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37호] 옛 공장의 넓은 품, 사람을 안다

옛 공장의 넓은 품,

사람을 안다

F1963

 

 

F1963은 넓고 크다. 대지면적 6,740평에 전시공간만 1,798평, 상업공간은 651평이다. 1963년부터 와이어 공장으로 45년 동안 사용한 수영공장을 철거하지 않고 복합문화공간으로 바꾸었다. 연간 방문객 100만 명, 많은 사람들이 이 공간을 즐기고 돌아간다. 문화를 생산하는 공장이라는 정체성을 십분 발휘하고 있는 F1963을 찾았다.

 


 

5도, 그리고 와이어 공장
부산 하면, 많은 공장이 떠오르곤 했다. 언덕에 집이 다닥다닥 붙은 곳, 길이 복잡한 곳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F1963을 찾아가는 길도 다르지 않았다. 좁은 골목들과 언덕을 지나서야 F1963 근처에 이르렀는데, 정작 입구가 눈에 띄지 않아 당황했다. 택시 아저씨는 내비를 따라가면서도 툴툴거렸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후끈한 열기에 숨이 막혔다. 35도, 연일 폭염이 계속되고 있지만 하필 취재가 있던 날은 최고치를 달리던 때였다.
F1963의 대나무숲길도 지나쳐 서둘러 건물로 향했다. 흰색 익스펜디드 메탈을 덧댄 외관이 시원스러웠다. 현대적이고 심플한 공간, 유리벽에 남아 있는 줄리안 오피의 작품이 모던한 느낌을 더한다. 금세 지어 올린 듯한 산뜻한 외관에 45년 공장의 흔적이 어떤 식으로 남아 있을지 상상이 안 되었다.
F1963이라는 이름은 Factory의 F와 수영공장을 처음 세운 1963년에서 따왔다. 고려제강은 1945년에 설립되어, 올해 73주년을 맞는 부산의 향토기업이다. 이 장소는 그 시절 부산의 수많았던 공장을 연상시킨다. 와이어로프를 생산하던 고려제강 수영공장에 문화적 기운이 불어넣어진 것은 2016년 9월 부산비엔날레 전시장으로 활용하면서이고, 2017 폐산업시설 문화재생사업에 선정되면서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건물에 들어서서 차례로 전체를 둘러보았다. YES24중고서점, 테라로사 커피, 그리고 중정. 개인적으로 중정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F1963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ㅁ’ 모양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 중앙 공간의 바닥을 파내고 흙을 채운 다음, 천장을 뚫어 놓았다. ‘F1963스퀘어’라고 불리는 중정 둘레에 나무 데크를 놓고, 허브를 비롯한 식물들을 심었다. 중정 한쪽은 야외무대이기도 하다. 이곳으로 바람이 들고, 햇볕이 든다. 공연을 할 때면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고, 음악소리가 흘러 하늘로 흩어진다.
중정에도 옛 공장의 흔적이 곳곳에 남았다. 중정 바닥을 파내서 나온 돌덩어리들은 계단 아래에 놓아두었다. 또 나무 데크를 걸으며 중간중간 마주치는 벽체 기둥들이 옛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보존하기, 잘라내기, 덧붙이기를 통한 재생건축에 충실한 모양새다. 건물 뒤쪽에는 사무실로 쓰던 공간들이 남아 있다. 건물 둘레에 심어 놓은 대나무가 밋밋한 회색 공간에 푸른 기운을 더해 준다.

 

시간의 흔적 위에 새것을 놓다
테라로사 커피가 입점한 곳은 가장 먼저 지어진 공장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나무 트러스트들이 떠받치고 있는 높은 천장이 먼저 눈에 든다. 높다. 그리고 넓다. 최근 체험해 본 공간 중에, 하나로 트인 이렇게 넓고 높은 장소는 처음이다. 공장 시절 그대로 둔 바닥, 벽체의 콘크리트 기둥, 와이어를 감아 두었을 나무 고빈, 공장에서 쓰던 철판을 활용해 만든 테이블. 옛 공장에 들어온 듯하다. 중정이 내다보이는 유리벽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유리 넘어 하늘도 보고, 천장의 나무 트러스트도 본다. 신기한 체험이다. 천장에 나무 구조물이 얽혀 있는 커다란 네모 박스 안에 들어앉아 있는 기분이다.
내가 앉은 자리의 테이블은 나무 고빈이다. 그리고 좌석 오른쪽에 자리한 커피바는 공장의 라인 기계를 가공해 만들었다. 와이어를 만들던 공장이라는 정체성을 살려, 손몽주 작가의 와이어 설치 작품이 눈에 띈다. 
제인 제이콥스는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에서 “오래된 건물의 경제적 가치는 마음대로 대체할 수 없다. 이 가치는 시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했다. 45년 동안 천장을 떠받힌 나무 트러스트들 아래 앉아 있노라면, 낯설다. 이 공간도 순간도. 언제 이렇게 넓고 높은, 와이드한 공간에 앉아 있겠는가? 천편일률적인 상업적 공간에 길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색다른 공간에 대한 경험이다. 의자도 불편하고, 그다지 아늑하다고는 할 수 없는 거칠고 정제되지 않은 공간이지만 그 거침을 느끼기 위해 사람들은 이곳에 온다.
이 공간을 위해 많은 돈과 많은 정성이 들어갔다. 이로써 폐기되고 사라졌을 시간과 공간이 되살아났다. 어느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개성적 공간에 새로운 숨이 더해지며 F1963은 많은 사람을 품었다. 문화적 가치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움직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F1963의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석촌홀’은 고려제강과 부산시가 공동으로 준공했다. 다음 날 있을 〈금난새의 베토벤 심포니 사이클〉 준비로 공간 출입이 어려워, 직접 볼 수는 없었다. 〈부산 리턴즈〉와 〈줄리안 오피 인 부산〉 등 다양한 기획 전시와 공연을 이 공간에서 선보이고 있다. 앞으로 도서관과 갤러리도 개관 예정이니, F1963의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성격은 더 강해질 것이다.
테라로사 커피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재미있는 장면을 보았다. 화장실 한복판에 옛 공장 철제 기둥이 툭 불거져 있다. 이곳은 화장실이나 화장실이 아니다, 이곳은 카페이나 카페가 아니다,라고 공간은 항변한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 우리가 들른, 경험한 F1963은 공장일 수도, 미술관일 수도, 공연장일 수도, 당신이 상상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 철제 기둥은 이 공간이 처음에는 공장이었으나, 지금은 화장실이며, 또 내일은 뭐든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당신의 그 상상을 품겠다고. 만들기 나름, 그것이 도시재생 공간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능성이다.

 

 

 


글 사진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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