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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38호] 그림이 건넨 단단한 고무줄 하나
그림 한 폭에 담긴 인생,
그림이 건넨
단단한 고무줄 하나
지역연계프로그램 아지트
‘찬란히 빛나는 My Life 나의 인생, 그림이 되다’
대전광역시가 옛 대전테미도서관을 리모델링해 조성한 테미예술창작센터(이하 창작센터)가 개관한 지도 벌써 5년째다. 창작센터는 예술가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는 시각예술 레지던시로, 예술가와 시민이 소통할 수 있는 플랫폼이자 허브공간을 목표로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소통하고자 했던 의도와는 사뭇 다르게 정작 주민들은 전시 관람을 제외하곤 발걸음 할 길이 없었다. 예술가와 지역주민 모두를 위한 공간으로 발돋움하고 싶었지만, 찾는 이는 정해져 있었다. 여러모로 아쉬움이 있던 차에 대전문화재단은 지역연계프로그램 아지트(AGIT)를 통해 지역민과 손잡았다.
개인의 인생이 지역의 역사로 남는 과정
‘찬란히 빛나는 My Life 나의 인생, 그림이 되다.’ 지난 9월 14일부터 21일까지 창작센터에서 진행한 지역연계프로그램 아지트(AGIT)의 결과보고전이다. 창작센터는 지난 7월 16일부터 9월 13일까지 진행한 프로그램의 결과물을 가지고 전시를 열었다. 이번 프로그램은 지역예술가와 주민 간의 커뮤니티 활성화를 위한 사업 공모를 통해 선정된, 청년예술가 단체 ‘블루플레임 인 아트’가 프로그램을 기획·운영했다. 블루플레임 인 아트 박순용 대표는 창작센터와 주민이 교류하고, 그 결과물이 지역의 역사로 남길 바라는 마음에서 기획했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창작센터에서 공감할 수 있는 것을 기획해 보고 싶었어요. 고민 끝에 프로그램 역시 예술 교육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참가자 인생에 주목해 기획했죠. 주민 한 사람의 인생이 곧 지역이라고 생각했고, 지역을 이루는 주민이 그림을 통해 서로의 삶을 이야기하고 공유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죠. 참가자들의 그림이 모여 우리 지역의 또 다른 역사가 되길 바라는 마음도 컸고요.”
아지트 프로그램은 ‘나를 그리다’, ‘희로애락을 그리다’, ‘찬란히 빛나는 나의 인생을 그리다’라는 세 가지 프로그램을 총 10회에 걸쳐 진행했다. 참여 시민은 3개월간의 아지트 프로그램을 통해 캔버스에 자신의 삶을 담아냈다. 참여자 대부분은 미술 전공자도 아닐뿐더러 아크릴 물감에도 익숙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수업 진행을 맡은 블루플레임 인 아트 이지란 미술감독은 참가자 대부분이 그림을 어려워하고, 못한다고 말하며 주저했다고 말했다. 기획단은 기술적 도움은 자제하고 참가자가 개인의 이야기를 자발적으로 담아내도록 도왔다.
아지트 프로그램에는 20대에서 80대에 이르는 다양한 연령층이 참가했고, 지역도 인근 지역부터 유성, 관저 등 다양하고 참여 이유도 가지각색이다. 무엇 하나 비슷할 것 없는 이들이 아지트로 한데 묶였다. 80년 인생을 살아온 참가자는 미래를 그려 보는 동안 가슴이 뛰었고, 또 다른 참가자는 처음 그림을 그려 보며 가슴이 설렜다.
김남순 참가자는 버스 세 번을 갈아타는 수고로움을 견디며 매주 수업에 참여했다. 오는 길이 번거롭지는 않았냐는 질문에, ‘나는 여기 오는 게 너무 재밌어. 재밌는 일을 하면 귀찮은 것도 없어. 즐겁고 좋으니까, 오는 길도 맨날 맨날 즐거운 겨’라고 답했다. 그 기분을 느껴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빙긋 웃을 법한 대답이었다.
손끝에서 번진 나의 희로애락
전시장 안에는 수업 진행 순서대로 작품이 걸려 있었다. 입구 바로 왼쪽 벽면에 전시된 각자의 명함 작업인 ‘나를 그리다’를 시작으로 ‘희로애락을 그리다’, 안쪽에는 ‘찬란히 빛나는 나의 인생을 그리다’ 작품이 이어졌다. 그리고 중앙 가장 안쪽에는 참여자들의 인터뷰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희로애락을 그리다’ 작품 속에는 참가자들 각자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떤 참가자의 그림에는 기쁨만, 다른 참가자는 자신의 분노를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표출해 보기도 했다. 작품을 완성한 뒤 참가자들은 서로에게 작품 설명을 하며, 각자가 살아온 인생과 속내를 나누었다고 한다. 말하기 어려웠을 이야기가 그림 하나로 쏟아졌다. 이 과정에서 참가자들은 짧은 시간이 무색할 만큼, 끈끈하고 뜨거운 감정을 느꼈다. 어쩌면 아지트 프로그램이 참가자들에게 건넨 건 반복되는 삶의 환기보다는, 지역주민 간의 단절된 소통을 이을 수 있는 끈 하나를 내어 준 것일지도 모른다.
김순남 참가자의 ‘찬란히 빛나는 나의 인생을 그리다’ 작품. 김순남 참가자의 약혼 사진을 작품으로 옮겼다.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희로애락이 전부 담긴 70, 80대 참가자들의 것이었다. 이들의 그림에는 여태껏 지나쳐 온 과정이 드러난다. 가장 행복했던 시기, 가장 힘들고 슬펐던 날들, 그리고 그것들을 이겨 내고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굴곡이 그림 하나로 완성됐다. 남편 손을 잡고 매주 수업에 참여한 이원복 참가자는 ‘희로애락을 그리다’ 작업을 진행하며,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고 다시금 정리하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작업을 하면서 인생에 대해 깊게 생각해 봤어요. 이만큼 살아 보니 인생이 참 고무줄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 그림 속에는 양쪽에 사람이 서 있고, 이 사람들은 고무줄을 나란히 쥐고 있어요. 양쪽 모두 팽팽하게 고무줄을 당기면 결국 힘을 못 이기고 고무줄이 끊어지잖아요? 고무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한쪽에서 당기면 한쪽은 힘을 뺄 줄 알아야 해요.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 할 줄 알아야, 그래야 좋은 인생이라고 생각해요.”
참가자들에게 아지트는 워크숍을 넘어 참가자들 개개인의 인생을 돌아보고 미래를 그려 나가는 가슴 뛰는 작업이었다. 또한 낯선 타인과 한 공간에서 깊게 소통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3개월간 수업을 들으며, 서로의 인생을 나누고 공감하며 함께 웃고 울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을 3개월이라는 시간 새에, 참가자들은 참 많은 감정을 나누고 서로를 위로했다. 이원복 참가자가 말한 고무줄이 참가자들 사이에도 존재하는 듯했다.
전시 철거 날, 이들의 얼굴에는 똑같은 아쉬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마지막이라는 아쉬움에 전시 공간에 한참을 머무르다 다음을 기약하며 떠나갔다. 이들이 떠나간 자리에는 짙은 흔적이 남았다. 아쉬움일 수도 있고, 반가움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보다 더 진하고 뜨거운 것일지도 모른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 아쉬워, 몇 번이고 돌아보게 하는 어떤 것이었다.
윤애숙 참가자
그림을 그리면서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과정이 굉장히 즐거웠어요. 사실 도서관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이곳에 들를 일이 많지 않아 아쉬웠는데, 지역 시설을 주민이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이런 프로그램을 준비해 줘서 너무 감사한 마음이에요.
임정연 참가자
첫 수업을 들을 때만 해도, 제가 너무 어려서 괜히 신청했나 하는 생각과 그만 나와야 하나 하고 걱정을 조금 했어요. 그런데 다른 분들과 함께하면서 쌓였던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따뜻함을 많이 느꼈어요. 그동안 많은 분들이 전해 준 애정 어린 말이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아요.
이원복 참가자
프로그램의 과정 자체가 너무 좋았어요.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조건 없이 서로를 배려하고 챙기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죠. 수업을 들으면서 인생을 참 많이도 돌아본 것 같아요. 내가 잘 살았나, 더 할 건 없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정말 오랜만에 가져 본 여유였어요.
글 사진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