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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37호] 끊임없이 텍스트가 흐르는 텍스트의 아지트
끊임없이 텍스트가 흐르는
텍스트의 아지트
안전가옥
잔뜩 오해했다. 그저 장르소설만을 다루는 북카페 개념의 커뮤니티 카페인 줄 알았더니, 장르소설만 다루는 것도 아니고, 단순 커뮤니티를 지향하는 공간도 아니다. 안전가옥에서는 콘서트홀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듯 텍스트가 흐른다. 이 세상 모든 이야기가 쉬어 갈 수 있는 곳,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세상 곳곳으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돕는, 말 그대로 이야기들의 안식처, 안전가옥이다.
수풀 사이, 모든 이야기들의 안식처
일요일은 정신없이 돌아가던 성수동 일대가 일주일에 단 한 번 쉬는 날이다. 좁은 도로를 지나는 많은 자동차와 성수동을 찾는 사람으로 붐비던 성수동도 일요일만큼은 한적하다. 비싼 외제차가 드나들던 자동차 정비소는 문을 닫았고, 사람들로 붐비는 성수동의 핫한 카페와 음식점 몇몇도 문을 잠근 채 휴식에 들어갔다.
안전가옥은 자동차와 오토바이 정비소가 즐비한 골목 중간에 위치한다. 안전가옥도 주변 상가와 마찬가지로 오토바이 정비소로 쓰이던 곳이었다. 안전가옥 김홍익 대표는 무언가 만들어지고 망가진 것이 다시 태어나는 이 동네가 마음에 들어 이곳에 자리 잡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여느 정비소와 다르지 않은 외관을 하고 있어 언뜻 보면 이 거리 어디에나 있는 정비소 같다. 출입구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어 이곳이 입구인지 의심스럽다. 들어가면 안 될 것처럼 보여, 몇 번을 서성이고 고민하게 된다.
커다란 검은 철문에는 작은 문패가 걸려 있다. ‘모든 이야기들의 안식처, 안전가옥’이라 적혀 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저마다의 이야기가 흐르는 공간이다.
김홍익 대표는 일부러 안전가옥이 눈에 띄지 않길 바라며 공간을 구성했다. 다른 것들에 묻혀 눈에 띄지 않으면서 이곳을 알아차리고 들어올 누군가는 아늑함을 느낄 수 있길 바랐다.
“입구는 <반지의 제왕>을 컨셉으로 잡았어요. 수풀이 우거져 있어 밖에서 보면 조금 이상하고 들어가도 되나 싶지만, 들어오면 귀인을 만나게 되는 거죠. 비밀 아지트 같은 곳이에요. 라이브러리 문도 처음에는 바깥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원래 있던 입구를 막고 안쪽에 새로 만들었어요. 이곳을 찾는 창작자들이 아늑함을 느끼고 ‘우리를 위한 시설이 있다’라고 느끼게끔 하고 싶었어요.”
당신이 찾던 공간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바닥에 깔린 나무판을 밟고 조심스레 들어서면 조금 전에 느꼈던 우려와는 달리 깔끔한 외관이 나온다. 하나의 관문을 통과한 것 같은 마음에 안도한다. 안전가옥은 라이브러리 티켓을 구입할 수 있는 스튜디오와 라이브러리 건물 두 개가 마주보고 있다.
라이브러리는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가 벨에게 서재를 보여 주는 장면을 모티브 삼아, 모든 책장과 벽을 원목으로 꾸몄다. 곳곳에는 판타지 소설에 삽화로 등장할 법한 소품과 고지도가 놓여 있다. 각 카테고리 별로 진열된 책들은 오히려 빼곡하지 않아 원하는 책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몇몇 책장에는 자필로 쓴 도서 추천서가 함께 놓여 있다. 식품 안전 인증 마크처럼 왠지 재미가 보장된 책처럼 느껴진다.
안전가옥은 한 달에 한 번씩 안전가옥 멤버들이 이야기를 쓰는 ‘월간 안전가옥’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형식의 제한 없이 어떤 이야기든 자유롭게 작성할 수 있다. 멤버들이 쓴 이야기는 라이브러리 입구에서 왼쪽에 나란히 걸려 있다.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안전가옥을 이용하는 방법은 조금 특이하다. 이용객은 음료비 대신 라이브러리 티켓을 구입해 원하는 시간만큼 공간을 이용한다. 사실 커피 두 잔 가격의 돈을 지불하고 안전가옥을 이용하라면, 조금 꺼려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안전가옥은 우리가 찾는 성수동의 예쁜 카페가 아니다. 차 한 잔 마시며 대화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적합하지 않은 공간이다.
“여기 괜찮다, 한 번 가 볼까? 하는 분들은 저희의 타깃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런 분들에게도 이곳이 편한 장소가 아니고요. 많은 사람이 카페를 찾아 안전가옥을 방문하는데 가격을 보고 돌아가는 사람이 많죠. 이곳은 공간의 쓰임을 알고 온전히 집중해서 무언가를 하는 사람들의 공간이에요. 지금 안전가옥을 찾는 분들은 이미 저희 공간에 대해 알고 있는 거죠.”
어떤 이들로 인해 조금씩 덧입힌 의미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안전가옥은 그냥 카페가 아니다. 창작자들의 아지트며, 끊임없이 텍스트가 생성되는 공간이다. 그리고 콘텐츠 개발 사업을 진행하는 ‘안전가옥’의 사옥이다. 사실 김홍익 대표의 입에서 흘러나온 사옥이라는 단어에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러나 ‘도서관 안 매점과 같은 곳’이라는 그의 찰진 비유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스튜디오 2층에는 집필실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저희와 계약한 창작자가 작업을 합니다. 저희는 그 창작자와 함께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고요. 밖에서 보이는 것이 공간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공간 사업을 하는 줄 오해하는데, 사실 저희에게 공간은 큰 의미가 없어요. 안전가옥의 사옥 같은 곳이죠. 왜 카페를 운영하면서 돈 벌 생각은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저는 오픈 이래로 공간으로 돈을 번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저희 메인 비즈니스는 콘텐츠고, 이 공간은 그 콘텐츠를 만드는 분들을 오게끔 하는 매력 포인트 정도예요.”
이른 시간이었지만, 몇몇 사람은 벌써 라이브러리 안에서 노트북을 앞에 두고 앉아 있다. 입구 바로 오른편에는 책이 켜켜이 쌓여 있는 도서관 사서 자리가 보인다. 학창시절, 점심시간만 되면 몇 번이고 들락거렸던 학교 도서관이 떠올랐다. 도서관에 들러 한창 꽂혀 있던 《셜록홈즈》 시리즈와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을 빌려 보거나 친구들과 조용히 키득거리며 사담을 나누기도 했다. 당시에 내 생활 반경 안에서 도서관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은 도서관보다 서점을 더 많이 들르며 책만 사고 후다닥 나오기를 반복하고 있다. 도서관과 멀어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안전가옥에서만큼은 그 당시로 돌아가 보고 싶어졌다.
주변을 둘러보다 짧은 단편 소설 하나를 집어 들고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마우스 딸깍이는 소리, 타이핑하는 소리가 노랫소리와 기분 좋게 섞여 들린다. 아무 생각 없이 집어든 소설도 꽤 재밌다. 한껏 집중해, 앉은 자리에서 책 한 권을 끝냈다. 물론 짧은 단편 소설이었지만, 어쨌거나 책 한 권을 완독했다는 사실에 성취감이 몰려왔다. 이런 성취감을 느낀 것도 아주 간만이라는 생각도 함께였다.
오랜만에 느낀 성취감에 한껏 도취되어 ‘공간은 그저 사옥의 개념이고, 매력 포인트일 뿐’이라는 김홍익 대표의 말을 한참동안 곱씹어 봤다. 의미 없는 공간처럼 이야기하는 것 같아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 생각 끝에 ‘그러면 좀 어때?’라는 결론만 남았다. 닫힌 듯 보이지만, 누군가에겐 활짝 열린 공간이고, 이곳에서 어떤 이는 의미 있는 것들을 생산해 내고, 또 다른 이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으니 말이다.
글 사진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