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36호] 내 책방 작은 빨강 의자에 앉아서

내 책방 작은

빨강 의자에 앉아서

김연희


아티스트 웨이(줄리아 카메론, 경당, 2012)




내 책방 작은 빨강 의자에 앉아서 쓴다. 이 책방은 내 책방이다. 남편의 책방이기도 하고 내 아들과 딸, 스무 명 남짓한 정기 후원자와 보증금과 공사비에 돈을 보태 준 100명 넘는 친구들의 책방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내’ 책방이다.
나의 허름하고 아늑하면서 온전히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작고도 광활한 공간에서(아! 세상 모든 벽이 삭제된다면 우리는 거대한 한 집, 한 공간을 갖게 될 텐데) 책 한 권을 소개하려고 한다. 줄리아 카메론이 쓴 《아티스트 웨이》. 이 책으로 말하자면 전 세계 수백만 아니 어쩌면 수천만 사람들이 보았고 그 가운데 여러 사람이 참 좋은 책이라고, 이 책 덕분에 소설, 그림 혹은 영화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노라고 ‘간증’을 쏟아내는, 창조성 회복의 세계적 처방약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초판 1쇄가 2003년 11월 20일에 나온 뒤로 여러 차례 개정판을 거쳐서 현재까지도 활발히 소개되고 있다.
나는 이 책 얘기를 꽤 오래전에 친한 언니에게서 들었다. 그 언니는 프리랜서 북디자이너고 아주 꼼꼼하면서 자유롭게 일할 줄 아는 사람이다. 나를 과분할 만큼 칭찬해 주고 만날 때마다 맛있는 것을 사 준다. 그 언니는 내가 본 사람들 중 아주 드물게 자기 일을 사랑하고 작업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다. 그런 언니가 책 얘기는 자주 해도, 그러니까 책을 만드는 편집자와 디자이너로서 우리가 책 얘기를 자주 나눠도, 어떤 책을 콕 찝어 추천해주는 일은 드문데(아니, 유일했나?!) 내게 추천해 준 책인 거다.
이 책을, 그러니까 나는 바로 만나러 갔어야 했다. 나를, 내 얘기와 삶을 주의 깊게 보아 주고 읽어 주는 사람이 “연희 씨, 읽어 봐요, 이 책.” 했다면 당장에 달려갔어야 했는데 그로부터 10년은 족히 지나서 만난 것이다. 내가 만약에 10년 전에 이 책과 만났더라면, 이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아침에 매일 3쪽씩 글을 쓰고 매주 미술관이며 탁 트인 들판이며 다니면서 무슨 일이든 오로지 ‘재미’와 ‘흥미’를 위해 해 보면서 내 안에 살고 있는 어린아이를 만나고 그 애가 들려주는 조언에 귀 기울였더라면 내 삶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물론 그때는 책 내용을 공감하지 못하거나 시덥잖게 여겨서 별다른 효력을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책에 맥락이 있듯이 사람과 책이 만나는 데도 맥락이 중요하니까.
나는 지난가을 어쩌면 이 책에 딱 맞는 맥락에 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9월 첫 주인가 둘째 주인가, 책방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은 때에 이 책을 교재로 한 창조성 워크샵을 열었다. 어째서 ‘창조성’이고 《아티스트 웨이》인가. 참으로 묘하게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공간을 열었으니 배움을 갖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고, 그 주제가 창조성이었다. 그리고 내 깊은 데서, 저 깊이에서부터 ‘아티스트 웨이’라는 이름을 길어올렸나 보다. 어쨌든, 그렇게 시작되었다.
첫 시간에 책을 거의 읽지도 못한 채로, 캄캄한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시무룩한 마음으로 글을 쓰는데(이맘때쯤 나는 자주 눈을 감고서 오로지 손가락으로 행 구분만 짚으면서 내가 믿는 하나님과 글로 얘기를 나눴다. 가장 애가 타는 문제를 내가 쓰면서 묻고, 바로 떠오르는 말들을 쓰는 식이었는데, 그 말들은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하던 것들이어서 아주 신비롭고 놀라웠다. 그런데 이 방법이 《아티스트 웨이》에도 나와 있었다!) 편안해질 즈음, 시각 예술가인 이웃이 그냥 놀러 왔고 나는 결코 그냥 보내 줄 수 없다면서 꼭 붙들고 같이 마주 앉아서 책의 첫 부분을 함께 보고 실습했다.
그렇게 시작한 워크샵 인원은 이내 나 포함 다섯 명이 되었고, 지금은 줄리아 카메론의 다른 책으로 공부하는 모임과 《아티스트 웨이》 모임, 이렇게 두 개로 늘어났다. 《아티스트 웨이》에서 줄리아 카메론은 말한다. 예술은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며 매순간 고통에 빠져 사는 극단적 기인만 하는 게 아니라고. 오히려 평범하고 규칙적인 일상의 리듬에 맞추어 건전한 삶을 꾸려가는 사람들에게서 진실된 예술이 꽃핀다고. 완벽주의라는 우상을 내던져버리고 내게 나타나고 들려오는 것들을 솔직하게 받아 쓰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예술이라고 말이다.
《아티스트 웨이》와 함께 나를 들여다보고 용감하게 글로 받아 쓰면서 나는 많은 허물을 벗었다. 나 자신과 가족, 다른 사람, 세계에 대해서 새로 깨닫고 느끼게 된 것이 많았다. 삶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쓰는 글이 살아 있다고, 아침에 계란 후라이를 하고 빵을 굽는 사이사이에도 얼마든지 글쓰기를 끼워넣을 수 있다고 이 책은 가르쳐 주었다. 나는 1년 좀 안 되는 시간 동안 늘 망설이기만 하던 긴 이야기 쓰기를 두 번이나 성공했고, 결과물이 아직 손볼 데투성이지만 만족한다. 워크샵을 같이하는 사람들 가운데 어떤 친구는 한 번도 도전해 보지 않은 국사자격증시험에 응시했고 또 어떤 친구는 옷장에 걸어 놓기만 하던 화려한 옷을 꺼내 입고 바깥으로 나왔다. 이 모임이 얼마나 여러 개로 늘어날지, 언제까지 할지 모르겠지만 이것만은 확실하다. 《아티스트 웨이》 덕분에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3쪽씩 글을 쓰는 습관이 생겼고, 덕분에 내 삶을 보다 정밀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언어와 언어 너머에 있는 세계의 흐름과 그 속에 나를 더 잘 감지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됐다.
고마워요, 줄리아! 그리고 줄리아가 이런 책을 쓸 수 있게 이끌어 주신 신! 창조자에게도 고맙습니다! (김연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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