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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37호] 저 언덕 너머 산동네에서 기다릴게요
저 언덕 너머 산동네에서
기다릴게요
대동단결
유난히도 뜨거운 여름. 대동에 자리한 대동단결을 찾았다. 대동단결로 향하는 길은 가파른 언덕의 연속이었다. 가쁜 숨을 고르려 잠시 멈춰 뒤를 돌아보면, 우뚝 솟은 대전도시철도공사 건물과 대흥동, 은행동, 대동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괜스레 시원했다. 이쯤이면 도착했겠지 싶었을 때, 벽화 위에 붙은 하얀 대동단결 간판이 보였다. 20m 남았다는 말에 더 힘차게 골목길을 걸었다. 그리고 또 다른 대동단결 간판을 만났다. 이번엔 대동단결 지붕 바로 밑, 건물 모서리에 박혀 있다. 간판을 올려다보니, 푸른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숨은 차고 땀은 흐르는데 기운이 솟는 기분이었다. 낯선 곳을 찾았다는 긴장감보다는 즐거움이 앞서는 이 동네에 대동단결이 있다.
정겨운 골목길을 따라 대동단결로 가자
최근 보문산에 오른 적이 있다. 정상에 올라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감탄했다. 옷을 흠뻑 적신 땀 때문에 느꼈던 불쾌감은 사라지고 벅찬 마음만 남았다. 대전 전체가 속속들이 내려다보였고 높은 빌딩 사이로 낮은 동네가 눈에 들어왔다. 각진 회색 도시 안에서 아직까지 각자의 색을 품은 동네다. 빨간색, 파란색 지붕이 덮인 동네는 존재감을 가득 드러냈다.
복합문화공간 ‘대동단결’이 있는 대동 역시 이 존재감 가득한 동네에 포함된다. 대동단결로 향하는 길은 골목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언덕길이다. 문득 길을 오르며 가파른 골목을 걸어 본 적이 언제인가 생각해 본다. 아마 근래에는 없었던 것 같다. 날이 더워서인지 땀이 흐르다 못해 떨어졌다. 그래도 이 언덕 많은 동네가 싫진 않았다. 저녁 시간에 찾은 터라 한창 저녁거리를 고민하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목소리가 도란도란 들렸다. 자취를 하다 보니 끼니를 걱정하는 소리를 들은지도 오래였다. 정겨움이 솟는 동네다.
흐른 땀을 닦으며 대동단결 입구로 들어섰다. 짧은 통로를 끼고 있어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길을 벗어나니 와- 하고 탄성이 나왔다. 대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모습과 대동단결의 알 수 없는 분위기가 묘하게 마음에 들었다. 올 화이트 컬러에 깔끔하게 정리된 요즘 카페와는 달리 낡은 주택 건물에 무언가를 이것저것 많이도 두었다. 맥시멀리즘을 추구한다는 대동단결 박정훈 대표와 잘 어울리는 인테리어다.
박정훈 대표 말에 의하면 대동단결 건물은 1950년대에 지어진 흙집이라고 한다. 높게 쌓아 올린 담벼락도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벽 구조다. 대동단결뿐만 아니라 이 동네 자체가 오래된 것을 그대로 끼고 살아간다.
“원래 이 집에 사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한동안 비어 있었다고 해요. 아무도 찾지 않는 공간이었죠. 사실 논리로만 보면 무너뜨려야 하는 것이 맞겠지만, 그렇게 되면 이 공간에 어려 있던 이야기가 사라지는 거잖아요. 이곳에 자리 잡고자 했던 이유도 이 집이 주는 느낌이 좋아서였어요. 물론 대전이 내려다보이는 경치도 한몫했죠(웃음).”
박정훈 대표에게 보수 공사를 진행하면서 집 뒤쪽 벽면에 붙어 있던 1956년 신문지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릴 적 우리 집 벽장이 생각났다. 꼬꼬마 시절, 컴컴한 그곳에 들어가 자주 놀곤 했다. 좋아하는 캐릭터가 그려진 공책 표지를 오려 빼곡히 벽에 붙여 두었다. 지금도 종종 들여다보는 추억 가득한 공간이다. 그 벽장이 나에게 어떤 공간인지 알기에 그 신문지가 주는 의미가 무겁게 다가왔다. 긴 시간 동안 묵은 추억이 한데 내려앉은 공간이라 생각하니, 함부로 허물 수 없었던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단순 카페가 아니에요, 당신의 아지트입니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 무렵, 대동단결을 찾는 손님이 많아졌다. 저녁노을로 붉게 물들 대전을 내려다보기 위해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리를 골라 앉아 평소 아래서만 바라보던 노을을 높은 언덕에서 마주한다.
대동단결에는 박정훈 대표 사무실과 빈티지 소품을 판매하는 공간을 제외하곤 모두 야외 좌석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속으로 대동단결의 수익을 걱정하며 소리 없는 오지랖을 부렸다. 하지만 노을을 보며 방금 전 했던 생각을 내뱉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이 멋진 풍경을 보기 위해선 계절을 막론하고 야외 좌석은 필요하다. 지금보다 더 많이 말이다.
대동단결은 이용방법을 조금 특이하게 설정했다. 대동단결을 찾는 사람들은 음료를 구입하지 않는다. 5천 원을 내고 두 시간 동안 공간을 빌린다. 음료는 서비스 개념이다. 단순히 음료를 마시며 품평하는 카페가 아닌, 오래 머무르며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정한 것이다. 두 시간이라는 제한 시간이 있지만, 박정훈 대표는 굳이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사람들이 이곳에서 많은 이야기를 쌓으며 공간으로 소비했으면 한다.
“가끔 대전에 여행 왔다가 들르는 분도 있고, 소문을 듣고 찾는 분들도 있어요. 대동단결을 찾는 분들에게 너무 감사하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역주민이 좋아하고 찾는, ‘나만 아는 아지트’이길 바라는 마음도 있어요. 요새 어딜 가나 예쁘고 좋은 카페도 많고, 많은 사람이 여행처럼 카페 투어를 하기도 해요. 하지만, 이 카페 들렀다가 저 카페 들르며 평가하기보다는 공간 자체를 사랑하고 오래 머무르며 언제든 찾았으면 좋겠어요. 오래 기억해 두고 종종 들르는 공간 말이에요.”
박정훈 대표에게는 평소 빈티지한 물건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어서인지, 대동단결 안에 존재하는 물건 대부분은 낡고 단종된 제품이 많다. 일부러 연출한 빈티지한 분위기가 아닌, 대동단결 자체가 박정훈 대표의 추억 공간이다. 한 물건을 두고 한참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추억이 어려 있는 물건이 대다수다.
그리고 그 물건들은 대동단결을 방문하는 아무개의 추억이기도 하다. 공간을 둘러보던 사람들 사이에는 ‘어, 나도 이 휴대전화 썼었는데!’, ‘나 이 게임 진짜 많이 했어’ 하는 말들이 오고간다. 누구하나 빼놓지 않고 경험했던 것들이다. 박정훈 대표 또래 손님은 어릴 적 추억에 젖을 테고, 그보다 젊은 손님은 신기해하며 새로운 경험을 하고 또 하나의 기억을 쌓는다.
대동단결에는 아는 손님에게만 제공하는 서비스가 있다. 바로 외할머니 인사 서비스다. 조금 의아할 테지만 한 번 상상해 보자. 오랜만에 방문한 외할머니 댁에 갔다가 작별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섰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할머니는 ‘어여 가~’라며 손을 내젓는다. 할머니의 손짓과 말에는 아쉬움이 한가득이다. 대동단결의 외할머니 인사 서비스도 마찬가지다. 자꾸만 뒤돌아보게 하고, 다시 찾게 되는 마성의 인사 서비스다.
아쉬움은 다시금 그곳으로 발걸음 하게 한다. 그곳에 두고 온 내 추억을 들춰보러 다시 찾는다. 어쩌면 박정훈 대표가 말한 ‘다시 찾을 수 있는 공간’이라는 건, 추억이 있기에 가능해지는 것 같다. 70년 묵은, 혹은 더 오래된 누군가의 추억에 박정훈 대표의 추억을 쌓았다. 그리고 이제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추억이 조금씩 쌓여 가고 있다. 외할머니처럼 손님에게 건넨 박정훈 대표의 아련한 인사 끝에는 또 하나의 추억이 들려 있다.
글 사진 이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