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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05호]마당극패 우금치 | 낮은곳에 펼치는 우리이야기
글 성수진
사진 마당극패 우금치 제공, 성수진
사진 마당극패 우금치 제공, 성수진
판에 선다. 마당극패 우금치 단원들은, 1990년 창단 이래 끊임없이 판에 섰다. 시장, 광장, 공원 등 단원들이 설 수 있고 관객이 빙 둘러앉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다. 그곳에서 둘러앉은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마당극을 선보인다. 때로는 누구보다 크게 울고 때로는 누구보다 크게 웃는다. 관객은 자신 바로 앞에서 울고 웃는 배우를 함께 사는 이웃으로 받아들인다. 판에 펼쳐지는 마당극 역시, 관객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
마당극패 우금치의 탄생
“마당극은 열려 있어요. 전체 구조도 열려 있고 관객과 배우 사이도 열려 있어요. 배우도 그때그때 관객에게 다가갈 수 있는 부분이 있고요. 관객도 배우한테 몰입해서 들어올 수 있는 부분이 있어요. 여기서 생기는 에너지가 매력적이에요.” 김시현 기획실장이 마당극의 매력에 관해 이야기한다. 대학생 시절 탈반(탈춤 동아리) 활동을 하며 몸을 움직이는 법과 장구 장단을 배우며 시대와 역사에 대해 새롭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우금치 마당극을 접했다. 이 멋진 세계에 좀 더 깊게 발을 담그기 시작해 2001년, 마당극패 우금치(이하 우금치)에 입단했다.
“내가 한 마디 던졌을 때 관객들이 웃어 주면 짜릿하죠. 내가 울 때 관객이 같이 울어 주는 그런 교감이 있어요. 교감 속에서 관객 반응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도 있죠. [청아청아 내딸 청아]에서 심 봉사가 관객 쪽에 가서 젖동냥을 하는 부분이 있어요. 아기 인형을 건네면 보통 옷 겉으로 젖을 주는 시늉을 하시는데, 한 할머니가 옷을 젖히고 젖을 주시려는 거예요. 처음 있는 일이라 당황해서 그 배우는 멈칫했고, 옆에서 보고 있는 배우들과 악사들은 웃느라고 쓰러졌죠.”
마당극을 펼치는 마당극패 우금치는 1990년에 창단했다. 전신은 1985년에 만들어진 놀이패 얼카뎅이다. 당시, 농민들에게 풍물을 가르치거나 함께 연극을 만들었다. 대중 앞에서 시대적 상황을 풍자하는 풍자극도 선보였다. 1988년쯤에 지역의 여러 문화예술인이 참여하는 대전충남문화운동협의회가 만들어졌고 그 속에 놀이패 얼카뎅이가 있다가 1990년에 우금치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우금치 대표이자 예술감독인 류기형 대표는 얼카뎅이 시절부터 우금치의 역사를 지켜봤다.
“우금치는 동학농민운동 최후의 항전지예요.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그들의 의지를 기리는 의미로 ‘우금치’라는 이름을 정했어요. 창단하고 농촌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농민들의 애환을 마당극으로 풀어냈어요.”
“내가 한 마디 던졌을 때 관객들이 웃어 주면 짜릿하죠. 내가 울 때 관객이 같이 울어 주는 그런 교감이 있어요. 교감 속에서 관객 반응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도 있죠. [청아청아 내딸 청아]에서 심 봉사가 관객 쪽에 가서 젖동냥을 하는 부분이 있어요. 아기 인형을 건네면 보통 옷 겉으로 젖을 주는 시늉을 하시는데, 한 할머니가 옷을 젖히고 젖을 주시려는 거예요. 처음 있는 일이라 당황해서 그 배우는 멈칫했고, 옆에서 보고 있는 배우들과 악사들은 웃느라고 쓰러졌죠.”
마당극을 펼치는 마당극패 우금치는 1990년에 창단했다. 전신은 1985년에 만들어진 놀이패 얼카뎅이다. 당시, 농민들에게 풍물을 가르치거나 함께 연극을 만들었다. 대중 앞에서 시대적 상황을 풍자하는 풍자극도 선보였다. 1988년쯤에 지역의 여러 문화예술인이 참여하는 대전충남문화운동협의회가 만들어졌고 그 속에 놀이패 얼카뎅이가 있다가 1990년에 우금치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우금치 대표이자 예술감독인 류기형 대표는 얼카뎅이 시절부터 우금치의 역사를 지켜봤다.
“우금치는 동학농민운동 최후의 항전지예요. 새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그들의 의지를 기리는 의미로 ‘우금치’라는 이름을 정했어요. 창단하고 농촌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농민들의 애환을 마당극으로 풀어냈어요.”
세상의 중심은 ‘아픈 곳’
"1990년대 초반 당시, 농촌의 이슈는 생산비 보장, 쌀 수입 개방, 우루과이라운드 등이었다. 몰락하는 농촌의 상황이 사회 문제로 대두하면서, 우금치는 농촌의 장날이나 관련 집회 현장에서 선전극을 펼쳤다. “집회에서 공연하다가 전경들한테 붙들려 간 적도 많죠. 집회할 때 행진을 하면 늘 풍물패를 앞세워요. 그런데 우리도 두렵잖아요. 전경들이 최루탄을 쏜다든지, 곤봉으로 때린다든지 하는 일이 많았죠.”
류기형 대표가 회상하는 1990년대 초반에서 20년이 더 지난 지금, 달라진 것은 없다. 오히려 후퇴했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는 요즘 시국을 보면,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는 건지, 묘한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그리고 1990년, 공연 중에 최루가스가 들어온 줄 알고 놀랐던 기억을 떠올린다. “전국농민회총연맹에서 벌이는 추수대동제에 참여했어요. 행사장인 경희대학교 크라운관에 들어가는 과정부터가 마치 극 같았어요. 경희대 주변을 경찰이 원천 봉쇄해서 주변에 개인 집들을 통해 갔어요. 삼삼오오 팀을 나누어서 가이드 역할을 하는 사람을 따라갔죠. 손에 소품 보따리를 들고서요. 몇은 검문에 걸려서 소품을 뺏기기도 했어요. 그렇게 어렵게 행사장에 들어가서 마당극을 시작했어요.”
당시 크라운관에서 펼친 극은 그 시대 농촌 현실을 담아낸 <호미풀이>이다. 주인공 덕구는 비관 자살 소동을 벌이며 문 하나를 놓고 어머니와 실랑이를 한다. 어머니는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라고, 덕구는 들어오지 말라고 죽겠다고 절규했다. 그때, 갑자기 실내가 연기로 자욱해졌다. 단원들은, 최루가스가 들어온 줄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머지않아 그 연기는, 자리에 앉아 극을 지켜보던 농민들이 피운 담배 연기라는 걸 알게 됐다. 눈물을 흘리며 담배를 태우던 농민들의 얼굴을, 단원들은 잊지 못한다. 우금치는 지금껏 다양한 창작극으로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하고,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펼치려 노력했다. 창단 초기에는 문화 선전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면, 지금은 대중의 공감을 사는 극으로 마당극의 매력을 더 많은 이에게 알리고 있다. 농민극뿐만 아니라 고전, 설화를 각색하고 거대 자본, 여성, 노인, 다문화 등 다양한 사회 문제를 풍자한다. 예나 지금이나 류기형 대표는 세상의 중심이 ‘아픈 곳’이라고 생각한다.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게 우리 지향성이에요. 차별과 편견 없이 어울려 사는 세상을 지향하고 이런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작품을 만들어서 사람들과 나누는 게 목표예요. 저희가 가지고 있는 연행 양식 속에 그것을 담아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있다고 생각해요.”
다가올 판을 기대하며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에 형성됐던 마당극은, 197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틀이 잡히고 활동이 왕성했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이후 쇠퇴의 길을 걷는다. 마당극의 정보전달 기능은 마당극만이 지닌 역할이 아니게 되었고, 이쯤에 수입된 사회주의권 연극도 마당극의 쇠퇴에 영향을 주었다. 그 과정에서 전통의 맥을 계속 붙들고 있었던 우금치는, 많은 마당극 단체들이 사라지는 동안에도 살아남았다. “농촌 현장에 중심을 둬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전통적 소재로 사람들과 만나온 거죠. 그러다 보니, 다른 단체들이 변화를 겪을 때 저희는 그동안 가져 왔던 색채를 강화했어요. 지금도 다른 단체보다 전통적 연행의 방식이 탄탄하다고 생각해요.” 류기형 대표는, 앞으로도 우금치가 그동안 해 왔던 것만큼 잘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원형 판에서 펼치는 마당극의 연행 방식에 그 힘이 있다고도 생각한다. 원형 판에 관객이 빙 둘러앉아, 관객과 배우, 관객과 관객이 평등한 시선을 확보하고 일체감을 느끼며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마당극만의 매력이다. 우금치가 벌이는 마당극의 내용적 측면 역시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쉽고 재미있고 감동적인 내용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다.지난 25년간, 우금치가 계속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에는, 운영 방식의 영향도 컸다. 우금치는 열여덟 명 단원 누구나 운영, 재정 구조를 알 수 있는 동인 체제로 운영한다.
“저희처럼 출근해서 훈련하는 연극 단체는 거의 없어요. 생존을 위해 다른 직업을 가지고 하는 경우가 많죠. 저희는 출퇴근을 하면서 온종일 내부 훈련을 해요. 급여 시스템도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고요. 재정도 투명하게 공개돼요. 초청 공연을 다녀오면 얼마를 받았고 얼마를 쓰고 얼마가 남았다는 걸 단원들에게 주 단위, 월 단위로 보고해요. 그뿐만 아니라 단원 모두의 의견이 존중되고 모두가 주인의식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구조예요. 그게 저희 단체의 가장 큰 힘이에요.”
현재, 우금치는 대흥동에 임시 사무실을 쓰고 있다. 평송청소년수련원에 상주단체로 머물다가, 건물 공사로 인해 나와 있는 중이다. 그동안 우금치는 산내, 대동, 대흥동 등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사무실과 연습 공간을 두었다. 그러다 지난해 5월, 단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대흥동의 한 건물을 매입해 우금치의 연습실, 사무공간, 공연장 역할을 하는 ‘별별마당’ 건립을 진행 중이다. 4억 원은 단원들의 개인 담보로, 2억 원은 담보 대출로 매입했다. 그리고 리모델링 공사 비용 중 일부는 우금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이들이 보탰다. 지역인사 열 명으로 구성된 ‘우금치 문화예술공간 건립을 위한 시민추진위원단’이 기금 마련을 위한 기획 공연을 펼쳤고 다음 스토리 펀딩으로 온라인 모금을 진행했다. 목표 금액에는 못 미쳤지만, 많은 이가 마음을 보태어 주었다.
우금치는 1년이면 120~150회 정도, 전국 각지에서 초청을 받는다. 몸은 고되지만, 사람들이 우금치를 기억하고 찾는 것이 단원들은 행복하다. 풍물과 소리, 춤과 연기가 어우러지고 관객과 함께하는 어우러짐이 좋아 우금치는 오늘도 판에 선다. 별별마당이 건립되면 시민과도 더 가까이 자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별별마당은 우금치에게도 시민에게도 많은 의미를 지니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울려 퍼질 소리를 단원들은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