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32호] 내손이 약손이다

내 손이 약손이다

칼럼_너희들은 자란다(이명훈)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남겨 준 유산들 중 하나는 돌잔치 때 입었던 옷이다. 돌맞이 옷으로 당신이 마련한 것인데, 당시는 옷이 귀한 탓에 품을 크게 해서 여러 해를 입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 옷을 어머니는 고이 간직하다가 내가 결혼을 하고 나서 물려주셨다. 아내는 그 옷을 장롱 한 곳에 챙겨 두었는데, 계절이 바뀌어 철에 맞는 옷을 준비하거나 꺼낼 무렵이면 옛 앨범을 들춰 보듯이 그 돌맞이 옷을 만져 보곤 한다.
돌맞이 옷감은 ‘코르덴’이라고 ‘우단으로 굵거나 가는 골로 짠 직물’이다. 속된 말로 ‘고리땡’으로 만든 웃옷이다. 옷의 길이는 내 손으로 두어 뼘 남짓이니 내 몸이 저리도 작았던가 싶다. 그 옷은 진자주빛의 붉은색 계통이다. 돌잔치에서 빠질 수 없는 떡이 수수팥떡이다. 이 떡은 수수가루로 자그마한 알을 만들고 팥의 붉은빛 고물을 그 알에 굴려 묻혀서 만든다. 팥의 붉은색은 건강을 기원하고 액운을 막는 마음이 담겨 있다. 동짓달 붉은색의 팥죽이 건강을 지켜 주고 액운을 물리친다고 믿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어머니가 물려준 또 하나의 유산은 내 기억에 안에 있다. 감기(당시에는 고뿔이라고 함)에 걸리거나 배가 아파 앓아 누워 있을 때마다, 어머니는 ‘내 손이 약손’이라는 주문을 반복하며 아픈 곳을 쓰다듬어 주었다. 감기약을 사서 먹일 수 없는 상황이니 어머니는 전통의 민간요법에 따라 약 대신 당신의 ‘손’을 써야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은 가뿐해지고, 언제 끙끙 대며 앓았던가 싶게 동네 아이들과 들로 산으로 나돌아 다녔다.
어머니의 손은 늘 거칠고 손마디가 뭉툭하게 튀어나왔다. 호미질 등 과도한 농사일에 다섯 손가락의 관절 마디마디는 굵게 올라와 있었다. 손이라기보다는 거친 농기구에 가까웠다. 그러한 어머니의 손이 내 이마나 배에 닿을 때 결코 보드라운 손길일 수 없었겠지만, 촉감은 보드라운 솜털인 듯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러면 불덩이처럼 펄펄 끓던 이마의 열은 당신의 손길에 맥을 못 쓰고 내려간다. 시나브로 몸은 가뿐해진다. 사경을 헤맬 때 마다 나를 낫게 한 어머니의 그 손에는 생명을 살리는 에너지가 있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곳 센터에서 함께 일하는 선생님이 엊그제 학생과 함께 계족산 정상까지 산행을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아이는 센터의 생활에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있기보다는 혼자 있는 것을 더 편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누군가 낯선 사람이 등장하면 다소 긴장하고 두려워하기도 한다. 친구들과 관계 맺음이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외톨이에 가깝다. 이 아이와 산을 올라가면서 선생님이 먼저 손을 내밀어 손을 잡고 걸었다. 때로는 뒤에서 밀어주며 정상까지 올라갔다. 올라가는 동안 간간이 숨을 돌리고 바위와 나무를 관찰하기도 하고 바람 소리를 몸으로 느끼며 산하에 온몸을 내맡기기도 하였다. 눈 아래로 펼쳐지는 도시의 정경을 한눈에 담아 놓고, 내가 놀던 곳 내가 살던 집이 어디쯤인지를 눈길로 가늠해 보기도 하였단다.
평소의 생활습관은 칩거형이니,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기껏 방에 콕 박혀 텔레비전을 보거나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마냥 누워서 공상에 잠긴다. 잘 움직이지 않으니 걸을 때에는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다. 오랫동안 그런 생활습관에 젖어 있음에도 힘든 등산로를 따라 마침내 정상에 올랐으니 뿌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겠다. 조심스레 하산을 하는데 아이는 먼저 손을 내밀어 선생님의 손을 잡았다고 한다. 산을 다 내려 와서 걷는 동안에도 그 아이는 선생님의 손을 놓지 않고 미주알고주알 이야기보따리를 술술 풀어냈다고 하니 얼어붙은 그의 마음이 봄기운처럼 따뜻해졌음이 분명하다.
그 선생님이 내민 손이 어머니의 약손이다. 어머니의 손에는 수많은 혈관들이 모여 있고, 그 혈관에는 철분 성분의 헤모글로빈을 포함한 적혈구가 흐르고 있다. 철분이기에 자연스럽게 전기장도 생겨난다. 이러한 에너지의 흐름을 담은 어머니의 ‘손길’에는 물리적 에너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내어 함께 걷고, 산을 오르고 자연의 풍광을 느끼는 것, 이 모든 것에는 사랑이 담겨 있다. 논일과 밭일로 바쁜 틈 사이에 어머니가 시간을 내어 내 이마를 쓰다듬어 준 것에는 진자주빛 붉디붉은 사랑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 사랑의 에너지가 면역력을 높여 주는 원천이 아니었겠는가.
사랑의 이미지는 온통 붉은색이다. 나의 돌맞이 옷도, 액운을 물리치는 팥죽도, 아이에게 손을 내미는 선생님의 마음도 온통 붉디붉은 색이다. 어머니의 약손에는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이 흐른다. 내가 살아가는 힘은 그 손길이 만들어 낸 에너지에서 온 것이다. 이곳 센터는 일찍이 어른만큼이나 많은 사연과 상처를 가진 아이들이 들어와서 함께 공부하고 상담하고 기숙하는 생활공동체이다. 이 아이들이 선생님의 약손으로 힘을 얻어 몸과 마음의 건강을 회복하여 건전한 사회인으로 나아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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