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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39호] '평풍굴' 오랜 터에서 긴 세월 살아온 시간
'평풍굴'
오랜 터에서
긴 세월 살아온 시간
대전여지도 123 외전
공주시 정안면 월산리
604번 지방도를 타고 공주시 정안면으로 들어서면 정안천이 흐르는 들판을 만난다. 누렇게 익은 들판이 맑고 찬 공기 속에서 더 밝은 빛을 띤다. 가을볕이 유난히 투명하다. 이리저리 둘러봐도 환한 가을 자리다. 공주 안쪽에 들어선 골이 깊은 자연마을을 만나기에 더없이 좋은 날에 길을 나선 셈이다.
공주에서도 한참 북쪽에 자리한 산지에 둘러싸인 정안면은 조선시대에 공주목 광정면으로 불렀고, 1914년 정안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정안면을 가로지르는 604번 지방도를 타고 가다 보면 소랭이활성화센터를 만날 수 있다. 폐교였던 월산초등학교를 소랭이마을 주민들이 힘을 합치고, 지원을 받아 다양한 농촌 체험과 교류가 가능한 공간으로 꾸몄다. 1949년 9월 30일 월산국민학교로 승격되고, 2008년 정안초등학교와 통합되기 전까지 오랜 시간 동안 이 공간에서 마을의 아이들이 성장했다. 그 시간을 이어 많은 사람이 이곳을 방문해 센터가 자리한 월산리를 비롯한 소랭이 일대의 마을들을 만나고 간다.
예부터 내려오는 이름 ‘소랭이’
법정명으로 ‘소랭이’라는 마을 이름은 없다. 광정서부터 산성까지, 이 전체를 소랭이라고 이른다. 쇠가 나는 곳이라 하여 금란(金蘭)골이라 하던 것을 편히 부르다 보니 ‘소랭이’가 되었다고 하는데, 아주 오랜 옛날부터 소랭이라는 이름이 내려온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광정이라 불리는 정안면소재지쯤부터 위쪽 산성리까지 전체를 통틀어 소랭이라 불러 왔는데 이를 잘 모르고 ‘소랭이가 어디여?’ 하는 이들도 많은가 보다.
여튼 소랭이, 혹은 소랭이마을은 마곡사 방향의 산성리부터, 내문리, 문천리, 월산리, 대산리를 포함한다.
소랭이활성화센터에서 정안천을 건너면 너른 들판이 이어진다. 운중반월형(雲中半月形)의 명당(明堂)이라 ‘월산’이 되었다는 말대로 산에 둘러싸이고 물길이 흐르는 평평한 농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다. 호젓한 시골길을 따라 가을볕을 즐기며 걷다 보면 누런 들판 한가운데 우뚝 선 느티나무 고목이 눈에 띈다. 수령이 350년이 넘은 나무이다. 느티나무 아래 짙은 나무 그늘 저쪽에는 노랗게 익은 벼가 가을볕에 부시다. 월산리에는 이 느티나무 말고도, 마을을 흐르는 개울인 월산천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만날 수 있는 110년 된 밤나무가 있다. 1958년부터 밤나무혹벌이 발생해 재래종 밤나무가 전멸하다시피 하는 가운데서 살아남아 한동안 마을에 유일한 밤 공급원이 되었다고 한다.
350년 넘은 느티나무
작은 개울이 흐르는 마을은 한갓지다. 월산1리마을회관 문을 열어도 아무도 없다. 논에서 벼를 베는 분에게 다가가 이것저것 묻는다.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하여, 이 동네를 병풍골이라고 한다는 이야기는 여럿에게서 들었다. 주민들 말을 그대로 빌자면 ‘평풍굴’이다. 그렇게 몇 가지를 물어보고 얘기 들려줄 이를 찾다보니 흙담 너머로 토란을 캐고 있는 두 어르신이 보였다. 담 안쪽에 깻단이 누워 있다. 잎이 파릇한 게 베어 낸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다. 대추나무도 보이고, 야트막한 토담 너머로 보이는 작은 정원 같은 텃밭에 안주인, 바깥주인이 마주 앉아 토란을 캐고 있는 모양이 다정스럽다. 말을 거니 대문으로 들어오라 한다. 예스런 나무문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서니 2층 집이 보인다. 정갈한 정원 한쪽 옛집이 남아 있는 곳에 가마솥을 걸어 놓은 부뚜막도 있다. 그리고 흙담에는 삽이며 쟁기 같은 농기구가 가지런히 걸렸다. 그 옆에 텃밭으로 이어지는 문이 보인다.
토담 안에 텃밭. 정돈희 씨와 송영순 씨는 토란을 캐는 중이다
단오날 그네 걸었던 느티나무
“여기 행랑이 두 채 있었어.”
지금은 텃밭으로 쓰는 이곳에 행랑이 있었단다. 정돈희 씨는 1932년에 태어나 줄곧 이 마을에서 살았다. 선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200년이다. 그는 진주 정씨인데, 진주 정씨가 이 마을에만 20호 이상 살았다. 아내 송영순 씨는 안소랭이에서 시집왔다.
정돈희 씨로부터 소랭이가 광정서부터 산성까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랭이라고 하면, 소랭이가 어디여 해. 동네 이름은 다 따로지.”
정돈희 씨는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해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했다. 소랭이센터가 자리한 월산초등학교에서도 11년간 근무했다. 그는 월산천이 이전에는 송천이라 불렸다고 말한다.
“여기가 소나무 밭이었어. 지금은 없애고 논을 만들었지.”
예전에는 공주가 아닌 광정 장을 다녔다. 광정 장이 커서 소전도 있고 없는 게 없었다. 장날이면 천안에서 이쪽으로 넘어오기도 했다. 올해 87세. 그 시간이 하도 아득해 옛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물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해방이 되었지. 그때 사람들이 광정에 가서 만세를 불렀어. 나는 어려서 못 갔고. 육이오 때는 중학생이었어. 피난 안 가고 집에 숨어 있었어. 인민군 장교가 들어와서 우리 집 사랑방에 있으면서 우리한테 낮에는 산에 가서 숨어 있고, 밤에만 내려와 자라고 했어. 인민군들 밥해 주며 살았어.”
그래도 그 인민군 장교가 인명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인민군이 다녀갔지만 이 마을에서 사람이 죽는 일은 없었단다. 그 모진 세월을 다 조용히 넘어갔단다. 그러니, 이곳이 명당은 명당인 모양이다.
“옛날에 단오가 되면, 느티나무에 그네를 매고 남자는 낮에, 여자는 밤에 그네를 탔지.”
마을 중앙에서 만났던 그 느티나무 고목에 그네를 매고 남자들도, 여자들도 발을 구르며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남자들도 그네를 탄다는 건 잘 몰랐다. 청년들은 힘차게 발을 구르며 제 힘을 자랑했을 것이다. 평풍굴 오랜 터에서 긴 세월 살아온 시간을 그 느티나무가 증명해 주는 듯했다.
푸른색 페인트를 칠한 나무 문을 지나면 토담이 둘러진 텃밭이 나온다
정돈희 씨 어머님은 92세까지 살았다. 해주 오씨였던 어머님은 공주 유구에서 이곳으로 시집을 왔다. 아버지가 선비 노릇 하는 동안 어머님이 집안을 건사하느라 애를 많이 썼다. 어려서 아버지가 놀러 가서 밤늦도록 집에 오지 않으면 맏이였던 정돈희 씨가 걸어서 아버지를 찾아다녔다. 아버지가 있는 곳을 눈으로 확인하고, 가만히 돌아와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말씀드렸다. 그렇게 어린 그는 소랭이 밤길을 걸으며 컸다.
월산리를 돌아 나오는 길, 처음 느티나무를 보았을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그곳에서 그네를 탔을 할아버지의 청년 시절을 떠올리니, 그 시간이 거기에 분명 있었구나 싶다. 350년이라는 시간이 짧지도 길지도 않게.
글 사진 이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