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 127호] 그 정도 고생 안 하는 사람 있간?
그 정도 고생 안 하는 사람 있간?
영양정미소 주소는 ‘청양군 운곡면 영양리 524-22번지’이다. 건물 상량에 쓰인 단기 4295년이라는 한자로 1962년에 지은 걸 알 수 있다. 55년 된 정미소 건물은 2차선 도로 옆에 58평의 면적을 차지했다. 녹이 낀 푸른색 양철지붕과 칠이 벗겨진 벽에서 시간이 느껴진다. 철판에 페인트로 쓴 영양정미소 간판 글씨는 군데군데 벗겨졌다. 전화번호가 넷이다. 개중 휴대폰 번호가 셋인데 하나는 017로 시작하고, 하나는 원래 있던 번호에 뭔가를 붙였다가 떼어 낸 자국이 남았다. 번호가 바뀔 때마다 수정하거나, 추가했던 모양이다. 붉은색 글씨가 가장 최근 것으로 보인다.
II지은 지 55년 된 영양정미소 외관
하루에 100가마를 찧었어
양철문을 양쪽으로 활짝 열면 정미소 내부가 보인다. 제법 높은 천장 아래 키 큰 기계가 자리했다. 2층 높이는 될 법한 기계 위로 먼지가 앉았다. 오랜 시간 쌓여 온 먼지다. 배석기 씨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먼지를 턴다. 그는 37년 동안 정미 기계와 함께했다. 가을마다 벼를 찧어 흰 쌀을 가마니에 담았다. 한 가마에 80kg. 장정 한 명의 무게다. 그 무게를 이고 지고, 옮겼다. 한창 바쁠 때처럼 하루에 100가마를 찧는다면, 사람 100명은 들었다 놓았다 한 거다. 그만큼의 무게가 그와 함께 이곳을 지나갔다. 여전히 정미소는 돌아가지만 그때만큼의 무게를 감당하지는 않는다. 세월과 함께 공간은 비어지고 어느새 먼지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영양정미소의 낡아 가는 외양은 그래서 조금 쓸쓸하다.
배석기 씨는 80년 5월쯤 이곳을 양민석 씨와 함께 인수했다. 당시 정미소는 2,600만 원이었다. 양민석 씨와 1,300만원씩 부담했다. 동네에 정미소는 하나였다. 동네에서 내놓았다는 얘길 듣고 벼농사보다는 벌이가 나을 것 같아 인수했다. 장가갈 때 받아 나온 논 서 마지기와 밭두 마지기를 팔고 빚도 얻어 샀다.
“그때는 동네마다 발동기 갖고 한 사람씩 정미소를 했어. 여섯 명이 합쳐서 이거를 지었어. 처음 인수했을 때 부자 된 거 같았지. 한 사람이랑 2년 하고, 삼룡이 아버지랑 2년 하고, 그 후로 인수했지.”
배석기 씨가 혼자 정미소를 운영하게 되자 아내인 윤정숙 씨도 돕기 시작했다. 그때는 구멍 난 자루를 꿰매서 다시 쓰기도 했다. 성수기엔 하루종일 여덟 시간 작업해서 100가마 이상 찧었다. 80kg 한 가마에 4kg을 삭고로 뗐다. 1980년대에는 80kg짜리 쌀 한 가마에 3만 원 정도 했다. 배석기 씨는 영양리 토박이다. 70평생을 여기서 태어나서 여기서 살았다.
“영양리 589번지에서 태어나 갖고, 형님 댁에서 나와서 결혼하고 분가해서 살림을 난 거지. 이 자리서 나서 이 자리에 있는 거여. 다른 데 가라고 해도 정들어서 못 가지.”
윤정숙 씨가 1972년도에 시집왔을 때는 마을에 전기도 안 들어왔다. 전화도 하려면 우체국 가서 해야 했다. 그러고서 8년 있다가 정미소를 인수했다. 배석기 씨와 윤정숙 씨 사이에는 다섯 남매가 있다.
젊을 때 별일을 다 했다. 남의 밭 갈아 주고, 경운기 짐 실어 주고 품값을 받았다. 되는 대로 가리지 않고 일했다. 정미소 인수하고도 악착같이 일을 했다. 바지런함이야말로 두 사람의 가장 큰 밑천이었다. 돈 쓸 데 쓰지도 못했다. 오로지 일만 했다. 돼지도 먹이고, 소도 키우고, 염소도 키우고 가축은 다 했다. 새벽에 밝기만 하면 일어나서 일을 다녔다. 윤정숙 씨는 밤중에 애를 재워 놓고 일하러 갔다가, 막내가 엄마 찾아 밖으로 나와 개울 쪽으로 기어 나갔던 아찔한 일을 기억한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정미소도 예전 같지 않다. 전에는 자기 동네에서 벼를 찧는다는 원칙 아닌 원칙이 있었지만 이제는 차가 있어서 사람들이 다른 데 가서도 찧는다. 게다가 자동화된 큰 정미소가 생기면서 일거리가 많이 없어졌다.
지금이야 그렇지만 좋았던 시절도 있다. 1990년부터 2000년까지가 전성기였다.
“쌀이 많을 적에는 도매 장사가 와서, 도매 장사한테 실려 보내고 그렇게 했는데, 10년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그 사람들이 안 댕기는 거야. 그래서 내가 팔러 다니는 거야. 한 달이면 두세 차, 여섯 차도 되고, 30가마씩 싣고서 팔러 댕겼지.”
한창 때는 서울, 천안, 여수도 갔다 왔다. 곡주들한테 위탁을 받거나, 벼를 찧는 양이 적으면 쌀을 매입해서 팔았다. 부부가 쌀가마를 한 가득 트럭에 싣고 가서 낯선 도시에 일일이 배달을 하는 일이 고생스러웠을 텐데도, 그 이야기를 하는 배석기 씨의 눈에 웃음이 어린다. 몸은 고단해도, 재미가 있었던 시절이었나 보다. 그렇게 살림을 불려 자식을 건사했다. 손때가 탄 장부에 도정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눈에 띌 정도로 그 횟수가 줄었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변화가 그 장부에서도 읽힌다.
II배석기 씨와 윤정숙 씨, 37년 동안 영양정미소를 운영했다
한 번에 빠져나가면 좋지
정미소 입구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공기가 선뜩하다. 기계가 돌아가지 않아 고요하기만 하다. 엔진이 돌아가는 순간 이곳은 살아나기 시작한다. 고무벨트를 따라 동력이 전달되며 기계는 하나의 힘으로 돌아간다. 진동과 소음이 순식간에 공간을 채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잠잠하기만 하다. 시커먼 기름때에 절은 엔진은 기계 뒤쪽의 어둑한 곳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처음에는 발동기를 돌려 그 동력으로 기계를 움직였고, 그다음에는 통통배 엔진을 썼다. 통통배 엔진은 특히 시끄러웠다고 한다. 지금은 버스 엔진을 개조해서 쓴다.
엔진의 힘으로, 이 큰 기계가 돌아가고 벼는 정미 기계를 거쳐 흰 쌀이 되어 나온다. 그 과정은 비교적 단순하다. 벼를 운반해 기계에 넣는다. 바닥의 작은 홈이 그 입구다. 벼를 넣으면, 첫 단계로 석발기가 돌과 이물질을 골라낸다. 현미기로 들어가서, 왕겨풍구를 거쳐 왕겨가 배출된다. 완전히 벗겨진 현미하고 덜 벗겨진 벼하고 분리한다. 도정기에 보관을 했다가 정미기로 간다. 1단 정미기, 2단 정미기, 3단 정미기 세 대를 거친 다음 쌀 미각기, 연미기를 통해서 쌀 받는 데로 나온다. 그러고는 쌀을 자루에 담는다. 쌀을 제때 담고, 옮기는 게 일이다. 기계는 쉴 새 없이 돌아가기에 벼를 넣는 쪽, 쌀을 받는 쪽 최소 두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꽤 오랜 시간 배석기 씨와 윤정숙 씨는 한 조를 이루어 영양정미소의 심장인 엔진과 함께 움직였다.
기계 너머로 엔진이 있는 공간이 보인다. 그곳에는 처음 정미소를 지었을 때 주인이 살았다는 방 두 칸이 있다. 지금은 쓰지 않은 지 오래라 쌀겨만 잔뜩 쌓여 있다. 정미소에서 쌀을 도둑맞은 적이 있어 그 방에서 자기도 했다.
정미소에 문은 모두 네 개다. 도로 쪽을 마주한 곳에 양쪽으로 열리는 큰 문이 두 개, 측면의 작은 문이 두 개다. 그 문 안쪽마다 가느다란 전선이 가로질러 있다. 그것이 바로 경보기다. 밖에서 누군가 강제로 문을 열면 전선의 연결 부분이 떨어져 나가고, 정미소와 5분 거리에 있는 집에 경보가 울리는 방식이다. 단순하지만 그 덕에 두 번이나 도둑을 쫓았다.
“2010년도야, 한 가마가 12만 원 할 때. 도둑을 두 번 맞았어. 경보기 소리가 나서 나오니까, 차를 놔두고 슬슬 걸어가더라고. 뭐라고 말을 거니까 얼렁뚱땅 대답도 했어. 차도 훔친 거였어. 그냥 보내 줬지.”
그 뒤로는 쌀 지키려고 정미소에서 잤다. 다행히 그 두 번 외에는 도둑이 얼씬거린 일이 없지만, 이제는 도둑맞을 쌀이 쌓여 있는 날도 많지 않다. 도둑이 들던 시절은 그래도 그나마 사정이 좀 나았을 때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55년의 시간이 쌓인 이 공간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날짜가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이곳에 길이 날 예정이라고 한다. 배석기 씨가 영양정미소와 함께한 건 37년이다. 그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는 청년에서 노인이 되었고 아이들은 커서 장년이 되었다. 낡아 버린 기계에는 그 시간만큼 먼지가 앉았지만 여전히 너끈히 벼를 찧는다. 당연하게 이어 온 삶의 장면들이었다. 가을이 되면 벼를 베고, 벼를 찧고, 그 쌀을 팔아 돈을 벌고, 그 쌀을 먹고 누군가는 키가 컸다. 그리고 이제 어쩌면 그 기계들은 영원히 움직이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58평의 공간은 새로 생길 예정인 도로에 일부가 잘려 나간다. 지극히 일부라고 해도 건물은 철거되고 기계는 부서져 고물이 될 테다. 이제 그 기계가 내던 웅장한 소음과 거기서 쏟아지던 하얀 쌀을 기억 속에서만 만날 수 있다. 하루 100가마를 이고 지던 노동은 다 쌀이 되고, 밥이 되고, 피와 살이 되었다. 그런 다음 모두 사라졌다.
“농사짓는 거보다 정미소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어. 그때 팔았던 땅을 다시 샀지. 다시 사게 되어서 좋았어. 정미소 인수하고 10년 후에 여섯 마지기를 다시 산 거야. 아들딸 오남매 낳아서 좋은 대학은 아니지만 다 가르친 것이 내가 한 일이라고 자부하는 거지.”
10년 전만 해도 정미소는 가을에 바빴다. 여름철 모내기 끝내고 7월, 8월에 벼를 보관하면 쌀값이 올라갔다. 추석이 되기 전에 보관했다가 내면 추수 직후에 정미해서 내놓는 것보다 20~30프로 쌀값을 더 받았다. 지금은 묵혀 놓으면 더 내려간다. 요즘은 또 각 가정마다 자가 도정기가 있어서 일거리가 없다. 작년 10월부터 3개월 찧으면 끝이다. 일거리가 꾸준히 있긴 한데 양이 얼마 안 된다.
정미 기계의 본체는 영구적이다. 그런데 정미기 아미라고 하는 걸 수시로 교체해 줘야 한다. 그래야 쌀 도정이 잘된다. 고무, 정미기 롤러를 교체하고, 스쿠도 오래 쓰면 교체해 주고 바가지도 닳아서 교환해 줘야 하고, 내부 부속을 항상 교환해 줘야 한다. 그렇게 제 몸 돌보듯 기계를 오래 들여다보아 왔다.
“100가마라든지, 한 번에 찧는데 고장 안 나고 잘 빠져나가면 기분이 좋지. 잘 돌아가면.”
일하면서 좋을 때는 언제냐고 물으니, 기계가 순조롭게 잘 돌아가 한 번에 찧어지는 때 그는 기분이 좋다고 한다. 기계와 작업자의 합이 잘 맞는 순간이다.
II영양정미소 간판
그때 시절에 그렇게 쌀이 귀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