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월 129호] 직구세대는 알 수 없는 정취가 숨 쉬는 곳 _ 양키시장
양키시장
대전역 앞, 중앙시장 중심으로 들어섰다. 수입전문상가라고 이름 붙인 건물 안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양키시장을 찾기 위해서는 제법 주위를 둘러봐야 했다. 이곳에 들어서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몇 해 전 이름을 붙인 듯 아직은 그 모양새가 양호한 수입전문상가 글귀 아래, 붉은 간판 여럿을 가득 붙인 양키시장 갈래와 시장통 안에 자리한 노란 간판의 양키시장 갈래다. 입구 모양새는 다르지만 어느 곳으로 들어서든 펼쳐지는 풍경은 비슷하다. 가게 이름을 새긴 노란 간판이 차례를 지키며 머리 위에 열을 맞추고 있고 가게 윈도우에는 제법 비슷한 옷가지와 화장품 등을 진열했다. 동전파스라고 불리는 5백 원짜리 크기의 일본 파스, 파랗지만 입술에 바르면 사르르 붉은색으로 변하는 반전 립스틱, 뒤꿈치가 갈라지는 겨울이면 자꾸만 손이 가는 바셀린 등 이제는 편의점에서도 쉽게 구입할 수 있는 물건들이 진열장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유명 명품 브랜드 이름을 붙인 가게도 여럿 보이고, 옛 슈퍼 이름으로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겨운 이름을 붙인 가게도 있다.
양키(Yankee)는 미국에서 남북전쟁 이후 남부 사람이 북부 사람을 칭하는 말이었다. 가치관이 달랐던 북부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던 만큼 부정적인 뉘앙스가 묻어난다. 이제 미국에서는 그 의미가 퇴색되었겠지만, 과거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에서 반미감정을 담은 속어로 양키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만큼 여전히 이 단어는 부정적인 의미가 숨어 있다. 왜 수입전문점이 모인 이곳을 양키시장이라 이름 붙였는지 묻는 말에 정확한 대답을 내놓는 사람은 없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단지 “외국 물건 파는 데니까”뿐이었다.
지금처럼 해외직구와 인터넷 쇼핑몰이 대중화되지 않던 시절, 양키시장은 외국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였다. 미국에서 건너온 화장품, 일본에서 건너온 다과, 이태리에서 건너온 패션잡화 등을 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은 어디서나 쉽게 외국에서 건너온 물건을 살 수 있는 시대가 됐지만, 한때 양키시장에서 볼 수 있는 물건은 부의 상징이자 부러움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때 그 시절 인기 있던 물건 몇몇이 여전히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곳은 여전히 인터넷이 익숙하지 않은 세대에게는 외국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장소로 남아 있다. 추운 겨울에도 제법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손님과 이를 가리기 위해 곱게 머리에 색을 들인 손님이 분주히 상가 골목 사이를 오갔다.
“이 집은 왜 계속 문을 닫아요. 외국 갔나? 나가면 돈 벌지 뭐.”
문을 닫은 가게 앞을 서성이던 손님이 애먼 가게에 대고 주인의 안부를 묻는다. 이어 어디선가 대답이 돌아오고 한참 메아리처럼 사람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 19년째 양키시장에 터를 잡아 온 강필형 씨의 가게 ‘겐조’에도 단골손님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추운 겨울, 시장에 나왔다가 언 몸을 녹이기 위해 잠시 들린 손님들 손에는 이내 넉살 좋은 사장님이 따뜻한 물에 타 놓은 믹스 커피가 들려 있었다.
“여기는 죄다 수입 물건만 파는 데예요. 예전에는 여기를 도깨비시장이라고 불렀는데, 하여튼 별게 다 있어요.”
낯선 이를 발견한 손님이 주인을 대신해 양키시장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보따리 장사꾼이 외국에서 물건을 들여오면 상가 주인들이 그 물건을 떼다 판다는 말도 덧붙인다. 이어 손님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택배 기사가 가게로 들어섰다. “단골이 구해 달라는 물건이 있으면 택배로도 보내 준다”라고 말하는 강필형 씨는 미리 포장해 놓은 물건의 주소를 확인한 뒤, 물건과 함께 “잘 부탁한다”라는 말을 택배 기사에게 건넸다.
II 별 물건이 다 있어 예전에는 도깨비시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비슷한 물건 사이로 쏟아지는 개인적인 말들
이내 단골손님 하나가 익숙한 듯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공간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키우던 강아지가 집을 나가 온종일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는 말을 하면서 가게 한편에 놓인 의자에 털썩 앉는다. 말에 따르면 잠시 문을 연 사이 강아지가 쏜살같이 밖으로 달음박질을 했다는 것이다. 강아지의 얼굴이 들어간 전단지를 만들어 동네 곳곳에 뿌리고 온종일 이곳저곳을 서성였다. 그래도 강아지가 나타나지 않자 망연자실해 있었는데 대전동물보호센터에서 강아지를 데리고 있다며 연락이 왔다고 한다.
“태평동에 있었어. 어째 거기까지 갔나 몰라.”
마치 영화 한 편을 찍듯 강아지를 잃어버린 단골손님은 가게에 모인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 한다. 이어 옆에 있던 손님이 강아지가 얼마나 가족 같은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주제를 몇 번씩 바꿔가며 손님들의 대화가 이어졌다.
영화 같은 이야기 몇 편을 들은 후 가게를 나와 좁을 골목을 걸었다. 손님들은 바삐 걸음을 옮기다가도 한 가게에 멈춰서 인사를 나눈 후 필요한 물건의 이름을 외쳤다. 저마다 단골집이 있는 듯 했다. 비슷비슷한 물건을 들여놓은 가게 중 기가 막히게 단골집을 찾아냈다. 주인은 재빨리 물건을 검은 봉지에 담은 후 손님의 안부를 물었다. 지난번 사간 물건을 손자가 좋아했는지, 날이 추운데 보일러 공사를 제대로 했는지 등. 옆집 숟가락 개수를 아는 이웃이 사랑방에 모인 듯 개인적인 이야기들이 수없이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