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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29호] 우리가 부순 건 무엇이고 지은 건 무엇일까
동구 신흥동
호되게 춥던 날씨는 바람이 머춤하면서 견딜 만했다. 태양은 마을 남쪽 하늘에 멈췄다. 골목은 내리쬐는 빛을 받으며 꽁꽁 언 몸을 털어 낸다.
대동천을 가로지르는 조그만 다리를 건너니 바로 도깨비마트 앞이다. 그 초입에 ‘실내포장마차’가 있다. 별도로 가게 이름을 짓지 않았다. 공간이 지닌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간판을 내걸었을 뿐이다. 붉은색 간판 글씨가 강렬하다. 오징어두루치기와 냉막걸리를 대표 메뉴로 내걸었다.
“원래는 이 집 앞에다 포장마차를 했어요. 오뎅, 떡볶이도 팔고 돼지머리 누른 거랑 막걸리도 좀 팔았지요. 근데 차가 다니기 불편하다고 해서 아예 이렇게 건물 안으로 옮겼어요.”
19년 동안 장사한 홍채연(71) 아주머니는 연탄불을 가는 중이었다. 아직 12시도 안 된 시간이었지만 가게 안에는 사내들로 가득하다. 건물 벽에 붙여 놓은 툇마루에도 사내 몇이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판암동에서 왔어요. 저이는 삼성동에서 오고, 이 근처에 이렇게 막걸리 마실 수 있는 대폿집이 별로 없잖아요.”
따뜻한 홍합 국물에 막걸리 한 사발이 생각나는 사람이나 아침 인력시장에 나갔다가 공치고 돌아온 사내들이 주 단골이다. 날씨가 따뜻할 때는 가게 앞 옹색한 공터에서 윷놀이도 한판 벌어진다. 평상에는 닳고 닳아 한결 부드러워진 윷 한 벌도 참하게 앉았다. 그곳 담벼락에 누군가 그린 익살스러운 그림이 눈길을 잡는다.
“아 희만이라고 이 동네 애가 그린 거야. 꼭 지같이 그려 놓았지.”
“그 애가 몇 살인데요?”
“이제 한 50 됐지.”
“그럼, 애가 아니네요.”
“흐흐흐.”
그곳부터 대동천 우안을 따라 점포가 죽 늘어섰다. 파란색 포장을 철제나 나무 프레임에 둘러 바람만 막았다. 골목을 사이에 두고 반대쪽은 건물형 점포다. 이 모든 걸 아울러 ‘도깨비시장’이라 부른다. 이 마을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한 부분이다. 시장에서 만난 상인들 증언을 토대로 유추해 보면 40년은 넘고 50년은 안 된 시장이다. 초창기에만 해도 오전에만 잠깐 장사를 했다가 문을 닫아서 도깨비시장이라 불렀단다.
“예전에 한창 잘될 때는 옥천에서도 오고 추부에서도 오고 장사꾼들이 넘쳐나 마을 골목길까지 좌판을 펼쳤다니까. 내가 그때는 제1치수교 옆에서 방앗간을 했어, 떡 한 말 해 가지고 평상에 올려 두면 10분도 안 되어 동이 났지.”
실내포창마차 옆집인 만덕떡방앗간 아주머니 얘기다. 도깨비시장 시작 지점은 암묵적으로 제1치수교 쪽이다. 방앗간도 본래는 그곳에 있었다. 자리를 옮긴 건 6~7년 정도다. 이 공간 이해를 기초로 하면 감자와 고구마 등 주로 뿌리채소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김삼남(69) 아주머니 가게가 맨 끝 집이다. 아주머니 가게에는 마을 주민 이명순(77) 할머니가 마실 왔다. 물건 파는 일보다 그렇게 오랜 지기를 만나 이야기 나누는 것이 요즘은 더 즐겁다.
“나도 도깨비시장 초창기부터 장사를 했는데, 그때는 정말 장사 하려면 아구빨도 쎘어야 해, 자리를 지키려면 그 정도 악다구니는 있어야 했지. 매일 자리싸움이 나고 사람이 미어터져서 걸어 다니지를 못했어.”
어떤 재래시장을 가도 왕년에 장사 잘되던 시절에 관한 진술은 비슷하다. 전성기 대동천변을 따라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을 점포는 이제 많이 비었다. 그냥 휑하니 공터로 변하거나 용도를 변경해 창고 등으로 쓰인다. 아니면 문을 닫아걸었다. 그래도 절반 정도는 여전히 문을 열고 많지 않은 손님을 기다린다.
식재료가 대부분인 시장에서 장갑부터 개수대 캡까지 온갖 만물을 파는 좌판 앞에 멈췄다. 아예 포장을 걷어 버리고 아주머니 둘이 앉아 이야기 삼매경에 빠졌다.
“오늘은 오리가 정말 많이 왔어. 아직 두루미도 있나? 아침에는 있었는데.”
“두루미는 안 보이네.”
겨울에는 포장을 걷고 햇볕을 쬐는 것이 더 따뜻해 그렇게 걷어 둔다. 함께 앉은 아주머니는 골목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 건물에서 건어물 등을 파는 가게를 한다. 겨울에는 그곳에 앉아 얘기하고 여름에는 자리를 옮겨 건어물 가게에서 모여 앉는다.
“결혼식장에라도 급하게 다녀와야 하면 이웃들이 다 물건을 팔아 줘. 가게를 열어 둔 채 다녀와도 아무 걱정이 없었다니까. 그만큼 믿는 거지.”
쌀과 보리, 콩 등을 파는 점포에 주인은 자리를 비우고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비둘기 두 마리가 주억거리며 빈 가게에서 배를 실컷 채운다. 시장 초입, 마씨네 가게에는 아주머니 서넛이 모여 쪽파를 다듬는다. 가게 앞에 설치한 나무 난로에는 고구마를 잘라 올려 두었다.
“대동천변에 좌판이 먼저 들어섰지. 이쪽에는 허술하게 건물이 있다가 새로 지으면서 우리도 이쪽으로 들어왔어. 우리 장사한 지는 한 30년 넘었어. 한 5~6년 전까지만 해도 장사가 잘되었지. 손수레 끌고 장 보러 오면 눈치 주고 그랬다니까. 사람 많아서 지나다닐 길도 없는데 걸리적거리게 그런 걸 끌고 다닌다고.”
모여 앉은 아주머니들, 쪽파를 다듬는 손길이 분주하다. 장사가 되고 안 되고는 별상관이 없어 보인다. 몸에 밴 바지런함은 끊기 어려운 습관처럼 들러붙은 모양이다. 도깨비시장이라는 공간을 떠나지 못하고 여전히 가게 문을 열어 둔 사람들처럼 말이다.
II 실내포장마차를 19년 동안 운영한 홍채연 아주머니
II 모여 앉은 아주머니들, 쪽파를 다듬는 손길이 분주하다
대동천에 붙어 도깨비시장이 있고 그곳에서 북동쪽으로 올라붙어 마을이 들어섰다. 신흥동이다. 새뜸이라는 고유 지명도 있고, 신흥동 날맹이, 도깨비 날맹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리는 곳이다. 날맹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집을 모두 걷어 내면 야트막한 야산 위에 마을이 들어선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다.
도깨비시장 초입인 제1치수교 쪽에서 큰길로 나섰다가 곧바로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도심 사찰치고는 제법 큰 ‘신흥사’를 만난다. 신흥사 정문 앞 작은 공터에 자라는 감나무에는 아직도 감이 잔뜩 달렸다. 신흥사는 1993년(불기 2537년)에 건립한 사찰이다.
이 마을 어디에서 사진을 찍어도 주변 아파트가 걸린다. 이미 다 지은 아파트부터 크레인을 설치하고 한창 공사 중인 아파트까지. 도깨비 날맹이와 새뜸은 섬처럼 아파트 사이에 오도카니 들어앉은 형국이다.
여전히 사람이 사는 이 마을은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참새와 까치도 심심찮게 만난다. 얼어붙은 배추가 누워 있는 텃밭에서는 고양이가 햇볕을 쬐며 졸다 낯선 이의 눈길에 잔뜩 경계한다. 무엇보다 곳곳에서 만나는 골목길이 좋다. 반듯한 골목부터 구불거리는 골목, 넓고 좁은 골목은 막다른 끝을 내보이기도 하지만 전혀 수고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좁은 길에 어깨를 맞대고 살아가는 삶이 결코 녹록하지는 않았겠지만 담과 담 사이 거리만큼이나 따뜻했던 마을이다.
“여기는 정말 시골 같아요. 내 것 네 것 없이 나누며 살고, 아프면 서로 들여다보고, 음식도 해서 가지고 와서 나누어 먹고. 재개발도 하긴 해야 하는데, 언니 동생들하고 헤어지는 거 생각하면 너무 아쉬워요.”
동양슈퍼 아주머니 얼굴에서 서운함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단차를 두고 마을이 들어서니 계단이나 급한 경사로 형태의 골목도 곳곳에서 만난다. 대동처럼 높지 않지만 달이 가까운 달동네다. 볕이 잘 드는, 적당한 넓이를 확보한 골목에는 어김없이 의자 몇 개가 놓였다. 바람이 불지 않는 볕 좋은 날에는 주민 몇이 나와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일 터다. 큰길과 달리 골목은 그렇게 이야기가 있어 정겹다.
대전역사박물관 기록에 의하면 신흥동은 새뜸, 신대, 새터말 등을 한자화하면서 생긴 지명이다. 같은 기록에 ‘대동천이 자주 범람해 마을이 들어서지 못하다가 1900년대, 비교적 근대에 와서 대동천 정비사업을 벌인 후에 비로소 마을이 들어서기 시작했다’라는 설명이 있다. 마을 주민 증언에서도 예전에 이곳은 논밭과 포도밭 등이 성했고 마을이 제대로 들어선 지는 얼마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짧은 역사를 간직한 이 마을은 이제 더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미 마을 주변에 아파트가 많이 들어섰고, 신흥동을 흐르는 대동천 좌안으로는 LH가 진행하는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아파트가 정신없이 올라간다. 안내판을 보니 내년 7월 30일까지가 공사 기간이다. 636세대가 모여 사는 아파트다. 이제 새뜸과 날맹이라고 부르는 충남중학교 부근 정도만 남은 상태다. 이곳 3구역도 이미 SK건설에서 시공하기로 했다. 최근에는 보상가 산정을 위한 감정평가가 이루어져 고지한 모양이다. 마을에서 만난 몇몇 주민은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마을이 어수선하다.
“보상가가 턱없이 낮아요. 땅 열 평 남짓 가진 사람은 그 보상금을 받아서 어디가 집을 구해 살아요. 못 나가요. 손바닥만 해도 내 집에서 사는 게 좋지. 우리가 새로 짓는 아파트에 어떻게 들어가요. 내야 할 돈도 많고 나이 먹은 사람들이 대출 받아서 그럴 수 있겠어요?”
노후한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일인데, 노후한 환경에 살던 주민은 새로운 주거지에 살 수가 없는 현실이 참 아이러니하다.
“꼭 아파트를 지어야 하나? 그냥 주택에서도 살고 그래야지. 어떻게 사람들이 맨 아파트에만 살아. 텃밭도 좀 있는 작은 집에서 살면 좋잖아.”
뿌리채소 가게 주인과 앉아 믹스 커피 한잔 나누어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하던 이명순(77) 할머니 얘기다. 주거환경개선사업이 본격적으로 이 마을에 진행되면 어디로 이사를 가야 할지 아직은 모른다. 분명한 건, 더는 도깨비시장 김삼남 아주머니를 만나 봉지 커피 한잔 마시는 일을 할 수 없다. 동양슈퍼 아주머니도 가게를 보느라 자리를 비우지 못하는 자신을 위해 먹을 걸 싸 가지고 놀러오던 동네 언니들을 더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신흥마을 골목길을 돌아보고 골목 끝에 우뚝 선 아파트를 바라보며, 우리가 부순 건 무엇이고 지은 건 무엇인지 다시 생각했다.
II 대동천에 붙어 도깨비시장이 있고 그곳에서 북동쪽으로 올라붙어 마을이 들어섰다
II 적당한 넓이를 확보한 골목에는 어김없이 의자 몇 개가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