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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30호] 배우 김세정을 만나다
모든 것이 조금 아쉽고, 그래서 적절한 밤이었다. 공연은 재밌었으나 완벽하지 않았고, 인터뷰를 위해 찾은 카페 마감 시간은 11시가 아니라 굳이 10시 반이었다. 마무리하러 들른 분식집 이모님들은 앞치마를 막 풀고 계셨고, 우리는 적당히 허기를 달래고 헤어졌다. 그리고 그는 연기를 시작한 지 이제 1년 반이 되었다. 어둡고 푸르던 안국역 밤거리와 약간의 아쉬움이 만든 작은 틈에, 그와 그날의 분위기가 채워졌다. 가끔 그를 만나면 일관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적당한 거리감과 적절한 따듯함, 적당한 자의식과 적절한 자존심 같은 것. 나는 그것이 윤곽이 있어 묘사 가능한 것으로 생각지 않지만, 그에게 어떤 기대를 품게 되는 좋은 근거라고 느껴졌다. 괜찮은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예민하게 애쓰는 배우의 냄새와 움직임 같은 것 말이다. 이제 막 연극 <라듐 걸>을 끝낸 그와 마주 앉았다.
2017 <탐정2> 재희 역
2017 <용이를 찾습니다> 송이 역
2017 <오래된 기다림> 인영 역
세정 공연 보고 인터뷰할 마음 없어지신 거 아니죠?
경원 무슨 소리.
세정 만 원이 아깝지 않았어요? 얼마짜리 연극이었나요
경원 9,940원 정도? (웃음)
세정 (크게 웃음)
경원 무대에 있다가 바로 내려왔으니 인터뷰하기 좋은 타이밍이에요. 지금의 느낌을 본인만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어떤가요?
세정 빙판에 서 있는 거 같아요.
경원 왜요?
세정 뭔가 곧 깨질 것 위에 잠깐 서 있는 느낌? 평소보다 안정된 상태는 아닌 거 같아서, 편안하다 느끼진 않나 봐요..
경원 오늘 공연은 어땠나요?
세정 (울상을 지으며) 망했어요. 첫 시작부터 제가 실수했으니까요. 누구 하나 실수하면 모두 예민해지잖아요? (천장 상자에서) 꽃이 안 터져서 설치 문제인 줄 알았더니, 제가 꽃을 안 넣은 거더라고요. 바닥도 미끄러웠고. 부모님도 와 계시니 계속 연기하는 제 자신도 느껴졌어요.
경원 매 순간 잘 끝낼 수 있을까 조마조마하며.
세정 동작을 하는데 심장 박동이 느껴지더라고요. 떨렸어요. 망했어요.
경원 저는 처음 보는 연극이니까 망했다고 느끼지는 않았는데,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게 눈동자에서 느껴지긴 했어요.
세정 엄청 하고 있었어요.
경원 나는 조명이랑 음악, 동작이 반복되며 시너지를 냈던 것 같아서 좋았어요.
세정 다행이다. 내일 또 보러 오실래요?
경원 내일은 좀 바쁜 거 같기도 하고. (웃음) 근데 나는 세정 씨가 이 연극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세정 왜요?
경원 예를 들어 몸을 너무 많이 혹사해서, 배우의 부모님이 온다면 안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연극들이 있어요. 표현의 일환이겠지만, 보면서 극으로 이입되는 게 아니라 저 배우가 너무 애쓴다는 느낌이 들어 가슴 아픈. 그런 연극이 배우에겐 도움이 될까 생각하면 딱히 모르겠어요. 매회 심적으로 어떤 상흔이 남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작품을 할 때 상처가 남는 것과 굳은살이 남는 것은 다른데, 이 연극은 약간 굳은살 쪽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쁘지 않았어요.
세정 여러 모로 굳은살이에요. 제가 몸치인데, 처음 연습 때랑 비교하면 엄청 발전한 거예요.
경원 연습을 많이 했다는 것도 느껴졌어요.
세정 근데 매일 연습을 반복하면서 제 감정이 점점 사라지더라고요. 내공이 있다거나 테크닉이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어떻게 끌고 가야 할지 몰랐어요. 그러고 보면 제가 여태껏 연기한 거 같지 않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냥 내가 느꼈음 직한 감정을 목소리와 말투로 표현했던 거지, 기술적으로 해내는 데엔 무지하니까 어렵더라고요.
경원 현재까지는 그런 방식으로 해 왔을 수 있죠. 근데 왜 ‘굳은살’이라는 표현을 했냐면, 1년 반 전엔 대부분 사람과 비슷한 행로를 걷던 어떤 여자가, 1년 반 뒤에 완전히 달라진 삶을 사는 모습을 보고 있구나, 신기한 선택을 했고 다져 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리고 1년 반 뒤엔 또 어디로 어떻게 가고 있을지 궁금해지는 시간이었달까?
세정 그렇게 봐 주셨다니까 감회가 새롭네요.
경원 근데 자기 자신은 낯설지 않아요?
세정 제가 연기하고 있는 게요?
경원 연기하는 인생을 사는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것. 그게 보통 약간 시간이 걸리는데.
세정 걸렸어요. 처음에 연기를 시작하게 된 것도 ‘배우가 돼야겠어’라고 시작한 게 아니었어요. 이전에 살던 삶은 아닌 거 같았고, 그러면 내가 가장 흥미롭게 했던 게 뭐였는지 생각했을 때 배우를 꿈꿀 때의 나였죠. 그래서 취업준비도 놓치지 말고, 6개월만 해 보자 생각했어요. 처음 연기학원에 다녔을 때는, 오래전 꿈꾸다 내가 고장 난 채로 녹슬어 버렸다고 느껴졌어요. 남들 앞에 서는 것도 부끄러웠고요. 언제든 다시 취업할 수 있다고 발을 걸치고 있다가, 작년 중반 정도부터 나 스스로를 배우로 인지하고 남도 나를 배우로 인지시키자는 목표를 세웠어요.
경원 그게 왜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세정 단편영화를 찍고 연극을 하면서도 스스로 자부심이 없었어요. 나는 늘 못하는 거 같고 부족한 거 같고. 그러다 어느 날 예전 촬영한 부분과 연결을 맞춰야 해서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에 갔는데, 화면을 보여 드리면서 똑같이 잘라 달라고 했죠. 근데 직원분이 “아까 그거 무슨 화면 같은데, 뭐 하시는 분이에요?” 물으셨어요. 근데 “저 연기해요”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말하고 싶지 않아요” 하고 말을 끊었어요. 그분도 더 묻지 않으셨죠. ‘나는 알려진 사람이 아닌데, 뭐가 대단하다고’ 이렇게 생각했던 거죠. 근데 그러고 나니 내가 좀 별로인 거예요. 나 자신도 연기자로 인지 못 하고 있으면, 남들도 당연히 나를 배우로 봐 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 만다라트 계획표* 가운데에 ‘배우로 인지되고, 인지하기’라고 적었죠.
경원 동시에 부모님도 세정 씨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했겠죠?
세정 연기학원은 비밀로 하고 다니다가, 아빠랑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거든요. 약간 가슴 아프지만, 아빠는 ‘나는 이미 늙었고, 네가 그 길을 가는 데 지원 못 해 줘서 미안하고, 네 인생이니 네가 결정할 일이다’ 하셨죠. 반대하실 줄 알았는데, 사실 이렇게 된 데엔 오빠의 영향도 있어요. 오빠가 얼마 전 부산온천장 카페거리에 바를 오픈했거든요. (녹음기에 대고) 카페 이름은 cafe&bar 2t입니다! (웃음) 아무튼 오빠도 정석대로 산 사람이 아니라서, 그간 부모님이 많이 연습하신거 같아요. 마음대로 되는 부분이 아니라는 걸요. 물론 경제적인 부분에 걱정이 없진 않으신데, 저는 안심시켜 드리려 노력하고 있어요. 그게 어떤 작품이든, 그래도 일이 끊이지 않고 있으니까요.
경원 다 기억은 안 나지만 작년 8~9개 정도 되지 않아요?
세정 작년에 단편영화 열 작품 넘게 한거 같아요. 열심히 했어요.
경원 2~3년 뒤에는 전화번호가 바뀔 수 있겠네요.
세정 그래도 알려 드릴게요. 하하하!
경원 (웃음)
세정 근데 저는 학창시절에 공부를 되게 열심히 했어요. 맡은바 성실히 하는 애였는데, 친구들이 항상 안타까워했죠. 120%를 하면 80점이 나오는 애였으니까요. 늘 제가한 거보다 안 나오니까, ‘아, 능력이 모자라는구나. 그래서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하는구나’ 생각했어요. 근데 제가 연기를 할 때는 거저받은 게 너무 많았어요. 그리고 뭔가 좋은 분들도 많이 만났던 것 같아요.
경원 이 직업은 특히 운이 많이 작용하죠. 좋은 사람을 많이 만났다고 자평할 수 있는 건 매우 큰 운이에요. 근데 몇 년 뒤에는 이렇게 이상한 사람이 내 주변에 많나, 생각할 수도 있죠. 어쨌든 그건 운이기 때문에 자기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공부 머리가 있어서 80점만큼 노력하고 120%를 가져가는 친구들 있잖아요? 똑같이 세정 씨는 배우라는 직업에 이미 40%의 기질을 가지고 시작했던 거 아닐까요? 뭐랄까, 거저 받은 게 아니라 애초에 타고난 것을 쓸 수 있도록 선택을 잘한 걸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작년, 열 편을 넘게 한 건 우연이라고 느껴지진 않아요. 애초에 없는 계산이 들어간 건 아니라는 생각도 들어요.
세정 근데 제가 스펙트럼이 넓은 사람같지는 않아요. 이것도 과정을 거치면서 알게 된 건데, 당연히 모두가 날 좋아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보통 여자 감독님들이 좋아했고, 남자 감독님들 눈에 예쁜 배우는 따로 있는 거 같아요. 제가 못 봐줄 정도는 아니겠지만, 남자 감독님들 영화에서 예쁜 역할을 맡아 본 적이 없어요. 편안하고 자연스럽고 수더분한 캐릭터가 많았죠. 제가 가지고 있는 어떤 코드가 있나 봐요.
경원 같은 성이 아니기 때문에 서로 절대 모르는 영역이 있겠죠. 그래서 구분의 갈래가 한정되어 있어요. 김세정은 예쁜데 새침할까, 청순할까? 청순하다면 다른 매력이 있을까, 아니면 이미지대로 차분할까? 뭐 이런 단순 구분이죠. 본인들도 정확히 모르는 게 사실이라, 세정 씨도 그들이 자기를 잘 못 봐 주는구나 생각하겠죠. 세정 씨의 캐릭터는 더더욱 그래요.
세정 맞아요.
경원 그리고 본인이 예쁜 외모로 어필하는 배우가 아니라는 결론엔 조금 착오가 있어요. 왜냐면, 우리가 하는 작업이 영화이기 때문이에요. 어떤 캐릭터가 수더분할 수 있지만 ‘예쁜 캐릭터’라는 건 없어요. 예쁜 건 외모일 뿐이고, 그건 어쩌면 기본이에요. 감독들은 예쁘기만 한 배우를 영화에 캐스팅하지 않죠. 그게 영화에 전적으로 도움이 되기보다, 어느 순간 이야기에 방해가 되거나 혹은 과잉일 수 있다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캐릭터가 우선이고, 거기에 외모가 받쳐 줬으니 캐스팅된 게 맞죠.
세정 부모님께 감사하죠. (웃음)
경원 정리는 했는데 끝이 ‘맞아, 예뻐’로 끝나니까 뭔가 석연치는 않네요. (웃음)
세정 아, 근데 저번에 배역 때문에 머리를 자르고 나서 깨달았어요. ‘그동안 나는 외모 콤플렉스가 없었구나’ 하고요. 화면이나 사진에 못생기게 나올 때 있잖아요? 저는 그게 상관이 없었어요. 근데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난 뒤 어느 날 버스를 타러 갔는데, 이미 출발하면 길가에서 잘 안 세워 주시잖아요? 그냥 가시는 게 맞죠. 그날은 제가 급해서 앞쪽 문으로 뛰어갔는데, 문을 안 열어 주셨어요. 그때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못생겨서 그런가?’ 버스가 출발하고 난 다음엔, ‘내가 남잔 줄 아셨나 봐’ 이렇게요. 그러면서 여태껏 내가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았는지 알게 됐어요. 무의식적으로 외모 때문에 엄청 덕을 보고 있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었던 거죠. 그동안 누군가 뭔가 안 줄 걸 받았을 수 있고요.
경원 본인이 나쁘지 않은 외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관계 안에서 인지하지 못한 순간 얻어 온 이득이 있었다는 걸, 머리를 자른 뒤 알게 됐다는 거네요
세정 네. 덧붙이면 오디션을 볼 때도 외모가 득이 될 거라는 걸 의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알았던 거 같아요.
경원 본인한테는 내내 당연한 거였으니까요. 이 대화가 누군가에게 재수 없게 느껴지지는 않을 거 같아요. 배우가 가지고 있는 요소에 대한 이야기고, 맥락이 있으니까.
세정 네, 솔직하게 말했어요. 그리고 머리가 조금 더 길어서 지금은 되게 좋아요. (웃음)
경원 작년 만다라트의 중간에 ‘배우로서 인지’가 있었다면, 지금은 뭐가 있나요?
세정 11월부터 지금까지 계속 연극 연습을 해서 깊이 고민할 시간이 주어지진 않았어요. 근데 중간에 잠시 생각했을 때 ‘건강한 사람?’ 이런 걸 두었던 거 같아요, 정신적으로.
경원 본인이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인가요?
세정 저는 작품을 할 때마다 너무 괴롭고 무서웠어요. 내가 알몸으로 나갔는데, 몸이 너무 더러운 느낌인 거죠. 준비도 잘 안되어 있는 것 같고, 스스로 너무 아닌데 자꾸 까발려지는 느낌만 들었거든요. 때문에 극도로 무서웠고, 불안과 압박이 좀 심했어요. 우울하기도 하고. 단순히 이번 작품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1년 반 동안 해 오며 그리고 29년을 살며 스스로 좀 단단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어요.
경원 저는 오래전부터 영화가 사람을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필모그래피로 정의되죠. 똑바로 안 살면 작품 프로필이 후져지고, 작품 수가 많은 배우는 더하고요. 예로 음주운전을 하고 난 다음 날, 촬영장에서 따뜻한 엄마 역할을 하는 배우가 되고 싶진 않잖아요? 스스로를 배우로 인식한 다음 단계부터는, 본인의 삶이 영화 필모그래피처럼 고스란히 찍혀 나가고 있다는 인식이 필요한 것 같아요. 영화와 함께 나아가는 삶의 태도 같은 것. 그래서 작업자로서 정신적 건강은 중요한 지점인 거 같아요. 그게 두 번째 관문 아닐까요?
세정 맞아요. (두리번대더니) 저 근데 지금 마음이 조급해요.
경원 (같이 두리번대며) 아, 나갈 시간이라. 내려가서 뭐 하나 먹으면서 마무리할까요?
분식집에 들어가며, 끝은 연애 이야기로 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오프 더 레코드 가득한 그의 연애와 관계에 대한 문답이 오갔지만, 그냥 앞에 놓인 라면을 맛있게 먹으며 시간을 보내도 좋았을 만큼 현재의 그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떤 결론을 내야 할지 몰랐고, 굳이 내지 않아도 상관없던 밤. 연극은 끝났고, 그가 조금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다음 촬영 준비를 이어 가길 응원한다. 감독으로서, 내 작품의 배우로서 말이다. 2월 말, <동명이인 프로젝트> 시즌2에 등장할 그를 기대해 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