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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2호] 포근한 봄기운에 몸빼바지 입고 춤이라도
포근한 봄기운에 몸빼바지 입고 춤이라도
칼럼_만유인력 책방 이야기(김연희)
잘 지냈나요? 다들 평안하게, 건강하게, 에브리바디 오케이? 포근한 봄기운에 몸빼바지 입고 춤이라도 추고 싶지만 바깥에는 미세먼지 자욱하고 집에는 아무도 없고… 하릴없이 물구나무서기라도 하고 싶은데 오… 몸이 안 따라 주는군요. 헛헛한 맘을 뜨끈한 옥수수차로 달래며 책방 일지 소개합니다. 지면이 짧아서 여전히 작년 여름께, 책방이 갓 열린 때의 이야기들입니다.
2017년 8월 9일 그리고 8월 10일
집에 있던 나무 벤치를 책방으로 옮겼다. 옮길 때 막쿱(책방지기 가족이 거주하는 ‘만리동예술인주택’ 줄임말)의 캐리어를 사용했는데 책방 문 앞에 세워 둔 그 캐리어가 갑자기 데굴데굴 내리막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어? 어! 어! 어! 어!” 나와 선율이가 외마디 비명만 지르고 있을 때 한받이 달려가서 캐리어를 잡아왔다. 덕분에 한받은 맞은편 슈퍼아줌마한테 한소리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무지 위험했던 것이, 캐리어가 내달리던 그 길로는 수시로 사람과 오토바이, 자동차, 마을버스가 다니기에 캐리어에 사람이 다치든 캐리어가 오토바이나 차랑 부딪쳐 박살이 나든 대형사고가 벌어질 가능성이 다분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아주 예외적으로 캐리어와 한받은 무사했다. 그러니 혼이 나도 싸고, 오히려 기쁜 일이다.
한받은 캐리어를 막쿱으로 되돌려 주러 올라가고, 간 김에 청소와 빨래까지 해치우고 돌아왔다. 요새 한받이 표정이 좀 어둡, 침울한 것은 어쩌면 가정 일에 너무 붙잡혀 있기 때문 아닐까. 내가 바라던 모습으로 한받이 성장(?!)하고 있는데 왜 나는 자꾸 한받의 눈치를 보게 되는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지루한 여름방학을 책방에서 보내고 있는 선율이는 엊그제 밤에 놀러온 지로 삼촌 같은 사람이랑 책방을 넘나들며 짜릿한 비명을 지르며 숨바꼭질이라도 했으면 하겠지만 그런 삼촌은 지로 삼촌뿐이다. 엄마아빠는 책방 일에 바쁘고 툭하면 신경질 내고. 그러면서 티브이도 못 보게 하고. 내가 선율이라면 데모라도 벌일 것 같다.
그렇지만 나와 한받의 지난 여름방학을 생각해 보면 엄마아빠가 집에 있는 것만도 어디냐며 다시금 선율이를 억지로 납득시키려고 하게 된다. 선율이는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내서는 안 되는데. 어느덧 우리는 우리 유년기를 떠올리며 선율이가 더 행복해지고 즐거워지는 걸 억누른다(아. 또 반성문이 되어 가나).
아무튼 점심 먹고 급피곤한 몸을 일으켜 선율이랑 또박또박 로운이를 데리러 갔다. 다 같이 ‘빈차’를 타고 서대문자연사박물관에 갔다. 박물관은 그다지 볼 것이 없었고 애들은 바깥에서 노는 걸 더 즐거워했다. 공룡 뼈처럼 길고 구불구불한 미끄럼틀을 선율이는 스무 번 넘게 타고 로운이는 내 손을 잡고 난간을 오가며 놀았다. 차가 있는 사람들은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타고 자기 집 주차장으로 가겠지. 우리는 차가 없으니까 걸어서 내려가서 또 ‘빈차’를 탄다.
빈차의 ‘빈’자는, 가난하다는 뜻의 ‘빈’자일까. 귀빈할 때의 ‘빈’일까.
정말 가난한 사람은 ‘빈차’를 못 타겠지. 우리는 모두 ‘귀빈’으로 이 세상에 내려왔는데…
차를 타고서 환경운동 다니는 것을 비판하시던, 벌레와 쥐와 같이 한방에서 주무시던, 그것들을 다 예뻐하고 애처롭게 여기시던 권정생 선생님 생각이 난다.
나도 때가 되면 선생님 계시는 곳으로 가겠지. 그때는 정말로 ‘빈차’를 타고 싶다. 박물관에 다녀오니 선배님이 와 계셨다. 내 생각보다 한 시간 먼저 오시는 바람에 원래 없던 정신이 더 소멸되어서 책값도 계산을 안 하고 책을 주섬주섬 담아 건네고 뒤늦게 깨닫고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계산하고 그랬다. 자꾸만 날아가 버리려는 정신 줄을 간신히 잡고 어색하게 앉아서 얘기를 나누는데 저만치서 환하게 웃으면서 선배님 또 한 분이 오셨다.
이 언니도 빈약한 책장에서 기어이 몇 권 뽑아들고 사시겠다며, 현금을 빌려서까지 책을 사 주셨고 나중에는 충정로 일대 유일한 맛집인 호숫집에서 저녁도 사 주셨다. 기꺼이 사 주신 두 선배님 덕분에 현금이 하나도 없던 우리는 무사히 싱크대를 들여놓을 수 있었다.
저녁을 먹으며 선배님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귀를 기울이고 어떤 식으로든 책방 운영에 대한 힌트를 얻으려고 애썼다. 모든 책을 다 갖다 놓기보다는 특징 있는 서점으로, 한 분야에 집중해 보라는 조언과 적자를 어느 선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계산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깊이 다가왔다. 나는 첫 달부터 흑자를 보고 싶은데 그건 아무래도 불가능한 일이겠지?
전 직장 상사가 암에 걸렸을 때 일을 그만두고 간병한 선배의 이야기도 마음에 남았다. “그 사람은 자기 영혼으로 경영했어”라는 말에 순간 생각이 멈추는 것 같았다. 영혼으로 경영한다는 것이 무얼까? 자기 영혼을 들여서 경영한다는 것이…두 선배와 헤어지고 서둘러 돌아와 보니 우리 집 세 명은 윗집에서 주문한 음식이 1층으로 잘못 왔고, 그 음식을 내가 주문해 준 줄로 착각하고 잘 먹었다고 한다. 그렇담, 윗집은 식사를 어떻게 했을까. 아무튼 먹었다니 다행이라고 했다.
중고로 산 싱크대 꼴이 하도 험하여 셋을 보내고 혼자 남아서 자정이 되어 가도록 닦고 또 닦았다. “다 했다!” 하고 베란다 문을 무심코 열었더니 물바다였다. 왜??? 너무 지쳐서 그냥 모르겠다 하고 집으로 왔다.
다음 날. 새벽에 보니 한받이 집에 없었다. 베란다 물바다를 해결하러 갔나 보군, 하고 생각했지만 한받은 물바다는 아랑곳 않고 태연히 자기 음악작업 중이었다. 차오르는 감정을 아침부터 애써 억누르며 집에서 싸 온 딸기잼샌드위치로 온 식구가 책방에서 아침 먹는다.
로운이를 데려다 놓고 베란다 물바다 해결할 생각에 캄캄하고(나중에 보니까 한받의 짐이 배수구를 막고 있어서 그런 거였다. 한받의 짐은 끝이 없고 현재도 늘어나는 중) 좀 싸돌아다니고 싶어서 영화도 보고 비도 맞고 책방에 돌아가니 그 사이에 또 선배님 한 분이 친구랑 다녀가셨다고. 선물로 드려야 할 내 시집을 사 가며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명함을 건네셨다고 한다. 고마운 분들 덕분에 힘을 받고 버티어 간다.
그밖에는 온종일 아무것도 팔지 못했다. 첫 달부터 적자를 면하려면 월세 내는 날까지 열흘간 개업 후 지금까지 판 것의 두 배쯤 더 팔아야 한다. 아무래도 적자를 면하는 일은 힘들겠지.
그렇겠지? 그래도… 그래도!
2017년 8월 16일
책장과 화분, 거울진열대… 거의 모든 집기의 위치를 바꿔 봤다. 책장의 지지대 역할을 해 주는 벽돌 구멍에 어쩐 일인지 거미줄이 엉겨 있었다.
가운데 큰 테이블에 스테인을 드디어 칠했다. 비싸서 작은 통 하나를 얇게 덧발랐다.
역시 비싼 게 좋은 건가. 냄새도 안 나고 금방 마르고. 이웃 둘이 다녀갔다. 삼각형 구도로 얘기를 나눴다. 다시 떠올리니 정작 재밌는 얘기만 삼각형 구도로 살살 피해서 나눈 것 같다. 아이들을 남편이 데려오고, 책방에 있던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올라간다.하루 종일 아무것도 팔지 못했다. 아무것도 벌이지 않으면 아무도 오지 않는 건가.자정 넘어 들어온 한받은 재밌는 영상을 보여 주겠다며 컴퓨터를 켠다. 선율이랑 로운이가 ‘당인리선’* 할 시절 영상인데 아마도 선율이 다섯 살, 로운이 세 살인 것 같다. 지금 제 동생보다 어린 선율이는 아주 귀엽다. 로운이도 아주 귀엽다.
세상에. 이 귀여운 애들이랑 허송세월만 한 것 같다. 예쁜 애들을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고. 그러나 예쁜 애들을 키우느라 기쁘고 즐거운 일이 더욱 많았을 텐데 이 엄마는 얼마나 투덜투덜댔는고.
다시 생각해 본다. 지금이라는 자리. 책방은 비었고, 나는 빈차를 타지 않고, 주로 사람들이 많이 타고 있는 버스나 지하철을 탄다. 안 빈 버스. 안 빈 지하철.
지금이라는 자리는 안 비어 있고 가득 가득, 그득 그득이다. (6월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