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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1호] 도시의 어두운 기억 속을 거닐다
1989년 11월 9일, 독일 베를린 장벽이 베를린 시민들 손에 의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직접 곡괭이와 망치를 들고나와 벽을 부쉈다. 벽이 허물어지고 응어리졌던 마음도 풀어지며 사람들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눈물범벅을 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동·서독의 유일한 이동 통로였던 브란덴부르크 문이 열렸고, 서독 주민들은 비자 없이, 예전처럼 동독을 마음껏 다닐 수 있게 되었다. 1990년,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마침내 동독과 서독이 하나가 되었다. 41년 만이었다.
베를린 월 메모리얼(Berlin Wall Memorial)은 처음 베를린 장벽이 시작된 곳이라는 점에서 의미 깊은 곳이다. 장벽 일부와 녹슨 철제가 그대로 남아 있고, 장벽을 넘으려다 체포되거나 사살당한 피해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공원 곳곳에 장벽이 세워지는 과정과 탈출하는 사람의 사진이 연표와 함께 붙어 있다. 베를린 장벽은 처음 동독이 쌓기 시작해 서베를린을 동베를린과 주변 동독 지역으로부터 완전히 고립시켰다. 처음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던 당시, 사람들은 무엇이 만들어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장벽을 만들기 위해 투입된 노동자 역시 무엇을 만들기 위해 일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장벽을 세웠다.
장벽은 겉으로 보았을 때 성인 남자라면 어떻게해서라도 넘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약간의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높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벽은 희망고문 그 자체였다. 가장 경제적 높이인 3.6m로 벽을 세우고, 장벽 맨 윗부분을 둥글게 만들었다. 우리가 종종 보아 왔던 가시 철망이나 유리 조각이 박혀 있진 않았다. 공포감을 조성하지 않아, 마음만 먹으면 넘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러 둥글게 만들어 손이 미끄러져 쉽게 벽을 잡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간신히 벽을 넘어선다 해도 또 다른 벽 하나를 마주한다. 이중으로 설계하여, 도움닫기가 불가능한 거리에 중간 벽을 세웠다. 베를린 장벽은 절망 그자체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가 콘크리트 덩어리 하나로 넘어설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베를린 월 메모리얼 센터에는 베를린 장벽을 넘어가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영상과 사진으로 전시했다.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한 다양한 방법으로 월경을 시도했다. 베를린 장벽이 생기면서 5천여 명이 탈출을 시도했고, 1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멈추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내걸면서 벽을 넘었다. 권력과 힘으로 시민을 억누르려 했던 기득권층은 계속해서 사람들이 월경을 시도하자, 벽을 더 길고 두껍게 보수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결국 그들이 억누르려던 힘없는 사람들의 손에 의해 장벽은 무너져 내렸다.
II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는 세계 각국 미술 작가들의 그림으로 베를린 장벽을 채웠다. 왼쪽 작품은 드미트리 브루벨의 작품으로, 구소련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서기장과 동독의 에리히 호네케르 서기장의 키스를 표현한 작품이다.
II 베를린 월 메모리얼 센터에는 독일 분단 당시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영상을 전시해 두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세계를 전쟁의 공포 속에 몰아넣은 희대의 광인이라 불린다. 히틀러는 당시 독일인에게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전으로 인해 바닥으로 떨어졌던 자신들의 자존감을 끌어올린 영웅이었다. 그의 화려한 언변과 뛰어난 지도력에 열광했고, 많은 독일인의 지지를 받은 히틀러는 곧 독재정치로 독일 전체를 좌지우지하기 시작했다.
그는 아리아 인종 우월주의에 빠져, 모든 인종 중 가장 위대한 인종은 아리아인이며, 그중에서도 독일 민족이 가장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이를 기반으로 그의 눈엣가시였던 유대인을 증오의 대상으로 삼고 그들을 박해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대인을 전멸시키려는 목적으로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로 인해 사망한 유대인의 수는 약 6백만 명에 이른다. 유대인을 수용소에 몰아넣고 경제적 여건으로 인해 먹여 살릴 수 없다며 그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인종청소라는 끔찍한 명목하에 수많은 유대인이 실험의 대상이 되었고, 수용소 가스실에서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 끔찍한 역사는 베를린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베를린을 방문하는 관광객은 도시를 돌아다니며 나치 시대에 벌어진 부끄러운 역사를 목격한다. 독일은 과거에 벌어진 어두운 역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 전세계가 자신들의 잘못을 꾸짖게 한다.
세계적인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beskind)가 설계한 유대인 박물관 외관은 지그재그 형태로 건축했는데, 유대인을 나타내는 다윗의 별을 왜곡시킨 모양이다. 유대인 박물관은 관람객이 온몸으로 홀로코스트를 기억하고, 참혹한 고통 속에 놓인 유대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했다.
유대인 박물관 내부는 ‘연속의 계단’으로 이어져 있다. 관람자는 지그재그 형태의 건물로 인해 박물관을 관람하다 종종 길을 잃는다. 미로처럼 복잡한 동선은 당시 유대인이 처했던 혼란스러운 상황을 체험하게끔 한다. 어두운 조명과 온통 회색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무겁고 딱딱하기만 하다. 박물관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관람 내내 무거운 마음과 동행해야 했다.
이어진 길을 따라 학살당한 사람들이 지녔던 물건들을 둘러보다 보면 커다란 철문이 나온다. 이곳이 유대인 박물관의 상징적 공간인 ‘홀로코스트 타워’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거대한 철문만큼이나 두텁고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사방이 막힌 어두운 공간 안에 갇힌다. 차가운 공기와 적막으로 순간 두려움과 불안감에 휩싸인다. 외투를 입었는데도 서늘한 공기를, 유대인은 얇은 수용복 하나로 버텨 내야 했다. 어두컴컴한 이곳 천장의 작은 틈으로 얇은 빛줄기가 새어 들어온다. 이 빛줄기가 희망처럼 보이다가도 절망스럽게 느껴진다.
공백의 기억에는 이스라엘 현대 미술가인 메나쉐 카디쉬만(Menashe Kadisgman)의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입을 벌린, 사람 얼굴을 한 강철 덩어리로 바닥에 한가득 늘어져 있다. 관람객은 이 작품 위를 걸어 본다.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쩔그럭하고 날카롭고 차디찬 소리가 울려 퍼진다. 이 소리를 유대인들이 내는 고통스러운 울음소리라 말한다. 울음소리는 높게 우뚝 선 회색 벽에 부딪혀 다시 귀로 들어온다. 유대인의 울음이라 생각하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무섭고 고통스러운 소리였다. 눈과 귀로, 온몸으로 그들의 억울함과 고통, 두려움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II 테러의 토포그래피 박물관(Topography of Terror)
II 유대인 학살 추모 공원은 베를린 중심가에 있다. 커다란 관을 연상시키는 직육면체의 콘크리트 비석이 다양한 크기로 놓여 있다.
*이 여행은 공감만세에서 진행하는 ‘동유럽 청소년 인문학 여행학교’로, 와이여행협동조합 ‘소풍’과 함께한다.
여행문의|(주)공감만세 042)335-3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