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30호] 결혼이란 게 뭔지 알고도 대다수의 여자들은 여전히...

"결혼이란 게 뭔지 알고도 대다수의 여자들은 여전히 결혼했을까?"
로와의 책탐 - 에리카 종의 <비행공포>

내 평생 이렇게 많은 비속어를 한꺼번에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에리카 종의 《비행공포》는 섹스, 엉덩이, 보지, 페니스가 사방에 흩뿌려져 있다. 책을 흔들면 정액이 흘러내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도 음란소설이 아닌 페미니즘 소설의 고전이 된 이유는 시적인 표현, 지적인 깊이, 진중한 주제의식 때문이다. 주인공 이사도라의 말을 빌면 “내보지의 굶주림과 머리의 굶주림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는 법”, 달리 말하면 “페미니즘의 구호들과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남자의 몸에 대한 갈망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를, 즉 여성의 욕망과 사랑, 독립적인 삶을 이야기한다. 표현이 거칠고, 리얼하고, 정제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진솔하게 느껴진다.​

우리나라 여성작가의 소설에서 내가 아는 가장 야한 표현은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 첫 문장인 “나는 레이스가 달린 팬티는 입지 않는다” 정도였다. 마광수의 책은 구경조차 못해 봤지만 확신할 수 있다. 1973년에 출판한 미국소설 《비행공포》보다도 비속어가 훨씬 적을 것이라고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 우리 사회는 참 고상하고 점잖다. 수백 년 동안 유지된 유교문화, 검문검색이 일상이던 사회분위기, 그리고 어느덧 내재화된 자기검열. 여성작가의 정제되지 않은 목소리를 내는 소설은 언제쯤 읽을 수 있을까? 차라리 내가 쓰는 게 빠를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이가 여럿인 직장맘이다.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이 낳았느냐고 묻는다. 나는 웃음으로 얼버무리거나, 좀 솔직해도 되겠다 싶을 때만 ‘아무 생각없이 살다보면 이렇게 될 수도 있다’고 대답한다. 그렇다, 나는 결혼과 육아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다. 《백설공주》, 《하이틴 로맨스》 그리고 정액으로 쓰인 수많은 고전들이 낭만적 사랑이라는 환상을 어린 내게 뿌리깊이 심어 주었고, 티비 드라마와 대중가요는 사랑의 숭고함을 확인시켜 주었다. 사회는 이렇게 내게 결혼과 낭만적 사랑에 대해 장기간에 걸쳐 사기를 쳤다. 나뿐이랴, 50년대 미국여성 이사도라도 “결혼은 이 무정한 세상에서 단 한 명의 진정한 친구를 갖는 것”이라 착각하고 “결혼에 쓰러졌다. 푹신한 침대 같았지만 그 밑에 못들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재혼 5년 뒤, 첫눈에 반한 에이드리안을 남겨 둔 채 남편 베넷과 계단을 오르며 이렇게 생각한다. “섹스하고 싶은 남자를 홀로 남겨 두고 섹스하고 싶지 않은 남자와 계단을 올라가는 건 얼마나 위선적인지. (…) 그게 바로 문명이고, 문명으로 인한 욕구불만이리라.” 여기서 문명이란 바로 결혼제도다.​

나는 ‘뭔가 아닌 듯하나 정확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묘한 느낌’을 받으며 결혼식장에서 ‘…네’라고 대답했다. 곧 아이가 생겼고, 생전 처음인 수유와 육아에 혼을 빼놓은 사이에 아이는 또 생기고, 또 생겼다. ‘애는 당연히 엄마가 키워야’ 하지만, 두툼하지 못한 통장은 나를 다시 직장으로 보냈다. 나는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출근길과 회사에 죄책감을 느끼는 퇴근길을 반복했다. 나는 그렇게 10년을 숨만 쉬고 살았다. 2016년부터는 독서목록을 쓰기 시작했다. 고전만 골라 읽던 꼬마 때 이후로 한동안 잊었던 습관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일주일에 한 권씩은 책을 읽었다고 자랑하려고 54권을 채우고 뿌듯했던 속물이었다. 2017년 5월, 글쓰기와 문학 멘토를 만나 내 인생은 바뀌었다. 먹고사니즘에 매여 있던 이공계녀가 몰랐던 인문학계의 좋은 책은 너무나도 많았다. 비로소 나는 책다운 책을 체계적으로 읽게 되었는데, 《비행공포》도 그중의 하나다.​

에리카 종의 자전적 장편소설 《비행공포》는 매우 다면적이다. 특히 여성의 삶, 예술가의 삶, 글쓰기에 대한 생각은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책에 수많은 밑줄을 긋고 메모를 적었다. “역사를 통틀어 모든 책은 정액으로 쓰여졌다. 생리혈이 아니고”에는 네모를 쳤고, “만약 당신이 여자이고 재능이 있다면 어느 길을 가건 당신의 인생은 하나의 덫이다. 집안일에 익사하거나, 아니면 예술로 집안일을 승화시키거나. 당신은 결코 여성성을 탈출할 수 없다. 당신의 피 속에 이미 갈등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에는 부정하고 싶은데 부정할 수가 없다고 써 놓았다. 한편 570쪽에 걸친 이사도라의 고민(‘비행공포’로 비유되는 여성의 자립과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구속받고 가정을 이뤄 안정하고 싶은 욕구 간의 딜레마)은 과학기술이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 50년쯤 후에는 인공지능을 장착한 성인용 로봇이 나올 텐데 인간 여성들은 인간남성보다 로봇을 선택할 것이기에 말이다. 이는 《대량살상 수학무기》의 저자, 수학자이자 데이터 과학자인 캐시 오닐 박사의 예측이다.​

에리카 종의 자전적 장편소설 《비행공포》는 매우 다면적이다. 특히 여성의 삶, 예술가의 삶, 글쓰기에 대한 생각은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책에 수많은 밑줄을 긋고 메모를 적었다. “역사를 통틀어 모든 책은 정액으로 쓰여졌다. 생리혈이 아니고”에는 네모를 쳤고, “만약 당신이 여자이고 재능이 있다면 어느 길을 가건 당신의 인생은 하나의 덫이다. 집안일에 익사하거나, 아니면 예술로 집안일을 승화시키거나. 당신은 결코 여성성을 탈출할 수 없다. 당신의 피 속에 이미 갈등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에는 부정하고 싶은데 부정할 수가 없다고 써 놓았다. 한편 570쪽에 걸친 이사도라의 고민(‘비행공포’로 비유되는 여성의 자립과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구속받고 가정을 이뤄 안정하고 싶은 욕구 간의 딜레마)은 과학기술이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 50년쯤 후에는 인공지능을 장착한 성인용 로봇이 나올 텐데 인간 여성들은 인간남성보다 로봇을 선택할 것이기에 말이다. 이는 《대량살상 수학무기》의 저자, 수학자이자 데이터 과학자인 캐시 오닐 박사의 예측이다.​

글 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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