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29호] 미니픽션 민달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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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달팽이
 

아파트단지에서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릴 때 비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다. 대신 화단에 작은 수도를 설치해 통을 물에 씻을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주부 m은 자잘한 살림 중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일이 제일 싫었
다. 무더운 여름이면 하루만 지나도 음식물 쓰레기통에서는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m은 시어머니가 준 미나리와 상추가 냉장실 야채칸에서 썩어 가고 있는 걸 오늘 아침에야 발견했다. 베란다에 놓인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김치, 감자껍질, 양파, 생선 내장 등이 한데 섞여 속을 뒤집는 냄새를 풍기고 있
었다. 목을 타고 신물이 올라왔다. 속이 뒤집혀 한참 화장실 변기를 붙잡고 토하려 했지만 말간 위액만 나왔다. 그녀는 자신의 반응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임신했을 리는 없고, 이 정도 냄새에 토악질이라니. 하지만 정말이지 지독한 냄새였다.
하루에 한 번, 그것이 유일한 m의 외출시간이었다. 그녀는 오직 음식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서만 밖으로 나갔다. 결혼 10년 차에 접어들지만 아이는 없었다. 수없이 많은 병원에 다녔지만 결국 임신을 하지 못한 채 마흔을
넘겨 버렸다. 이제 단념했다. 전업주부인 그녀에게 임신은 중요한 문제였다. 시댁 식구들 앞에 서면 늘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올해 초, 시댁 식구들 앞에서 그녀는 일종의 고해성사이자 선언을 하며 울음을 쏟았다. 그건 일종의 자해이자 위협이었다. 온몸을 떨며, 이제 자신은 포기했다며 너무 힘들고, 더 이상 어쩔 수가 없다고, 그러니 그렇게들 아시고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말라는 요지의 말을 붉어진 얼굴로 그들을 쏘아보며 내뱉었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m의 얼굴은 추했다. 인공수정을 앞둔 암소처럼 몸통을 병원에, 타인 앞에 내놓아야 했던 시간이었다. 추해질수록, 묘한 쾌감이 그녀를 감쌌다. 그래서 그녀는 더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격하게 울부
짖었다.
그런데 막상 병원에 가지 않게 되자 m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텅 빈 시간이 그녀 앞에 사각의 링처럼 놓여 있었다. 그 링 위에 올라 있는 건 그녀 자신뿐이었다. 소파에 앉아서 베란다 쪽을 바라보았다. 녹음이 우거진 야산 너머로 도로가 내다보였다. 저 길을 걸어 먼 곳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하다가도 내리쬐는 햇볕 때문에 그녀는 이내 단념했다. 리모컨을 들어 티브이 전원을 켰다. 화면에 불이 켜지며 밝은 얼굴의 사람들이 왔다 갔
다 했다. 한참을 멍하게 티브이를 시청하다가 그녀는 음식물 쓰레기 버리는 걸 깜빡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사소한 일들도 맥없이 놓치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녀는 얼굴을 찌푸린 채 악취가 풍기는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파트에서 공동으로 관리하는 커다란 음식물 쓰레기 수거함은 가득 차 있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음식물 위로 m은 쓰레기통을 뒤집어서 부었다. 손에 썩은 물이 튀었다. 통을 들고 수돗가로 가 서둘러 수도꼭지를 틀었다. 물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졌다. 쓰레기통 옆에 놓여있는 수세미로 통을 문질러 닦았다. 시멘트를 발라 놓은 작은 수돗가 중앙의 수챗구멍에는 음식물 찌꺼기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그 옆에 통을 뒤집어 놓고는 잠깐 산책을 하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15여 분 뒤 돌아와 통을 들자 그 속에는 새끼손가락 한두 마디 정도 크기의 민달팽이 서너 마리가 들러붙어 있었다. 등에 작은 줄무늬가 있었고 색은 보통의 달팽이보다는 좀 더 짙어 보였다. 미끈미끈한 점액을 내뿜으며 유연하게 움직였다. 태연하게 들러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겨우내 보이지 않다가도 초여름에 나타나 꾸준히 그 숫자를 불려 갔다. 그녀는 그것들을 떼어 내기 위해서 통을 들고 바닥에 탁탁 쳤다. 하지만 한 마리만 떨어지고 나머지는 그대로 붙어 있었다. 그녀는 주저하다가, 손으로 떼어 냈다. 부드럽고 차가웠다. 끈끈한 점액이 손에 묻어났다.
m은 한 마리, 한 마리 만질 때마다 묘한 쾌감을 느꼈다. 손끝에 닿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민달팽이를 쳐다봤다. 예전에는 징그러워 손을 대지도 못했다. 수도꼭지를 틀어서 세찬 물줄기로 씻어 냈는데 직접 손으로 떼어 낸 건 처음이었다. m은 그날 이후로 민달팽이를 꼭 손으로 떼어 냈다. 수돗가에 머물며 그것들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갔다.
하루는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와 소파에 누워 낮잠을 자던 중이었다. 얕은 꿈속에서 민달팽이들이 그녀의 종아리를 타고 기어 오고 있었다. 잠결에 손으로 훌쳐 냈다.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녀의 손에 닿는 종아리가 마치 민달팽이의 피부처럼 미끈대는 듯했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상체를 쉽게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몸을 움찍거리며 소파에서 벗어나려 시도하는 순간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이상하게도 아무런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몸이 바닥에 찰싹 달라붙은 듯한 편안함이 느껴졌다. 온몸이 서늘하고 축축했다. 그녀는 일어나 걷는 대신 몸을 미끄러뜨리고 마룻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허리가 부드럽게 아코디언처럼 주름졌다가 펴지며 앞으로 나아갔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 보였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한 건지 잘 파악이 되지 않았다. 힘겹게 머리를 틀어 아래쪽을 바라보니 인간적인 것이 죄다 사라져 있었다. 가령 손가락과 발, 배꼽 같은 것들. 점액질을 내뿜는 커다란 덩어리만이 자신의 머리 뒤쪽을 따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이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흐뭇할 지경이었다. 언젠가는 내 이럴 줄 알았지, 하고 그녀는 말을 하려 했으나 그 어떤 것도 소리가 되지 못했다. 두 쌍의 더듬이를 세차게 흔든 것, 그것이 전부였다.
현실과 꿈의 경계는 모호했다. m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몸을 미끄러뜨리며 집 안 곳곳을 돌아다녔다. 민달팽이의 점액으로 바닥이 죄다 흥건해져 버렸다. 자신이 민달팽이가 된 것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는 것만 같았다. 민달팽이가 된 순간 그녀의 온몸은 어떤 단 하나의 사명감에 사로잡힌 듯했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딘가를 찾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 적절한 장소가 집이 아니라는 걸 그녀는 온 집 안을 돌아다닌 다음에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베란다를 향해 기어갔다. 베란다 난간을 지나 벽을 타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공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화단의 풀 위에 몸통이 떨어지는 순간 둔탁한 충격이 m을 덮쳤다. 그녀는 잠시 후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무성한 잡초 사이를 기어갔다. 구석지고 습한 흙더미 사이로 꼬리를 집어넣었다. 그녀는 평생 느껴 보지 못한 안정감을 맛보았다. 불안이 사라졌다. 완전해진 느낌이었다. 민달팽이는 암수가 한 몸으로 되어 있다던 사실이 떠올랐다. 둥글고 부드러운 몸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었다. 작은 통증과 함께 몸속에서 무언가가 응축되었다. 뱃속에 단단한 것들이 뭉쳐지면서 뒤쪽으로 쏠렸다. 온몸에 힘을 주자 노랗고 투명한 알들이 살을 찢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것은 토악질과 비슷했다. 갇혀 있던 자기 자신을 밖으로 게워 내는 듯 홀가분했다. 고통스러웠지만 이 고통 끝에 모든 것이 완성될 것이다. 비명을 질렀지만 그것은 소리가 되지 못했고 사방은 고요했다. 어디선가 불어온 서늘한 바람이 점액 범벅이 된 등허리를 쓸어 주고 갔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투명하고 노란 알들이 저들끼리 뭉쳐져 축축한 흙 속에 자리 잡았다.
반짝이는 것이 거기 있었다.
m의 더듬이가 아래로 꺼지고,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글 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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