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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27호] 슈퍼마켓 슈퍼매치
슈퍼마켓 슈퍼매치
시골 마을의 뉴스라는 게 상현이 딸이 결혼을 한다느니, 옥희네 아들이 취직을 했다느니, 나이 90이 가까운 경수 아버지가 오늘내일한다느니, 아니면 마을청년회에 100만 원을 내놓았다는 영민이의 성공담 정도다.
지난달, 내 농막이 있는 마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뉴스 중에 으뜸은 면내에 새로 들어서는 대형마트 소식이었다. 면 소재지에는 사거리를 중심으로 고만고만한 슈퍼마켓 네 개와 오래된 대형마트가 자리 잡고 있다. 면사무소 옆에 새로운 대형마트가 개장 준비를 하면서 마을 사람들은 엄청난 규모에 대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주차장이 얼마나 큰지 학교 축구장여.”
“그렇게 넓어? 난 아직 구경도 못혔네.”
“차 100대는 들어 가겄던디.”
“그러믄 우리 동네 차가 다 들어가도 남는다는 소리네.”
자동차 100대가 들어서는 주차공간은 아니더라도, 족히 50대가량은 들어갈 만큼 규모가 상당했다. 쇠락한 면의 상황을 고려하면 걱정할 정도로 큰 주차장이었다. 마트의 이름으로 봐서 체인점은 아니었다. 간판에는 그 지역 이름이 크게 들어갔다. 어느 정도 재력이 있는 이가 야심 차게 유통업을 시작한 것으로 보였다. 면내에 있는 슈퍼마켓을 평정하겠다는 욕심이 들어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기서는 편의상 A마트라고 부르기로 한다.
A마트가 문을 연 것은 지난 추석 연휴를 앞둔 사흘 전이었다. 내가 마트에 처음 간 것은 개업한 지 일주일 후였다. 마트는 개업특수를 보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 계란 한 판밖에 안 파나?”
“100판도 팔어유, 걱정하덜 마시고 들고 갈 수 있는 힘만 있으면 다 들고 가슈.”
계란 파동이 있는 직후라 그런지 한 할머니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계란 얘기를 꺼내자, 중년의 아저씨 직원이 큰 목소리로 안심시킨다. 말이라는 게 누군가 끼어드는 맛이 있어야 재미있어지는 법, 중년의 아줌마 직원이 거든다.
“그 많은 걸 언제 다 들고 가남유, 햇살이 뜨거워서 해전 가다 보면 병아리도 나오겠네.”
여기저기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계란을 사러 나온 할머니도 살포시 웃는다.
마트에서는 개업초기라 이런저런 생활용품을 주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옷을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가 비누 두 개를 들고나오면서 계산원에게 말을 걸었다.
“지름 준다며!”
“할머니 뭐요?”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계산원이 다시 물었다.
“지름 준다며!”
할머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줄 뒤에 서 있던 아저씨가 말했다.
“기름 말하는 겨, 기름, 식용유 있잖여.”
“아 식용유요? 그거는 2만 원 이상 사야 드리는 건데요.”
“다음에 더 살 테니께 이번엔 그냥 주면 안 되나?”
“할머니, 한 번에 2만 원 이상 사야 드리는 거예요.”
식용유 한 병을 놓고 줄다리기가 이어질 것으로 보이자 중년의 아저씨 직원이 할머니를 데리고 나가며 천막이 쳐져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저기 가서 한 병 받아 가셔유. 집에 가셔서 지름 둘러 호박전 부쳐 드시면 맛있겠네유.”
A마트가 동네 구멍가게나 다른 대형마트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인 것은 장어를 즉석에서 손질해 판매를 한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제법 큰 규모의 수족관을 설치해 놓은 걸 봐서 배포가 큰 기획으로 보였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아저씨 한 명이 손질한 장어를 한 봉지를 들고 계산대 앞으로 다가왔다. 아저씨 앞에는 아줌마 한 명이 서 있었다. 계산을 하는 도중에 일행으로 보이는 또 다른 아줌마가 수세미와 샴푸 그리고 고무장갑 하나를 얹어 놓았다.
“이거 일 플러스 일인데요.”
“아 그래요, 잠시만요”
아줌마가 횡재를 했다는 듯 뛰어가 고무장갑 하나를 가져왔다. 계산원이 낮게 한숨을 쉰다.
“고무장갑이 아니라 샴푸가 일 플러스 일인데요.”
상황이 이쯤 되자 장어봉지를 들고 계산을 기다리던 아저씨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기운 떨어져 장어 한 마리 먹어 볼라구 혔는디, 이렇게 기다리다가 오늘 내로 먹을 수 있으려나?”
계산을 하던 아줌마가 뒤를 돌아보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유, 그럴 수 있쥬, 일 더하기 일이라고 크게 써 있는 것도 아니고, 나도 눈이 침침해서 잘 보이지도 않던디.”
아저씨는 넓은 아량의 소유자라는 듯 장어 봉지를 흔들며 말했다.
개업한 지 3주가 지난 뒤에 A마트를 다시 찾았다. 주차장에는 10대 남짓의 차만 가을햇살을 맞으며 몸을 달구고 있었다. 그중 몇 대는 아마도 직원들 차로 짐작됐다. 마트 안에는 너덧 명의 손님들이 물건을 고르고 있었고, 계산대에 있던 젊은 여성 대신 중년의 아줌마 직원이 상품을 정리하며 계산대를 오가고 있었다.
개업특수의 거품이 빠지면서 상품 진열과 전시는 안정적인 분위기로 접어든 눈치였다. 마트 내 정육코너에서는 덩어리째 들어온 고기를 작업하는 직원 하나가 부지런히 칼질을 하고 있었다. 아저씨 직원은 상품관리를 하는지 작은 단말기를 들고 분주하게 매장 안을 다녔다.
A마트의 개장과 함께 더욱 분주해진 곳은 건너편에 있던 대형 B마트였다. 체인으로 운영되는 곳이다 보니 오래된 매장은 허름했지만 전국적인 인지도를 가지고 있어 비교적 영업이 잘된 곳이었다. B마트가 한판 승부를 벌이려고 마음을 먹은 것은 A마트 개장 한 달 전쯤이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훨씬 이전부터 리모델링 논의가 있었을 것이다. B마트가 새롭게 변신하기까지는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낡은 간판을 바꾸고 매장의 진열 공간을 새로 꾸미고 페인트를 다시 칠하면서 재도약을 위한 변신을 한 것이다.
A마트는 넓은 주차장, B마트는 전국체인이라는 브랜드가 장점이다. 물론 상품구성은 비슷했지만 B마트는 바로 옆에 은행이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유동인구가 많은 편이었다. A마트 주차장에 차를 세워 놓고 슬그머니 B마트로 가는 이들도 있었다. B마트의 주차장은 채 10면이 되지 않았다.
A마트와 B마트의 경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전국적인 브랜드를 가진 B마트가 약간의 점수 차이로 판정승을 거두었다는 별 근거 없는 분석도 있지만, 아직은 팽팽한 분위기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사거리 근처에서 영업을 하는 작은 구멍가게들은 매출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빨래하다가 손에 비누거품을 묻힌 채 거스름돈을 건네주던 C슈퍼와 사과 하나는 맛있게 파는 D슈퍼와 주인장도 물건을 잘 찾지 못하는 E슈퍼의 한숨 소리는 더욱 깊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