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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39호] 빈들답게 빈 채로
빈들답게
빈 채로
만유인력 책방 이야기
오랜만에 돌아온(!) 책방지기 김연희의 책방 일지입니다. 지난번에 초여름 기록까지 소개했는데요. 그때부터 급격히 기록 빈도가 줄었네요.(;) 어쨌거나, 지난여름부터 가을 무렵까지 책방 이야기 시작합니다~
2017. 8. 24(목)
로운이 치과 치료를 마치고 돌아와 책방 간이침대에서 뒹굴뒹굴하다가, 문득 든 생각.
‘지난 주 예배시간에 생각한 무인책방을 실험해 보자!’
다소 떨리는 손으로 ‘무인책방’이라고 썼다.
아래에는 동네 사람들을 위해 연 것이니까 누구든 와서 주인처럼 사용하고 물건을 사고 싶으면 탁자 위 흰 통에 넣으세요, 어쩌고저쩌고 쓴 다음에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다.
에어컨도 켜놓고 불도 켜놓고.
속마음은 몇 번씩 뒤돌아보고 싶었지만 망설임을 속으로 단칼에 자르며 걸어갔고 우리는 책방과 멀어졌다.
무인책방 첫날의 결과는?
대성공. ^-^
나갔다가 택시를 타고 돌아와 보니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이 같이 와서 무언가를 사 가고 4만 5천 원을 통에 놓고 갔다. 잃어버린 것도 없고 무사했다.
8. 25(금)
어제 일 덕분에 한받은 맘이 놓였는지 오늘 아침부턴 맘 놓고 자유로이 자리를 비우시며 무인책방을 운영 중이시다.
이것은 우리에게 참 큰 의미를 지닌다. 이번 달 초에 문을 열고 얼마 되지 않은 기간이지만 가게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이 길에 책방이라는 것이 생긴 지가 워낙에 오래되었고 모습이나 느낌이 동네에 많이 튀어서인지 사람들은 쳐다보기만 할 뿐 들어오려고 하질 않았다.
그러던 중, 예배 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예 우리가 없어 보면 어떨까. 우리도 돌아다닐 여유를 되찾고, 어차피 사람들 돈으로 차린 거니까 사람들이 함께 쓰는 곳으로 열자.’
우리는 이곳을 ‘빈들’이라고 생각한다. 비어 있는 들이지만 사랑이 일을 하는 곳. 사랑으로 서로 치유되고 채워지는 곳. 그런 곳이니까 빈들답게 빈 채로.
아무튼, 그렇게 어제부터 무인책방 가동되었고, 오늘부터는 ‘금요일 24시간제’를 시도한다. (이건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그나저나 어제 그 손님들이 뭘 샀는지부터 재고를 살펴야 한다. 오늘부턴 돈을 넣는 통 옆에 구매목록을 쓰는 수첩도 두어야겠다.
열과 콧물, 치통, 편두통의 나날. 아픈 데다 애 둘을 혼자 보아야 하는 상황이라서 문을 일찍 닫기로 했다.
9. 5(화)
기도 중에 책에 대한 고민을 풀었다. 나를 찾아오는 책을 맞이하라는 말씀. 그런데 그 책의 형상은 때 묻은 어린아이였다. 그 아이는 낡은 베레모를 쓰고 해어진 신발을 신고 온몸에 때가 묻어 있었다. 그런데 군데군데 드러난 그 살결은 몹시 보드라웠고 눈빛이 초롱초롱했으며 숨결이 향기로웠다.
이제 그 책을 맞이하려는 준비만 하면 된다.
저절로 걸어 들어오는 책 손님을 기다리겠다. : - )
글 김연희(시인 · 만유인력 책방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