들은 추억을 담을 수 있는 여행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날 여행 인솔자인 방하설 씨를 따라 부여 읍내를 벗어났다. 이번 여행의 최대 포인트는 장하리다. 부여군 장암면 장하리는 고려 때 진주 강씨들이 정착해 조선시대 초기에 집성촌을 형성했다고 한다. 이후 풍양 조씨가 정착했다.
“장하리는 6명의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동네입니다. 한 마을에서 여섯 명의 독립운동가가 나왔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기 보이는 팽나무가 굉장히 사연이 있는 나무인데요. 크고 좋은 나무였는데, 옛날 일제 순사들이 우리 동네 사람들이 나무 아래에서 역적모의를 한다고 찾아와서 장하리 청년들에게 강제로 나무를 쓰러뜨리게 했습니다. 그후에 다시 나무를 심은 것이 저렇게 자란 것이고요.”
강현면 이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듣다 보니, 어느새 장하리 삼층석탑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고즈넉하고 조용한 마을에 우뚝 서 있는 장하리 삼층석탑을 보자마자 “와 예쁘다”라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주변 풍경과 어우러진 석탑은 보는 이에게 색다른 느낌을 전달한다.
장하리 삼층석탑은 고려 때 세워진 대표적인 백제계 석탑이다. 이 석탑의 가까운 위치에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있고, 그 형식을 충실하게 모방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석탑의 조성 연대는 고려 중기로 추측한다.
단군을 만나기 위해 천진전으로 향했다. 부여군 향토유적 제43호로 지정한 천진전은 지금도 매년 개천절에 천제를 봉행한다. 단군영정은 청산리 전투의 승전 주역인 북로군정서 고문 강석기 선생이 고향으로 가져온 것을 아들이 물려받았다. 이 영정을 비밀리에 보관하던 중 광복 이후 천진전을 건립해 봉안하고 이때부터 개천절마다 천제를 올렸다. 현재 원본은 정림사지 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라고 한다.
원본은 아니었지만, 처음 만나는 단군영정을 한참 바라봤다. 잠시 함께 묵념의 시간을 가진 뒤 천진전을 나섰다. 오전 내내 흐렸던 하늘이 맑게 갰다.
천진전에서 처음 만나는 단군영정을 한참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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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소산성은 부여읍 쌍북리에 있는 백제시대 산성이다. 538년 백제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23년 동안 백제의 도읍지였다. 과거 사비성이라고 불린 이곳의 둘레는 2,200m, 지정 면적 98만 3,900㎡이다. 부소산성은 유사시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했지만,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해 왕과 귀족들이 즐기는 비원 구실을 했던 것으로 추측한다.
부여의 두 번째 공정여행의 주제는 ‘윤학상 선생과 함께하는 서체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은 방영종 씨와 서예가 윤학상 선생이 진행자로 나섰다.
“유적은 현판과 비석이 있습니다. 저도 그동안 유적을 무심하게 봤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 왜 세워졌는지, 저런 현판이 왜 있는지, 현판은 왜 저런 서체로 썼는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오늘 여행을 통해서 현판과 비석을 만날 것입니다. 서체의 종류를 먼저 이해해 주셔야 합니다. 서체에는 고문,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가 있습니다. 전문적인 용어라 어렵게 느껴지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공부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문화, 역사가 함께한 이번 여행을 위해 부소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윤학상 선생과 함께 현판과 서체를 살펴봤다. 그동안 주의 깊게 지켜보지 않았기 때문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아름다움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해서는 똑바른 글씨입니다. 행서는 다닐 행(行)자를 씁니다. 움직임이 있는 글씨를 의미합니다. 사람으로 치면 걸어 다니는 것에 비교하면 됩니다. 운동감이 있고 율동감이 있죠. 사비문을 보면 정자가 아닌 행서로 쓰였습니다. 율동감이 있는 서체죠. 지금 현판에 낙관이 없어서, 누가 썼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부소산성부터 사비문, 삼충사, 영일루, 반월루 등을 돌아봤다. 각각의 현판마다 서체가 다르고, 현판의 서체에 따라 주는 분위기가 다르다. 어떤 느낌의 서체이냐에 따라 공간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진다.
“삼충사(三忠祠)는 성충, 홍수, 계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57년에 세운 사당이죠. 현판의 글씨는 일중 김충현 선생이 쓴 것입니다. 삼충사 글씨는 좀 더 침착하고 정중하게 쓴 서체입니다. 앞의 삼(三)자를 보면, 일반적인 삼자와 다르게 위에 두 개가 붙고 아랫부분은 떨어져 있죠. 저는 이렇게 쓴 것이 더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씨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은 똑바르게, 똑같이 쓰는 것입니다. 아래 획을 띄어줌으로 공간이 시원한 느낌을 받습니다.”
서예가 예술이 될 수 있는 이유였다.
부여 출신 서예가로 원곡체를 개발한 원곡 김기승 선생의 서체도 만났다. 원곡 김기승 선생은 한국 서예계를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 영일루(迎日樓) 현판을 썼다. 영일루는 ‘영’과 ‘루’에 비해 ‘일’은 작게 썼다. 서체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흘리듯 쓴 서체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부소산을 지나 백마강에서 나룻배를 타고 부여를 돌아봤다. 잔잔하게 흐르는 백마강에서 부여를 바라본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글 사진 이지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