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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27호] 우리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공정여행가로 살아가는 일은 재밌어 보였다. 기부에 의존하는 기존 비영리단체와 달리 가치 있는 소비를 끌어낸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소비하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이 무엇인가를 소비하기 마련이라면 가치 있는 소비를 만들어보고 싶었다. 마음이 동해서 지갑을 여는 사회, 그리고 그 소비가 가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사회를 보고 싶었다. 그렇게 공감만세 인터내셔널 일원이 되어 필리핀 지사에서 제법 오랜 시간 머물렀다.
작년 말 새로운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공감만세 본사가 있는 대전에 자리 잡았다. 여행사업부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상황이었다. 그즈음 공감만세 사무실 내에서 합병 이야기가 오갔다. 합병은 필리핀 지사에서도 귀동냥으로 들어왔던 이야기였다. 공감만세 고두환 대표와 월간토마토 이용원 대표가 필리핀 지사를 찾았을 때 두 사람이 주고받던 합병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듣게 됐다. 합병이라는 일이 그저 자연스러운 일상적 사건 중 하나처럼 느껴졌다.
행정적으로 합병이 이루어지고 사무실에 낯선 이들이 북적일 때도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내가 맡은 새로운 일을 바쁘게 익힐 뿐이었다. 다만 두 기업의 분위기가 다르다는 정도만 강하게 인지됐다. 사업 특성상 직원이 자리를 많이 비우는 공감만세와 달리 월간토마토에는 언제나 사람이 북적였다. 정적이 흐르던 사무실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흘렀다.
함께 협업해 일을 진행하자 비로소 모든 것이 새로워 보였다. 여행 상품을 홍보할 디자인 물을 제작하기 위해 디자이너와 회의하는 시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세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사물을 깊게 보는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감만세가 쌓은 콘텐츠에 색을 입힐 수 있었고, 공감만세가 만든 변화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니즈가 강한 시기에 두 회사가 합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모호한 공정여행이라는 개념을 쉽게 풀어 내야 할 변화의 시점에 바람이 불어왔다.
여행은 주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누구나 낯선 곳에 발을 들인 순간 끊임없이 주체적으로 선택을 해야 한다. 합병된 새로운 조직도 여행과 같다. 주체성을 회복하는 과정. 정리가 안 되고 더 엉망이 될 수도 있지만 주체적으로 재밌게 일할 수 있는 회사. 지금 새로운 조직은 주체성을 찾고 있다고 생각한다.
두 조직이 합병하는 시기에 월간토마토로 면접을 보러왔다. 사무실에 들어선 순간 젊은 직원들이 밝게 인사를 한 점이 인상 깊었다. 일부러 젊은 사람만 고용하는 건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처음 면접장에 들어서기 전까지 월간토마토에 입사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잡지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어 월간토마토에 지원했고, 면접장에서 합병 이야기를 듣게 됐다. ‘순간을 기획하고 삶을 디자인하다’ 면접장에서 이용원 대표는 합병한 조직의 사업 방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합병한 조직이 그리는 모습은 광활했다. 그리고 그 광활한 이야기를 말하는 대표를 보며 역시 글쟁이구나 속으로 생각했다. 고두환 대표의 존재는 합병한 후에 알게 됐다.
의외로 첫 출근한 사무실은 조용했다. 군데군데 비어있는 자리가 보였다. 코디네이터와 기자의 자리였다. 합병한 조직의 브랜딩 작업이 주어졌다. 조직에 새로운 옷을 입히는 작업이었다. 브랜딩에 앞서 여행 사업과 출판 사업이 같이 할 수 있는 아이템을 생각해 봤다. 여행 사업의 이야기를 토마토에 알리고 여행과 함께 단행본을 알리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고민했다. 아직 어떤 방향으로 이 둘을 가져가야 할지 결론이 나지는 않았지만 적극적으로 아이템을 개발해야 한다.
우선적으로 모먼트를 시각적으로 표현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순간을 기획하고 삶을 디자인한다는 새로운 조직의 방향을 강조하고 싶었다. 순간이라는 큰 프레임을 네모난 모양으로 표현하고 그 모양 중간을 비워 두었다. 이는 순간을 잡아내는 프레임이고 출판을 상징하는 판형이기도 했다. 앞으로 계속될 브랜딩 작업은 각 부서의 담당자와 함께 상의하고 개발하고 싶다. 그렇게 새로운 조직의 인식을 입힌 디자인으로 합병한 조직의 새로운 가치관을 시각화하고 싶다.
수익을 내는 것, 좋은 일을 하는 것.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공감만세와 월간토마토가 가진 순수성과 차별성을 지키고 싶다. 금전적인 이유로 상업적으로 변하는 다른 공정여행사, 잡지사와 달리 우리의 본질을 가져가면서 모먼트를 탄탄하게 구축하는 구조를 다함께 만들기를 바란다.
북카페 이데 최웅규의 이야기
이데는 토마토의 상징이었다. 토마토가 부사동에서 대흥동으로 사무실을 이전하고 1년 뒤 이데를 인수했다. 이데가 문을 연 즈음 대흥동은 지금보다 침체돼 있었다. 사람이 많이 드나들지도, 카페와 문화공간이 줄지어 늘어서지도 않았다. 예술가가 모여 작당모의를 해보자는 생각 하나로 이데 문을 열었는데 생각보다 잘됐다. 자연스레 이데에 사람이 모였고 네트워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월간토마토 구독자와 예술가들이 드나들며 만남의 장소, 문화 아카이브의 장이 되어갔다. 이데는 북콘서트도, 소규모 공연도, 미술작품 전시도 활발히 하며 문화 공간으로서 입지를 다져나갔다.
그렇게 찬란한 시간을 보내던 이데가 작년 10월 문을 닫았다. 꼭 지금처럼 차가운 겨울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때였다. 여러 계절이 지나가고 이데가 다시 문을 열었다. 공감만세와 월간토마토가 합병한 공간 1층이었다.
일 년 사이 이데의 주소가 바뀌었고 이데를 운영하는 조직의 이름이 바뀌었다. 하지만 이데의 역할은 예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네트워크를 만드는 공간. 과거 이데가 문화에 치중했다면 지금은 여행까지 할 수 있는 아지트 같은 역할을 기
대한다. 이데를 베이스캠프 삼아 합병된 조직의 원도심 투어를 진행하고, 지역 출판에 대해 강연하고, 공정여행가를 양성하는 사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이런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는 이데에서 여행자가 정보를 교환하고, 더불어 다양한 문화 행사를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싶다.
합병한 조직의 구성원들에게도 이데는 네트워크를 만드는 공간이다. 같은 가치관을 가진 두 조직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며 합병했다. 새로운 출발을 만들어나가는 시작점의 중심에 이데가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일하던 사람이
모인만큼 이데에서 서로 합을 맞추고 생각을 나누면 시너지 효과가 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데는 예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다. 인위적으로 주인이 콘셉트를 정하지 않았기에 사람이 모이고 그들의 활동으로 채워지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점점 이데스러운 분위기가 형성됐다. 새로운 이데도 다르지 않다. 아직
은 아무것도 없는 이 공간을 이데스럽게 만들어 나가는 건 여전히 공간을 점유하는 사람의 몫이다. 어떤 사람이 이곳에 머무르는지에 따라 이데의 분위기도 점점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 분위기에 따라 새로운 사람이 이곳을 채워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