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30호] 식장산 위로 떠오르는 태양 빛이 닿는 마을

식장산 위로 떠오르는 태양 빛이 닿는 마을 
대전 유성구 대정3동 주루비우마을 
주루바우 마을은 빈계산에서 흘러내린 줄기 하나를 붙잡아 마을 뒷산으로 삼았다. 그곳에서 빈계산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주루바위를 만난다.
본 마을에서 뒷산자락을 넘어가면 불당골이 있는데, 그곳에서 주루바위가 보인다. 숲도 우거지고 날도 그리 맑지 않아 훤히 보이지는 않지만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주루바위는 이 마을 이름을 결정할 만큼 강한 인상을 주었다. 바위가 죽 늘어선 줄 바위는 주루바우가 되었고 그 아래 형성한 마음을 주루바우 마을 혹은 죽암이라 불렀다. 다른 이름으로 치마바우라고도 부른다. 행정구역으로는 대전 유성구 대정 3통이다.
1.

이 마을은 호남고속도로 서편이다. 마을에 들어서려면 지하 터널을 지나야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고속도로 위를 건너는 대정육교가 있다. 물론, 대정육교에서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터널도 있다. 이 터널을 통해 북쪽으로 더 올라가 마을에 들어설 수도 있다. 터널은 대전농업기술센터 앞이다.
육교에서 잠시 멈춰 건너다본 마을은 겨울 오후 햇살이 가득 들어찼다. 역사가 깊은 마을에서 느낄 수 있는 안정감과는 다른 느낌이다. 오래된 마을 안길과 지붕에서 느낄 수 있는 세월이 온전하지 않다. 곳곳에 창고도 보이고 최근에 새로 지은 모던한 건물도 많다.
“이제 토박이는 절반도 안 될 거야. 여기 살던 사람들은 도시에 살아보자고 나가고, 도시에 살던 사람들은 공기 좋은 이곳이 좋다고 들어오지. 서로 바꾸어 사는 거야.”
밭에 일 나가던 주민은 그 현상이 무척 흥미로운 모양이다.​
한파가 몰아치는 날이 계속 이어져 그런지 마을은 고요하기만 하다. 마을 안길에서 사람을 볼 수가 없다. 경로당을 겸한 마을회관 문을 밀어 보니 스르륵 열린다. 신발이 한 켤레도 보이지 않는다. 괜히 소리 높여 인기척을 내보지만 아무도 없다. 고요한 마을길을 따라 쭐래쭐래 걷는다.
마을은 이제 막 시간이 오버랩 되는 중이었다. 오랜 주택과 최근에 새로 지은 집이 섞였다. 누구네 집 담벼락에는 예비군 훈련 공고 안내판이 말끔한 모습으로 붙어 있다. 소집대상과 소집기간, 집합시간과 장소 등을 표 안에 넣어 깔끔하게 디자인했다. 원내동대장 명의로 붙었다. 이 공고 안내판 제작을 후원했는지 보광당안경원 광고가 하단에 떡하니 자리 잡았다. ‘대전도마동다리옆충고입구’라는 위치 안내와 전화번호가 함께 적혔다. 이 모든 걸 한 줄에 넣느라 띄어쓰기는 하지 않았다. 소집기간에 년, 월, 일을 적어 두었는데 숫자는 고쳐 적을 수 있도록 빈칸으로 두었다. 다만, 연도 표시 칸에는 198이라는 숫자를 인쇄했고 한 글자만 고쳐 적을 수 있도록 해 두었다. 제작 시기를 1980년부터 1988년 사이라 짐작할 수 있다. 30년 세월인데 참 멀쩡하다. 유효기간이 끝난 공고판인데 떼지 않고 그대로 둔 심성도 읽힌다.
산자락 마을인지라, 그리 가파르지 않지만 주택은 층을 이뤄 산자락 위에 들어섰다. 집과 집 사이 작은 골목을 지나고 너른 논둑 길도 걷고 헤매다 다시 마을 회관 근처로 돌아와 대문이 열린 집을 찾아 들어간다.

II 예비군 훈련 공고 안내판​

2.

유성봉(81) 할아버지 내외가 사는 집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할머니가 내다보고 곧이어 안방에서 할아버지가 나온다. 전국노래자랑을 보느라 아직 점심을 들지 못한 상태였다. 현관으로 오르는 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햇볕이 가득 들어차는 집 마당 계단은 따뜻하다. 할아버지는 조금 널찍한 스티로폼 조각에 앉고 그것보다 조금 작은 스티로폼 조각을 내준다. 엉덩이 부분이 적당히 눌려 앉기에 맞춤하다.
“옛날에는 이 동네가 참 살기 어려운 동네였어. 우리 마을 들이 주변에 다른 마을 들보다 조금 지대가 높아. 그러니까 농사 지을라면 아주 물이 귀했지. 지금이야 방동저수지에서 수로를 연결해 물 걱정 없이 농사짓지만 예전에는 안 그랬거든. 한국전쟁 직후에 큰 가뭄이 들어 모내기도 못 할 때도 있었어.”
할아버지는 지금 사는 그 집에서 태어나 여지껏 산다. 예전보다 가구 수도 조금 줄고 외지인이 많이 들어와 집도 새로 지었지만 그것 말고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단다.
“마을 저짝에 만석공원이라고 있었는데, 그곳에 연못이 있고 둥구나무 큰 것이 있었지. 버드나무였는데 그곳이 지대가 높아서 좋았어. 앉아 있으면 앞이 훤하게 잘 보였지. 수로가 나면서 연못도 메우고 버드나무도 잘랐지만.”
할아버지는 칠월칠석, 그곳 만석공원에 마을 주민이 모여 보리막걸리도 마시고 꽹 메기도 치며 놀았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것보다 더 큰 즐거움은 백중이었다.
“백중이 무슨 날이냐면 머슴들이 돈을 타는 날이여. 돈을 타면 유성장에 가서 막걸리도 사 먹고 씨름도 하고 장기도 두면서 놀다가 왔지.”
마을에서 유성장까지는 대략 10릿길이다. 백중날에는 놀러 갔지만 평소에는 장을 보러 다닌 곳이다. 유성장은 그나마 가깝다. 뒷산에서 나무를 하고 솔방울을 줍고 솔가지를 긁어다가 파는 곳은 유천동 근처에 있었다. 더 멀리 갈 때는 테미 날맹이, 지금 병무청 근처까지도 팔러 갔다. 새벽밥 먹고 일찌감치 길을 나섰다가 저녁 어스름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이 마을 아이들이 다닌 진잠초등학교도 3킬로미터쯤 떨어졌다. 물론 걸어 다녔다. 유 씨 할아버지와 아들, 손자까지 3대가 다닌 학교다.
“여기 이렇게 마당에 앉아 있으면 저 멀리 식장산에서 해가 떠오르는 게 보이지. 우리 집터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

II 유성봉 할아버지​

3.

마을에 들어서면 뒷산 맨 꼭대기에 자리한 교회가 눈에 들어온다. 주광교회다. 성결교회로 1947년 8월 1일 문을 열었다. 마을에서 70년 세월을 보낸 교회다.
교회 건물 머릿돌에는 1986년 7월 27일, 새롭게 신축했다는 머릿돌이 있다. 유성성결교회에 다니던 이 마을 신도들이 힘을 모아 지은 교회다. 유성봉 할아버지도 어릴 적 이 교회에 다녔고 어린 시절, 교회 앞마당은 마을 꼬맹이들의 놀이터였다. 이제 막 2부 예배가 시작하는 교회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마을로 내려왔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이니, 혹시 하는 마음에 다시 마을회관을 찾았다. 똑같이 생긴 털신 두 켤레가 눈에 들어온다. 검은색 고무재질에 갈색 인조 털로 안감을 마감한 겨울용 신발이다. 인기척을 하니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내다본다. 다짜고짜 들어서니 무엇하러 다니는 사람인지 묻는다. 제대로 대답할 새도 없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보일러 때문에 어수선하다. 손바닥만한 콘트롤 박스 안에 빨간불과 연두색불이 점등하며 어지럽다. 호기롭게 일어서 전원을 껐다가 다시 켜니 정상 작동한다.
“아이고 무서운 사람 왔다고 보일러가 고쳐졌나 보네.”
어색함이 조금 풀린 것 같아 마을 이야기를 물어보았으나 아무것도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온다.
“경로당에는 한 너댓 명 밖에는 안 와. 할아버지들은 아예 안 오고. 오늘은 교회 다녀 오느라고 조금 늦는 모양이네. 그냥 이렇게 하루종일 앉았다가 가는 거여. 화투 놀이도 안 해.”​
애를 쓰는 사이, 보일러는 또 점멸하며 말썽이다. 할머니들은 다시 온통 보일러에 신경을 뺏긴다. 한가로이 보내야 할 오후를 온전히 보내지 못하는 것에 영 심기가 불편하다. 이럴 때는 물러나는 것이 도리다.
여전히 햇볕은 마을을 가득 채웠고 골목은 고요하기만 하다. 이미 두 차례 들어갔다가 나온 불당골과 바로 옆 당산말 쪽으로 다시 발길을 돌린다. 이번에는 산 쪽으로 붙은 마을 안길 대신 들판에 붙은 큰길을 따라간다. 마침 불당골 쪽에서 내려오는 할아버지와 마주쳤다.
“저짝 밑에 있는 밭에나 한번 가 보려고 나왔지.”

4.

“여기가 불당골이고 더 들어가면 저짝이 당산말이지. 옛날에는 저기에도 셋 집이 살았는데, 지금은 한 집밖에 없어. 저기 보이는 게 치마바우, 주루바우라고도 하고. 그 옆으로 보이는 게 아갈 바우여. 삐죽삐죽하게 솟아났잖아.”
할아버지는 주루바우마을이 고향이 아니라고 말했다. 계산동에서 태어나 세 살에 이사를 왔다고 한다.
“여기가 그린벨트로 묶인 곳이잖아. 뭔 땅값이 있어? 없지. 그래도 저짝에 보이는 밭은 다 외지인이 샀어. 이 동네 사람 것도 별로 없어.”
한길에 서서 그렇게 오래 이야기를 나눌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할아버지는 이야기꾼이었다. 가장 흥미롭게 이야기한 건 마을에 살았던 천석꾼 이야기였다. 다른 곳보다 지대가 높아 물 대기는 어려웠어도 천석꾼이 나올 만큼 농토는 넓었던 모양이다.
“최 참봉이라고 우리 어렸을 때는 기와집도 남아 있었어. 사랑채도 있고 한 울타리 안에 집이 여러 채 있었지. 6·25 때까지도 그 집이 남아 있었어. 한국전쟁 터지고 그 집에 김 씨네가 들어왔었지. 마름하던 사람이었는데, 좌익 활동을 했어. 국군이 수복하면서 그냥 도망갔어. 그 당시에 김 씨 동생이 아마 이북으로 건너가서 꽤 높은 자리에 있었다고 하던데. 여하튼 이 동네가 전쟁 나고 아픔이 좀 많았어. 하대받던 사람들이 전부 좌익으로 붙어 가지고 시끄러웠지. 그렇게 아픔을 겪고 마을 인심도 조금 변하기는 했었지.”
광복 후 한국전쟁을 거치며 차고 올라왔던 이념 갈등은 작은 산골짜기 마을에도 불어닥친 모양이다. 천석꾼 집안에서 일하던 머슴들이 주축이 되어 좌익활동을 했다는데, 자세하고 소소한 이야기를 듣기는 어려웠다. 할아버지 국민학교 2학년 때 이야기다. 지금은 그 천석꾼 기와집이 남아 있지 않다.
“이 주변은 정말 많이 변했지. 저렇게 아파트가 들어올 거라고 생각이나 했나. 건양대학교병원 들어선 부근은 우리 어릴 적에 한중터라고 부르던 곳이여. 무서운 곳이었지. 우시장에 갔다가 늦게 오는 소장사들은 전대를 다른 곳에 파묻어 놓고 낮에 해 있을 때 다시 가서 가져온다고 했어. 한중터에 도둑놈들이 많았거든.”
할아버지는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성이라도 가르쳐 달라니 알려 주었는데, 평범한 성이 아니라 밝혀 적기가 민망하다. 할아버지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주루바우 마을 안길은 흙 땅도 콘크리트 포장도 아닌 검은색 아스팔트로 깔끔하게 포장해 두었다. 마치 새로 조성한 택지 안에 깔아 둔 길처럼 생경하다. 그 마을 길 곁으로 잘 다듬어 둔 탱자나무 울타리가 반갑지만 어딘지 모르게 새치름하다. 마뜩잖아 볼을 잔뜩 부풀린 소녀처럼 콕 찌르면 피 한 방울이 맺힐 것만 같다.
마을 곳곳에는 ‘땅’이라고 붉은 글씨로 굵게 표시한 광고판이 걸려 찬 겨울바람에 나부낀다. 그 광고판이 볼에 와 닿는 칼 같은 바람보다 더 마음을 에인다. 그나마 새롭게 조성한 주변 아파트 단지가 멀리 떨어져 있어 아직은 아침마다 식장산 위로 솟아오르는 태양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인다.

글 사진 이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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