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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2호]따뜻하게 말을 건넨다
따뜻하게
말을 건넨다
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
충남 서천군 판교면 현암리 판교마을은 과거 판교면에서도 가장 사람이 많았던 마을이다. 판교면은 본래 비인군 동면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서천군 동면이 되었고, 1942년 판교면으로 개칭했다. 1942년 당시, ‘해 뜨는 마을’이라는 뜻의 ‘동면’을 일본인들이 판교면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현암리는 한때 서천군에서 가장 큰 장이었다는 판교 오일장과 우시장, 모시전이 열렸다. 장이 열리는 날이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는 마을이었다. 판교 우시장은 1980년대 중반까지 충청남도 3대 우시장으로 불릴 정도로 번성했다. 30년 전 우시장이 자리를 옮기고, 시대가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사람도 빠져나갔다. 그때의 활기를 지금은 찾을 수 없지만, 마을의 모습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시간이 멈춘 마을’이라고 부른다.
일본인이 살았던 이 가옥은 해방 이후 장이 열리기 전, 숙소 역활을 했고 뒤에 '장미사진관'으로 사용되었다.
1.
판교면사무소를 지나 판교마을로 향했다. 마을은 여느 시골 마을처럼 한적하다. 마을에 들어서면 보이는 판교 노인건강교실 앞에는 노인 전동차가 가지런히 주차되어 있고, 신나는 음악 소리가 흘러나온다. 건강교실 앞에 붙은 현수막을 보니, 이날은 실버로빅을 진행하는 날이다.
신명 나는 음악을 뒤로하고 마을로 들어섰다. 어떤 용도로 사용했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건물이 보인다. 세월을 머금은 건물은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채 굳게 문이 닫혀 있다. 마을에서 진흥농기계를 운영하는 박 사장은 그 건물이 도토리묵 공장이었다고 이야기한다. 한때 재래식으로 도토리묵을 만들었던 공장은 사람과 기계가 빠져나가고 건물만 덩그러니 남았다.
“여기 우리 농기계 수리점이 있는 자리가 원래 우시장 자리였지. 우시장 없어지고 나서부터 여기서 농기계를 했어. 83년도엔가 우시장을 큰 데로 옮겼는데, 거기도 잘 안 됐지. 자동차가 많이 생기니까 시장이 잘 안 되는 거야. 여기 우시장 살리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잘 안 되더라고. 옮긴 우시장은 10년 이쪽저쪽하고 말았겄네. 90년도까지인가 했을 거야. 인구는 줄은 정도가 아니지. 예전에는 인구가 1만 4천인가 5천인가까지 갔을 거야. 지금은 2천 명이나 되나 모르겠네.”
지금 진흥농기계가 있는 자리는 우시장이 열리는 자리였다. 7월, 8월에는 약 1천여 마리의 소가 묶여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판교 우시장 주변으로는 주막을 겸한 국밥집이 즐비했고, 사람도 많았다.
진흥농기계 박 사장은 판교마을이 고향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아버지를 따라 농기계를 만졌다. 진흥농기계는 마을의 사랑방 같은 곳이다. 대부분 마을 주민이 농사를 짓다 보니 자연스레 사랑방이 되었다. 가게 안에 둘러앉아 술 한 잔 기울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최근 이곳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 한 TV 프로그램에 마을이 소개된 이후 꾸준하게 사람들이 마을을 찾는다. 저마다 어깨에 카메라를 하나씩 메고, 마을을 돌며 셔터를 누르기 바쁘단다. 마을이 알려진 이후에 TV 프로그램 촬영도 늘었다. 얼마 전에는 영화 촬영도 있었다.
“여기 줄 서서 찍고 그래. 정미소고 양조장이고 사진 찍을 데가 많지. 좀 뭐 한 사람들은 별로 안 좋아하지. 내내 못사는 거 찍는 걸 뭘 좋아해. 잘 사는 걸 찍어야지. 엊그제도 TV에 나왔다던데?”
동일주조장은 2000년에 문을 닫았다
2.
진흥농기계 맞은편에는 동일주조장이 있다. 동일주조장은 주로 밀가루로 막걸리를 만들어 판교지역에 공급하던 양조장으로 박호성 씨가 3대째 운영하다가 2000년에 문을 닫았다. 마을의 상징적인 공간마다 친절하게 안내판이 놓여 있다. 짧은 글로나마 마을에 담긴 이야기를 만난다.
판교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었지만, 마을은 그저 한산하다. 마을을 오가는 어르신들은 낯선 외지인의 방문이 익숙한 듯 걸음을 옮긴다.
“아이고 뭐 하러 왔데? 식사들은 하셨어? 밥 먹어야 하는디.”
노인 전동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하던 마을 할머니는 낯선 외지인에게 거리낌 없이 친절하게 말을 건넨다. 따듯하다.
거리에는 오래된 건물과 새로 지은 건물이 뒤섞였다.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건물은 속이 텅 비었고, 나무판자만 남았다. 다 벗겨진 페인트와 오래된 간판, 금방이고 떨어져 나갈 것 같은 지붕만이 공간이 존재했음을 알린다.
여전히 운영하는 가게도 더러 있다. 미용실에는 머리하는 아주머니도 보이고, 시계방에는 깨끗하게 소파와 테이블이 놓였다. 시계방과 정미소, 전파사, 미용실까지 오래된 상가들은 이곳이 얼마나 번성했던 곳인지를 짐작하게 만든다. 전파사는 이곳에서 40년을 넘게 운영했다. 영업을 안 한 지는 10년이 넘었다.
“아휴 나는 여기 시집온 거예요. 옛날엔 여기 오일장이 컸지. 그런데 지금은 다 서천으로 가요. 서천군이 다 그리로 모이니까. 아휴. 나는 지금 자식들이 서울 오라고 해도 안 가. 서울 왔다 갔다만 하는 거지. 여기가 좋아.”
전파사 외관 사진을 한 장 찍고 가겠다는 이야기에 “여기를 왜 찍어. 뭐 볼 게 있다고. 저기 맞은편 정미소를 찍어야지. 저긴 아주 문화재야”라고 전파사 주인은 이야기한다.
시간이 묵은 나무 간판에는 ‘삼화정미소’라고 써 놨다. 그 아래 함께 써 놓은 ‘전화번호 52번’에 눈길이 간다. 우연히 길을 가다 마주친 택시기사 아저씨는 “70년대만 해도 전화번호가 두 자리였죠. 50번까지는 백색 전화라고 해서 비싸고, 넘으면 청색 전화라고 해서 싸고”라고 이야기해 주고 떠났다. 급하게 자리를 떠난 아저씨는 알고 보니 지금은 문을 닫은 삼화정미소 주인 아들이었다.
정미소에서 모퉁이를 돌아 판교극장을 찾아갔다. 이전에 양조장, 정미소 등이 있던 길과 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진다. 길 한 모퉁이만 돌았을 뿐인데 새삼 달라지는 분위기가 재미있다.
판교극장은 옛 공관이라고 불렸다. 새마을 운동 당시 설립된 극장은 영화 상영은 물론이고 다양한 쇼 프로그램이 열렸다. 영화관 입구에는 ‘쌍절곤’, ‘기공맛사지’, ‘차력’, ‘낙법’ 등이 쓰여 있다. 1970년대 이후 체육관으로도 사용했다. 웃음소리가 가득했을 이곳은 외관만 남아 있을 뿐 현재 문이 굳게 잠겼다. 창문 틈 사이로 본 내부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하다. 여전히 사용 중이다.
판교극장 전경
3.
옛 판교역이 있던 자리는 현재 판교특화음식촌이 들어섰다. 판교역이 장항선 직선화 공사로 2008년 11월 27일 이전하면서 지역 공동화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2012년 문을 열었다.
장항선 판교역은 일제 강점기에 징용, 징병, 식량 약탈 등을 위해 1930년대 개통했다. 서천군 동면 판교리의 판교장 이름을 따서 판교역이라 이름 붙였다. 해방 이후에는 도시로 가는 길목이었던 옛 판교역은 이제 추억으로 남았다. 1930년대 심었다는 판교특화음식촌 앞 소나무만이 올곧게 서 있다.
일제 강점기의 흔적은 장미사진관에도 남아 있다. 장미사진관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살았던 집이다. 장미사진관으로 사용한 것은 해방 이후다. 일제 강점기 당시 판교면에는 일본인이 농토와 상권을 장악했다. 장미사진관 안내문에 따르면 ‘1930년 당시 ‘동면’에서는 일본 사람 스스로 ‘본토인’이라고 말하고, 우리 민족은 ‘조선인’이라 칭하며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다’라고 적혀 있다. 당시 이야기를 알고 있거나 전해 들은 사람은 만날 수 없었다. 오래된 건물 앞 안내문만이 과거를 이야기해 준다.
서천군은 오는 2022년까지 51억 8천여만 원을 들여 ‘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 조성사업’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현암리 이외에도 명품관광 도시를 조성하기 위해 지역 주요 관광지의 대규모 재개발과 다각적인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판교 시간이 멈춘 마을 조성사업은 판교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재조명하고, 재창조함으로써 새로운 관광명소를 개발하기 위함이다. 판교지역 내 창작체험공간을 비롯해 어울림 공간 등을 조성하고, 마을 스토리텔링과 홍보를 진행할 예정이다. 이 사업이 시간이 멈춘 마을과 주민들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아직 가늠하기 어렵다.
글 이지선
사진 이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