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월 136호] 이름이 만들어 내는 세계
이름이 만들어 내는 세계
김영미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신시아 라일런트, 보물창고, 2004)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 주지 않는다면
내가 이름 부를 존재가 아무도 없다면
이름을 갖는 것은
그로 인한 세계를 갖는 것이며
그 이름이 존재하거나 기억되는 한 그 세계는 불멸이라는 것,
그래서 이름은 존재의 가장 중요한 방식이다.
그래서 그러한가, 집이나 이름이나 같이 ‘짓다’라는 단어를 쓴다.
- 승효상, 《보이는 건축 보이지 않는 도시》
‘이름’이란 단어는 아마도 내가 동화책을 읽으면서부터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어쩌다 보니 주인공 이름으로만 된 제목의 동화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이것 역시 동화를 읽고 모여서 이야기하던 경험에서 만들어졌다. 처음엔 몰랐는데 언젠가부터 동화책 이야기를 하다 보면 주인공 이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름만 가지고도 충분했다.
《박뛰엄이 노는 법》의 ‘뛰엄’이라는 말의 의미, 《네버랜드 미아》의 ‘미아’, 《내 이름은 백석》의 ‘백석’ 등등. 왜 주인공 이름이 뛰엄이고 미아이며 백석인가? 묻고 답하는 사이에 이야기가 풀어지고 주제가 선명해졌다. 어느 작가도 책 제목과 주인공 이름을 허투루 짓지 않았다. 주인공 이름 속에는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담겨 있었으니, 동화책 이야기를 할라치면 주인공 이름 이야기를 한참 하고 있는 거였다. 그러다 보니 난 책 제목에 대해서, 주인공 이름에 대해서 먼저 생각하게 되었고 글을 쓰게 되면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시작하고는 했다. 사실 이것이 그림책을 이해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그만큼 책의 제목이나 주인공 이름은 많은 것을 담고 있으니까. 이름이라는 것이 그랬다.
작가가 주인공 이름을 고심해서 짓는 것만큼이나 고심해서 이름 지어 주기를 좋아하는 할머니가 있다. 신기하다. ‘이름’ ‘짓다’ ‘할머니’ 모두 내가 관심있는 단어들이다. 이 세 단어가 모여서 된 그림책이 바로 《이름 짓기 좋아하는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너무 오래 살았다. 할머니를 아는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고, 그러니 만나는 사람도 없으며 편지도 오지 않는다. 물론 전화도 오지 않는다. 아무도 이름을 불러 주지 않자 할머니도 그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 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이름도 없어졌다. 아무도 내 이름을 불러 주지 않고 나 또한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 주지 않는 일…
할머니는 외로웠고 이름을 부르고 싶어졌다. 그래서 집에 있는 물건들에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불러 주었다.
매일 아침 할머니는 로잰느에서 일어나, 프레드에 앉아 코코아를 마시고는, 베치를 몰고서 우체국으로 달려갔어요.
어떤가? ‘할머니는 침대에서 일어나 의자에 앉아 코코아를 마시고는 차를 몰고…’ 이렇게 사는 것보다는 훨씬 외롭지 않을 것 같고, 무엇보다 누군가와 함께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할머니의 이름 짓기는 친구를 만드는 방법이었다. 집에 있는 물건들 하나하나에 이름을 지어 주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이제 집에 있는 물건들 마음이 읽히고 그들의 마음이 궁금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 집에 강아지 한 마리가 찾아온다. 할머니는 한눈에 강아지가 배고픈 줄 알았고 강아지에게 먹을 것을 주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강아지는 찾아오고 할머니는 그때마다 먹을 것을 내주었다. 하지만 강아지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오지는 않았다. 이름 짓기를 좋아하는 할머니였지만, 강아지는 이름도 지어 주지 않았다. 할머니의 이름 짓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는 것이다. 할머니보다 일찍 죽거나 사라져선 안 된다. 더 이상 이별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할머니와 관계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없다니…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세상, 그래서 이름을 불러 줄 사람 없이 이름도 잃어버리고 나 혼자 남아 살아 있는 일은 괜찮은가? 나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어떤 삶일까?
그래도 이름을 지어 주는 할머니는 씩씩하기만 하다. 낡았지만 멋진 자가용에는 ‘베치’라 이름을 지어 주고 낡은 의자에는 ‘프레드’ 그리고 오래오래 살아온 집에는 ‘프랭클린’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아마 그 옛날 함께했던 친구들 이름일 것이다. 이름을 지어 주면서 그들에게 말을 걸고 그들의 생각을 헤아려 주었다. 그러자 그것들은 할머니와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다 튼튼한 물건들뿐이다. 괜찮을까? 물론 괜찮지 않을 것이다.
이름이 만들어 내는 세계
며칠 동안 개가 찾아오지 않자(그 사이 강아지는 개가 되었다) 할머니는 안절부절이다. 개가 궁금하다. 또 며칠이 지나자 이제 개가 걱정되기 시작했고 마음이 떠나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할머니는 떠돌이 개 사육장에 전화를 걸어 본다. 하지만 사육사가 찾고 있는 개의 이름을 묻자 할머니는 아무 소리 못 하고 말았다. 개는 이름이 없었다. 할머니가 불러 줄 이름이 없었다.
어디에 있건 그 개는 날마다 할머니네 집 문가에 찾아오게 마련이었고, 할머니는 개에게 먹이를 주고는 어서 돌아가라고 이르게 되어 있었다는 것을, 날마다 그렇게 똑같은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를 게 뻔했어요. 순둥이 갈색 개는 목걸이도 없고, 이름도 없었어요. 그러니 할머니와 개 사이의 일을 아무도 모르는 게 당연했지요.
강아지는 날마다 할머니네 집 문가에 찾아왔고, 할머니는 강아지에게 날마다 먹을 것을 주었고, 어느 날 강아지가 찾아오지 않자 할머니는 날마다 강아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랬는데 이런 모든 일들이 아무도 모르는 일이 되어 있다니…
그동안 할머니와 강아지 사이에 있었던 많은 일들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었다. 이름이 없다는 것이 그랬다. 이름이 없으면 아무 관계도 아닌 것이다. 역시 “이름을 갖는 것은 그로 인한 세계를 갖는 것이며 그 이름이 존재하거나 기억되는 한 그 세계는 불멸”하는 것이다. 강아지의 이름을 모르는 할머니와 강아지는 아무 사이도 아닌 것이다. 이름을 묻는 떠돌이 개 사육사에게 강아지의 이름을 말할 수 없었던 할머니는 그대로 자동차 ‘베치’를 몰고 달린다. 다시 개 사육사가 개의 이름을 묻는다.
할머니는 잠시 머뭇거렸어요.
할머니는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모든 친구들을 떠올렸어요. 그러자 다정하게 웃는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올랐습니다. 사랑스런 친구들의 이름도 모두 모두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좋은 친구들을 사귀었던 게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 깨달았습니다. 할머니는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우리 개 이름은 ‘러키’랍니다! ‘행운’이라는 뜻이 담긴 이름이죠.”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친구들과 함께했던 그 시간들이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깨달았다.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가 떠올랐다. 이름이 있다면 그 이름이 만들어 내는 세계가 있고, 그 이름을 불러 주면서 그 존재는 살아나는 것이다. (물론 사라져 보이지 않더라도.) 또다시 이별이 두려워 관계를 시작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제 알게 되었다. 이름을 불러 주며 서로 사귀었던 그 시간들이 행운이었음을 말이다.
그리하여 이름 없는 개는 ‘러키’가 되었다.
사육사가 이름을 묻자 할머니는 세상을 먼저 떠난 친구들이 떠올랐다고 한다. 얼굴도 이름도… 그러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렇게 기억하면서 함께하는 것이었다. 이걸 몰랐다. 그래서 강아지 이름을 짓는 것을 망설였는데 그게 아니었다. 할머니가 할 일이었다. 그리하여 강아지 이름은 ‘러키’가 되었고 이름을 지어 주는 할머니의 삶은 과거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행운일 것이다.
명명(命名)이란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입니다. 고은 시인의 말씀 중에 들었던 건데 이름에는 저녁석 자 밑에 입구 자가 놓여 있습니다. 이름은 환하고 밝은 상태에서는 별로 사용되지 않는 것입니다. 눈짓 손짓 발짓 따위로 통하는 곳에서는 없어도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해가 기울고 저녁이 되면 동네 아이들의 목청이 높아집니다. 친구들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로 마을 어귀가 가득 차지요.
이렇게 어두울 때 명백히 존재하는 것이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을 때 김춘수의 시에 ‘처음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내가 꽃이라 불러 주니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하는 것처럼 누구가의 명명에 의해서 의미를 되찾습니다.
- 김형수, 《삶은 언제 예술이 되는가》
처음 강아지가 찾아왔을 때 할머니는 강아지가 배가 고프다는 것을 척 보고 알았다. 할머니들은 누가 배가 고픈지 귀신같이 안다. 그래서 할머니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밥은?”인 것이다. 이렇게 밥을 챙겨 주면서도 집 안으로 들이지 않고 이름을 지어 주지 않은 것은 강아지가 일찍 죽는 것이 두려워서였다. 온 마음이 강아지에게 가 있으면서도 말이다.
할머니의 두려움은 이별이다. 더 이상 이별은 싫고 그래서 의자, 침대, 자동차 같은 익숙한 물건들에 이름을 지어 주고 친구처럼 살뜰히 챙겨 준다. 하나같이 할머니 구역 안에 있는 식구들이며 불편하지 않은 존재들이다. 살아있는 것이 아니니, 죽을 일도 없고 이별도 없고 이별이 싫은 할머니에게 딱 좋은 친구들이다. 예측 가능하고 안전한 친구들.
하지만 강아지는 할머니 집 안의 물건들과 다르게 할머니 집 밖에서 왔다. 할머니 집 밖의 세상에서.
이름을 불러 주는 일, 그리고
난 47년을 서울에서 살았다. 그리고 대전에 내려온 지 8년이다. 내려올 때 서울에 두고 오는 것이 너무 많았다. 서울 구석구석이 익숙했다. 책 사는 곳, 옷 사는 곳, 머리 하는 곳… 내가 만들어 낸 단골들은 어쩌지. 무엇보다 친구들이 다 서울에 살았다. 친구들을 두고 오는 것은 다시 사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었다. 일 년간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내려온 나에게 더 이상 새로운 친구는 없었다. 마흔일곱에 새로운 친구라니… 낯설었다.
대전에서의 8년. 난 이제 서울에 자주 가지 않는다. 대전을 떠날 것이라는 생각은 서울을 떠날 때만큼 큰일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지난 8년 대전 생활에서 가장 행복했던 일은 새로운 친구를 사귄 일이다. 새로 문을 연 대안학교에서 함께 아이들을 만나면서 어려운 시간을 함께했던 동료 교사는 친구가 되었다. 시골에서 자라 시골에서 살고 있는 친구는 나에게 선생님과 같은 커다란 친구였고 가장 힘든 일 앞에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친구가 되었다. 마흔일곱 살은 친구를 사귀는 나이가 아니라는 내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 또 다른 곳으로 가더라도 나는 새로운 친구를 사귈 것이다. 아마 늙어 죽는 순간까지 말이다. 이제야 알았다.
할머니도 이제야 알았다. 강아지가 사라진 다음에야 강아지가 친구였음을. 다만 강아지는 이름을 짓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 친구다. 친구는 이렇게 어느 날 내 삶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이다. 진짜는 안에 없다. 밖에 있다. 밖에서 들어와야 한다. 강아지처럼.
함께 그림책을 읽는 모임에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는 울타리. 그러니까 경계선 너머 안과 밖의 경계를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그러면서 우리들 누구나 눈감고 싶은 현실이 있고 그때 가장 좋은 방법이 회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장 쉽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방법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할머니뿐만 아니라 그래서 나도 행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할머니는 달려간다. 할머니의 인생이 친구들 덕분에 행운이었음을 알고 강아지에게 멋진 이름을 지어 준다. 작가는 책 앞에서 이 책을 ‘이름’들에게 바치고 있다. 어디 이름이 이름일 뿐일까만은 이름 그 자체로도 충분하다. 이제 할머니는 더 열심히 이름을 지어 주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는 한 할머니는 늙었으나 늙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 옆에는 아름다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소중한 이름들이 있으니까.
이렇게 이름 짓고, 서로 이름을 불러 주는 그 과정이 삶인가 보다. 기꺼이 내 안의 두려움을 만나는 일이다. 두려움을 만나지 않겠다는 것은 살았으나 죽은 것이다. 난 지금 어떤지 모르겠다.
지혜로운 내 친구가 말했다. 인생은 수천 강아지와의 만남이라고, 그리고 강아지는 만나게 되어 있다고. (김영미 작가)
* 《그림책이면 충분하다》(양철북, 2018)에
실린 글을 저자와 출판사의 동의를 얻어 게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