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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32호]지역민의 바깥서재 계룡문고 지역문화의 버팀목이 되어 가다
지역문화의 버팀목이 되어 가다
한 지역에서 오랜 시간 경제와 문화에 이바지하며 독립적인 자체 브랜드를 가지고 있는 기업을 향토기업이라 칭한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옛 충남도청 인근에 자리한 계룡문고는 마지막 남은 대전 향토서점이다. 계룡문고가 처음 문을 연 건 지난 1996년 유락문고를 인수하면서다. 형이 운영하던 영등포문고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이동선 대표가 대전에 내려와 새로운 스타일의 서점을 기획하면서 계룡문고는 대전의 문화공간으로 주목받는다. 북카페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계룡문고가 업계 최초로 북카페를 선보였다. 대전에서는 시도하지 않았던 독특한 형태의 문화공간이었다. 북카페 오픈을 기점으로 계룡문고는 다양한 문화사업을 기획한다. 2000년 6월 용혜원 시인을 시작으로 많은 작가가 ‘작가와의 만남’을 위해 계룡문고를 찾기 시작했다.
이제는 계룡문고의 아이덴티티가 된 ‘책 읽어주기 프로그램’을 처음 선보인 것도 이즈음부터다. 어린 딸에게 책을 읽어 주던 걸 시작으로 이동선 대표는 계룡문고를 찾은 어린아이에게 직접 책을 읽어 준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주기로 결심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계기는 계룡문고가 처음 세상에 등장하던 순간부터 함께했던 현민원 이사의 영향이었다. 현민원 이사가 ‘책 읽어주는 마법사’가 되어 견학 온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 줄 때마다 아이들은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책을 직접 읽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지니는지 실감했다. 공부하면 할수록 책 읽어 주기가 아이 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게 됐다.
당시 아이들이 서점에서 만날 수 있는 책의 종류가 제한적이라는 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출판 업계에는 재미있는 그림책이 많지 않았다. 있다고 한들 서점에 진열되는 책 대부분은 전집류 위주였다. 부모를 자극하는 자본주의적 논리로 마케팅한 전집류 외에는 아이들이 마땅히 접할 수 있는 책이 없었다. 아이들이 책에 흥미를 느낄 만한 여건이 아니었다. 아이들이 책 읽는 즐거움을 알아야 책 읽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책이 길러 낸, 사고하는 사람이야말로 올바른 세상에 대해 고민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생각을 바탕에 두고 이동선 대표와 현민원 이사는 본격적으로 서점 견학과 책 읽어주기 프로그램에 힘을 쏟았다.
“요즘은 부모님이 핸드폰으로 아이들에게 유튜브 동영상을 틀어 주잖아요. 아이들이 기계가 전하는 음성에 집중하는 시대지만, 저는 사람과 사람이 직접 이야기로 연결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계룡문고는 직접 그림책을 읽어 주면서 아이들과 소통합니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해서 4년째 어린이집 아이들을 데리고 계룡문고를 방문합니다.”
판암사회복지관 행복어린이집을 운영하는 권준선 원장이 꾸준히 아이들을 데리고 계룡문고를 방문하는 이유는 책 읽어주기 프로그램 때문이다. 아이들이 이야기에 빠져드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계룡문고가 지역의 향토서점으로서 큰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고 지역민들은 말한다. 계룡문고에서 책을 구입하고 있던 한 손님도 권 원장과 같은 생각이다.
“왜요 아저씨(이동선 대표의 애칭)가 좋아서 계룡문고에 오는 거죠. 어린이집 교사로 일하면서 책 읽어주기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그림책을 소중히 생각하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자주 이용하게 됐어요. 계룡문고가 가진 가치관이 좋아 팬이 됐습니다.”
계룡문고는 책만 파는 서점이 아닌 독서환경을 개선하는 서점을 가치관으로 삼는다. 이동선 대표는 이를 서점이 가진 책무라고까지 표현한다. 이런 이유로 계룡문고 이동선 대표와 현민원 이사는 매해 1만 명 정도 되는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 주고, 서점견학을 진행한다. 책 읽어주기 프로그램이 인기가 많아지면서 이동선 대표는 전국 각지에 있는 초등학교, 유치원, 복지 시설 등을 방문해 책 읽어주기 봉사활동도 진행한다.
지금까지 계룡문고가 선보인 문화행사는 다양하다. 책나라 큰잔치를 시작으로 발전한 도서관 책 축제, 책 읽어주는 아빠 모임 결성, 고아원과 지역아동센터 아동을 서점에 초대해 책을 선물하는 독서복지, 계룡문고 전 직원이 참여하는 책 읽어주기 봉사활동 진행 등 계룡문고는 단순히 책을 파는 서점을 넘어 지역을 이야기가 흐르는 마을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계룡문고가 풍요로움 속에서 이런 다양한 문화행사를 이어 나가는 건 아니다. 계룡문고가 처음 문을 열었던 시기에 터진 IMF의 영향, 전반적인 출판업계의 불황, 대형서점의 프랜차이즈화, 인터넷 서점의 보급, 점점 줄어 가는 독서 인구의 비율 등 계룡문고가 직면한 문제는 여럿이다. 이러다 대전에 마지막 남은, 지역문화에 이바지하는 향토서점이 문을 닫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이도 있다.
“충북지역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주말에 아이들과 종종 책 소풍을 떠납니다. 기차를 타고 계룡문고에 들려 책을 고르고 책 읽어주기 프로그램에도 참여해요. 계룡문고에서 저자 강연회를 하면 학부모들에게 알리기도 하고요. 계룡문고는 단순히 책만 파는 곳이 아니라 작가와도 만날 수 있고, 전시도 볼 수 있는 곳이잖아요.” 조원희 30대
“계룡문고는 인터넷 서점에서는 살 수 없는 가치가 있어요. 인터넷 서점은 베스트셀러, 마케팅을 많이 하는 책 위주로 페이지를 구성하잖아요. 책은 좋은 책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가치를 느끼기 때문에 좋은 것인데 말이죠. 우리가 놓치는 가치 있는 책을 계룡서점에서는 만날 수 있어요. 자연스레 읽는 책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생각의 깊이도 달라지죠.” 황선태 40대
“계룡문고에서 진행하는 그림책 공부에 참여하면서 책과 함께 아이가 성장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사교육보다 가정에서 책 문화를 만드는 게 더 중요한 거죠. 계룡문고의 가치관이 마음에 들어 자주 드나들다 보니 벌써 아이가 중학생이 됐어요. 계룡문고에는 확실히 대형서점, 인터넷 서점이 줄 수 없는 향수가 있죠. 지금도 저는 주변 엄마들에게 책 읽어주기 프로그램을 적극 추천해요. 드물잖아요. 사장님이 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책을 읽어 주는 곳이요.” 김윤미 40대
“대전에도 대형서점이 많이 생겼죠. 물론, 대형서점이나 인터넷 서점이 편리한 부분도 있어요. 하지만 계룡문고는 대형서점이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건드려요.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 주는 활동이요. 향토서점이니 지역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발상이 아닌가 싶어요. 어떤 상황이 되었든 계룡문고가 보전했으면 좋겠어요.” 김은숙 40대
계룡문고를 애용하는 손님들은 뚜렷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지역을 사랑하는 마음, 책 읽어주기 프로그램, 다양한 문화활동, 대형서점과 인터넷 서점이 줄 수 없는 책 발견의 기회 등 손님들은 비슷한 이유로 계룡문고를 찾는다. 신기한 점은 계룡문고를 자주 찾는 손님이 또 다른 손님을 데려오고, 새로운 손님이 아이 혹은 직장동료를 데려온다는 점이다. 대형서점에서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계룡문고에서는 일어난다. 그리고 이들이 계룡문고에 바라는 점은 단 한 가지다. 대형서점이 대전에 공격적으로 점포를 늘리고, 인터넷 서점의 바람이 강하게 불어와도 계룡문고가 지금처럼 다양한 문화활동을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동선 대표가 바라는 계룡문고의 방향은 보다 뚜렷하다. 그는 서점이 지역사회에 더 많이 기여하길 바라며 ‘유비쿼터스 그림책’이라는 활동을 제안한다. 독서의 위기 시대에 대전이 책 읽는 마을이 되도록 향토서점과 도서관, 시민이 만나 독서운동을 펼친다. 여기에 기업이 동참해 관공서 휴게실, 호텔 객실, 식당, 병원 등 짧은 시간 사람이 머무는 공간에 그림책을 비치해 자연스레 시민이 책을 접할 수 있게 한다. 책은 일정 기간 비치한 후 복지시설에 기증해 가정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독서의 기회를 준다. 이를 통해 교육 민주화를 이루고 교육 불평등을 해소하고 싶다.
이를 위해 이동선 대표는 지역 서점과 지방자치단체, 교육기관, 지역 주민이 힘을 모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지방자치단체가 지역 서점을 공공재로서 바라보고, 이를 통해 아이들의 연령에 따라 학교 앞에 들어선 어린이전문서점, 청소년전문서점, 학과별전문서점 등과 학교가 연계해 다양한 문화행사를 진행하길 바란다.
아침 일찍, 취재 차 계룡문고를 찾았다. 문 열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선생님의 손을 잡고 계룡문고에 들어왔다. 조용했던 서점 한쪽이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소리로 가득 찼다. 이동선 대표가 읽어 주는 그림책에 푹 빠진 아이들은 진짜 마법에 걸리기라도 한 듯 동화책의 한 구절을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까까똥꼬!” 동화책이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아이들은 자지러지듯 웃었다. 오늘도 계룡문고에서는 손익분기가 중요한 대형서점이라면 꾸준히 진행하지 않았을 책 읽어주기 프로그램을 연다. 개인에 따라 서점에 부여하는 기능과 가치는 다르겠지만 그림책을 듣고, 보고, 만지는 아이들에게 이곳은 재밌는 곳, 책이 많은 곳, 또 오고 싶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