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30호] 깎다, 그리고 쓰다_누벨바그125

깎다, 그리고 쓰다
누벨바그 125
고등학교 시절 집중이 안 될 때면 주변 친구의 연필과 색연필을 한데 모아 깎곤 했다. 연필 깎는 소리에 무거운 마음을 잠시 내려놓았다. 예쁘게 깎은 연필을 보며 괜스레 흐뭇해 기분까지 좋아졌다. 필기감이 좋은 볼펜과 샤프가 많아졌지만, 연필로 쓸 때의 사각사각 소리 때문에 연필 한두 자루쯤은 항상 필통에 있었다. 대학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을 시작한 후 연필을 사용하는 일이 줄었다. 연필을 깎는 번거로움을 즐길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최근 다시 연필을 들었다.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는 여전히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지구의 모든 것을 디자인해 보자

서울 마포구 연남동 누벨바그125에는 연필이 좋아서 수집하고 판매하는 두 명의 디자이너가 있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땅별메들리’는 캐릭터 일러스트를 디자인해 제품에 적용하고 파우치, 에코백 등을 판매한다. 순우리말인 ‘땅’과 ‘별’ 그리고 모든 것을 아우른다는 의미의 ‘메들리’가 합쳐진 이름이다.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을 디자인해 보자는 뜻으로 만들었다.
땅별메들리디자인스튜디오를 운영하면서 프로젝트 ‘흑심’을 시작했다. 빈티지 연필 케이스와 연필을 수집하던 두 디자이너가 연필의 매력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자 시작한 일이다. 누벨바그125 한쪽에는 두 사람이 직접 디자인에 참여한 연필 판매대가 있다. 판매하는 모든 연필은 시필이 가능하다. 연필의 장점과 매력을 알리는 데 집중한 판매대를 보면서 연필에 관한 두 디자이너의 애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대학 때부터 서로 친구였어요. 디자인 쪽을 전공하다 보니 아무래도 연필을 사용하는 일이 많았죠. 처음에는 연필 케이스에 관심을 가졌어요. 빈티지 연필 케이스는 디자인이나 색감이 지금보다 다양해요. 처음에는 그 디자인에 끌리기 시작했죠. 케이스 수집을 하다가 연필도 함께 수집하기 시작했죠. 연필은 굉장히 단순해 보이지만, 그 세계는 알면 알수록 굉장히 깊다는 사실을 수집하면서 알았어요. 매력 있는 제품이라고 생각해요.”
대학 시절부터 친구였던 두 사람은 통하는 게 많은 사이였다. 평소에 빈티지 제품에 관심이 많았다. 빈티지만이 가진 매력에 빠진 두 사람은 자신이 알고 있는 빈티지 제품의 매력을 다른 이에게 전하고자 한다.
누벨바그125 곳곳에 연필과 LP 등 빈티지 제품이 눈에 띈다. 모두 조금은 번거롭고 수고롭지만, 그것을 감수할 정도의 매력이 충분한 물건이다.​

연필이 가진 매력을 이야기하다

연필은 보통 여행을 가서 구매하거나 경매를 통해 구입한다. 인기가 많은 제품을 두고 전 세계에 연필을 수집하는 사람들과 경쟁하고 있다고 두 디자이너는 웃으며 말했다.
“연필의 매력은 100년이 지나도 보존만 잘 하면 사용할 수 있다는 거예요. 잉크가 떨어지면 사용할 수 없는 볼펜과 다르죠. 수집한 연필 중에 가장 오래된 연필은 1860년대 연필이에요. 연필은 사용하는 용도나 경도에 따라 골라 쓰는 재미도 있어요. 워낙에 종류나
디자인, 경도가 다양해요. 같은 회사의 제품이더라도 시대별로 디테일이 달라요. 이런 디테일을 보는 것도 연필을 사용하는 재미 중 하나죠. 사용하다 보면 오히려 오랜 시간이 지난 연필이 필기감이 더 좋기도 해요. 이게 연필이 가진 매력이에요.”
연필이 가진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하나씩 연필을 소개할 때, 두 디자이너가 즐거운 일을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하나의 연필을 뽑을 때마다 연필에 관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 제품은 몇 년대 제품이고, 현재까지도 어떻게 판매하고 있는지부터 시작해 제품에 따른 연필의 역사도 알 수 있었다. 같은 제품이더라도 1940년대와 1950년대의 각인이 다르다. 과거 일본에서는 잘 만든 연필은 따로 마크를 부여하기도 했다. 기술이 발전하고 연필의 품질에 차이가 없
어지면서 마크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흑심은 빈티지 연필뿐 아니라 현재 판매하고 있는 연필도 만날 수 있다. 수학자이자 작가, 몽상가였던 Ada Lovelace에게 바치는 연필 등 연필의 과거와 현재를 한눈에 바라보고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빈티지 연필 깎기와 지우개까지 연필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제품도 눈에 띄었다. 빈티지 연필 깎기의 경우 연필 수집과 마찬가지로 여행이나 경매를 통해 구매한 제품이다. 연필 깎기의 견고한 디자인과 내구성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지난 세월이 무색하게 현재도 잘 작동한다.
흑심은 연필을 사용하려는 사람이나 선물하려는 사람을 위해 연필과 지우개, 연필 깎기로 구성한 패키지 상품도 판매한다. 한 자루씩 구매하는 손님이 많기 때문에 생각한 아이디어다. 패키지 구성이 아니더라도 연필을 구매하면 직접
디자인한 봉투에 직접 제작한 스티커를 붙여 준다. 연필을 구매한다면, 자신이 구매한 연필에 관한 간략한 소개는 덤이다.
 

II 왼 박지희 디자이너 오 백유나 디자이너​

그리고 다시 쓰다

연필 몇 자루를 구매하고 티켓 한 장을 받았다. 티켓에는 구매한 날짜와 어떤 제품을 구매하고, 가격은 얼마인지 표시해 준다. 누벨바그125의 콘셉트인 영화관에 맞춘 구매영수증 티켓이다. 디자인하는 청년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공간이다 보니, 작은 것 하나에도 방문자에게 특별한 기억을 주고자 아이디어를 모았다.
누벨바그125는 프랑스의 영화 운동 ‘누벨바그’에서 따왔다. 누벨바그125는 디자인으로 함께 모인 이들의 ‘새로운 물결’을 의미한다. 이곳에는 디자인 주얼리 브랜드 ‘아우레올라’와 쾌락원칙 철학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슈퍼마켓 ‘쾌슈퍼’ 그리고 ‘땅별메들리’ 세 개 디자인팀의 작업공간이자 쇼룸이다.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세 팀은 함께하면 얻게 될 시너지효과를 기대하며 지난해 5월부터 연남동에 함께 자리 잡았다. 각각의 개성이 뚜렷한 세팀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이 공간에서 앞으로 어떤 재미난 일이 일어날지 기대가 앞선다.
“흑심은 얼마 전 텀블벅을 진행했어요. 저희가 그동안 모아 놨던 몽당연필만 쓸 수 있는 홀더와 함께 패키지 세트로 구성해서 보내 드리는 작업이죠. 이런 활동을 계속해서 진행할 계획이에요. 연필을 직접 제작할 순 없지만, 연필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소품을 만들거나 기존의 제품을 리패키징 하는 작업을 이어나갈 생각입니다. 땅별메들리에서 하는 디자인 작업도 물론 계속할 계획이에요.”
디자인은 물론이고 연필이 가진 매력을 알리고자 한다. 그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한 자루의 연필이라도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있다. 오랜 시간을 견뎌온 연필이 가진 시간의 무게를 생각해 본다. 연필을 다시 고쳐 잡고 천천히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전에 세상에 나온 연필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현재의 이야기를 채워 준다​.

글 사진 이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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