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32호] 긴 연기 인생에 몇 번의 변화가 찾아오다



긴 연기 인생에 몇 번의 변화가 찾아오다






시대의 흐름을 타고 오르내렸다

“연기를 시작한 지는 벌써 25년도 더 됐죠. 국악에 빠지기 전부터 연극, 영화판에서 활동했어요.”
연기가 좋아 줄도 없었던 극단에 무작정 찾아갔다. 서울예전 출신 배우들이 활동하던 극단에서 열심히 실력을 쌓다 보니 이례적으로 학교 출신도 아닌 송상헌 씨가 주인공을 맡게 됐다. 연극 <신인부부>는 연기 인생의 출발점과도 같았다. 연극은 해를 넘겨서도 막을 올릴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활발한 활동 덕분에 송상헌 씨도 조금씩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고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대한민국 영화 산업이 부흥하던 시기, 영화판에 발을 들여놓을 기회가 생겼다.
“첫 영화인 <위기의 여자>에 출연하며 연극연기와 영화연기가 많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어요. 목소리도, 모션도, 표정도, 영화는 연극과 다른 매력이 있었더군요. 공부해야 할 것이 여전히 많다고 생각했죠. 착실히 영화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몇 편의 영화에 더 이름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연극 무대에서 관객과 나눴던 호흡 때문일까. 몇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연극 무대를 잊을 수 없었다. 다시 연극을 해야겠다는 마음에 연극판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업계는 낯설게 변해 있었다. 당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며 문화발전을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기 시작하자 비교적 안정적인 수입이 생긴 극단들이 조금씩 들썩였다. 정부 예산을 받은 연극계에 속도가 붙었고, 젊은 배우들이 무대에 대거 포진하기 시작했다. 송상헌 씨는 경력이 짧은 젊은 배우들이 무대를 장악한 연극계에서 조심스레 비껴 나갔다.


진솔하고 투명한 웃음이 만든 무대
  연극에서 마당놀이로 무대를 옮겼다. 매일같이 서울 집 인근에 있는 고덕산에 올라 움막을 짓고 창과 악기를 연습하기 시작했다. 장구, 북, 태평소 등 마당놀이에 필요한 악기라면 닥치듯이 배워 나갔다. 15년 동안 산을 집 삼아 살다시피 했다. 외롭고 힘든 순간도 여럿이었다. 집안 행사에 못 가는 날도 있었고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순간도 있었다.
길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15년의 노력은 송상헌 씨를 잊지 않았다. 국악인들과 교류하던 중 KBS 국악한마당 무대에 오를 기회가 생겼고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매주 무대에 올라 다시 관객을 만났다.
마당극에 빠지게 된 건 우연히 광주비엔날레를 찾으면서부터다. 어린아이 2~300명이 관객으로 광주비엔날레를 찾았다. 송상헌 씨는 그 무대에서 처음으로 ‘웃음만발’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극을 관람하던 아이들이 연극 내내 기가 막히게 웃어 댔다. 어른의 웃음과는 다른 진솔하고 투명한 웃음이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매료된 그는 본격적으로 마당극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마당극을 준비하면서 서울에서 대전으로 내려왔어요. 극단 ‘송상헌의 마당극’을 창단한 건 4년 전이고요. 극단 준비는 8년 정도 했습니다.”
서울 단막극장에서 일하던 당시, 대전 출신 배우가 수습으로 극단에서 활동하는 걸 봤다. 대전 사람인데 왜 서울에 와서 보수도 받지 않고 활동하는지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대전에는 설만한 무대가 없어요”였다. 송상헌 씨는 대전에서 설 만한 무대를 만들어 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날의 대화는 배우로서 은퇴한 후 대전에서 자리를 잡을 생각이었던 그의 계획을 더 견고히 만들었다.
“그 친구한테 대전에서 극단을 만들테니 내려오라고 했죠. 근데 안 왔어요(웃음). 젊은 사람은 대전보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걸 더 기회로 생각하니까요.”


세상천지 돈 벌자 판이지만 욕심이 난다

마당극을 위해 대전에 내려왔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셈이었다. 대전에서 어떤 작품을 올려야할까, 대전에서 막을 올리는 공연들을 조사했다. 대전은 생각보다 연극으로 생계를 이어 가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활발한 공연을 위해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연극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오랜 고민 끝에 블랙코미디인 우리 전래 이야기에 가락과 춤을 얹은 송상헌의 마당극 대표작품 <흥부와 놀부전>이 탄생했다.
작품 구상보다 더 큰 어려움은 단원 모집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마당극에 선뜻 지원하는 젊은이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젊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까. 고민 끝에 난타 수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수업이 조금씩 입소문을 타면서 젊은 친구들이 난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송상헌 씨는 수업을 듣는 학생이 마당극에 관심을 갖고 단원으로 참여하기까지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1년만 지켜보자고 마음먹었어요. 세상천지가 돈 벌자 판이잖아요. 여전히 예술로 돈 벌기가 힘드니 학생들이 돈 벌러 간다고 떠나기 시작했어요. 서러웠죠.”
돈을 찾아 젊은이들이 떠나고 무대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송상헌 씨는 생각을 바꿔 당시 주민센터에서 난타 수업을 하며 만난 주부들에게 극단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관심을 보이는 학생 몇몇이 단원으로 들어오며 극단은 조금씩 생기를 찾아갔다.
“그래도 극단이 조금씩 이름을 알리면서 요즘은 젊은 단원이 많이 들어왔어요, 단원 연령대가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해요. 3년 동안 가르친 아이도 단원으로 활동하고요.”
요즘 송상헌 씨는 대전과 충청 지역을 돌며 활발히 공연을 선보인다. 극단은 조금씩 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지만 그래도 여전히 욕심이 난다.
“지금 바라는 건 더 많은 관객을 만나는 거죠. 더 많은 관객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습니다. 지역에서 마당극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아요. 지역 공연이라는 선입견도 해결해야 할 문제고요. 그래도 지역에서 문화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전심을 다해 봐야 하지 않겠어요?” 








글  오시내

사진  오시내, 송상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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