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26호] 새로운 7박 8일의 시작

SHOW ME THE Kumamoto SPECIAL - 새로운 7박 8일의 시작

8월 28일부터 9월 4일까지 구마모토 부흥 지원 공정여행을 다녀왔다. 이 프로그램은 A-PAD Korea와 씨빅포스(Civic Force)가 협력해 구상한 프로그램이다. A-PAD(Asia Pacific Alliance for Disaster Management)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 재난에 공동대응하기 위해 만든 민간 주도 재난대응 전문 국제기구다. 씨빅포스는 A-PAD의 전신이 되는 NGO 단체다. 공감만세와 A-PAD Korea, 씨빅포스까지 총 여섯 명의 스텝이 구마모토 현지 안내자로 나섰다. 한국의 풀뿌리사회지기학교 학생 여덟명과 동일본 대지진 당시 피해 지역에서 살았던 대학생 일곱 명이 만나 팀을 이루었다. 구마모토 부흥 지원 공정여행 프로젝트에는 “구마모토 관광 부흥을 위한 콘텐츠를 만든다”라는 미션이 있다. 또한, 한국 학생들에게는 개인이 준비한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한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한국 학생 여덟 명은 영상, 글, 사진 등의 콘텐츠로 구마모토를 홍보하고, 기록한 것을 모아 책으로 출간할 계획이다. 《월간 토마토》에서도 동행했으며, 10월호부터 총 세 편으로 연재 할 예정이다.

구마모토 공항으로 가지고 간 환상은 실로 대단했다. 지진 피해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명확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거대한 사명감 또한 없지 않았다. 구마모토에 가기 1주일 전인 8월 21일, 우리는 경주에 갔다. 경주시의회의 유일한 더불어민주당 의원인 정현주 의원과 지진 피해 당시를 책으로 기록한 《현관 앞 생존배낭》 팀을 만났다. 2016년 9월 12일 규모 5.8의 경주 지진을 겪은 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앞서 지진을 겪은 구마모토에 가는 우리의 일정은 해답을 찾을 수 있는 희망으로 보였다.

경주시는 9월 12일 오후 7시 44분 규모 5.1의 전진, 48분 후 5.8의 본진, 일주일 후인 19일 오후 8시 33분 규모 4.5의 지진이 또다시 발생했다. 부상자 23명, 재산상 피해 1,118건이라는 수치 이외에도 체감하는 불안감 때문에 공원에 텐트를 치고 2주 넘게 머무르던 시민도 있었고, 가족 모두가 모여 자동차 안에서 잠을 이루던 사람도 있었다.

“의회에서 할 수 있는 게 굉장히 제한적이었어요. 일단 저희 역시 처음 경험하는 거라 무엇보다도 무기력한 느낌이 가장 힘들었어요. 당장 밖에서 밤을 지새우는 주민에게 안전하니 들어가 계시라고 해야할지, 더 바깥에 계시는 게 좋겠다고 이야기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어요. 또 지진 이후 관광도시라는 경주 특성상 지진 자체를 부정하려는 지역 사회의 분위기가 있었어요. 경주 지진이라는 명칭 자체에 거부감을 보이는 분위기였어요. 오히려 지진을 계기로 안전한 도시 경주를 만들기 위한 과정과 결과를 홍보하는 게 관광지로 적절한 전략이 아니었을까, 지진 이후에는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경주시의회 정현주 의원의 이야기다. 경주시에서 만난 사람들은 8월 28일 13시 10분 비행기로 떠나는 우리에게 ‘기대’라는 배낭 하나를 더 건네주었다.

제1화 한국 vs 일본 지원자들의 만남

‘우리’는 풀뿌리사회지기학교의 ‘배울이’들이다. 풀뿌리사회지기학교에서는 ‘학생’이라는 말 대신 ‘배울이’라는 말을 쓴다. 교수라는 말 대신 ‘가르칠이’라고 한다. “낱말에 밴 고정관념을 벗기고, 배울이와 가르칠이를 평등한 위치에 둔다”라고 해석했는데, 배울이 대장인 민주는 “글쎄요. 그냥 멋있어 보이려고 쓴 말이 아닐까요? 어차피 한자를 한글로 푼 거지 같은 말이잖아요”라고 말했다. 풀뿌리사회지기학교는 대안대학이라는 낱말로 설명할 수 있다. 취업이나 경쟁 사회에서의 생존이 아닌 다양한 삶과 사회의 모습 면면을 들여다 보는 교육을 지향하는 학교다. 구마모토에는 풀뿌리사회지기학교의 배울이 중 민주, 권호, 연태, 다은, 원강, 혜진, 미르, 민준, 여덟 명이 떠났다.

“저는 제주도에 있을 때 구마모토로 가는 게 결정돼서 거기서 뭘해야 할지 설명을 잘 듣지 못했어요.”

때로는 출발 직전까지 이렇게 넋놓은 소리를 하는 배울이도 있었지만, 무사히 구마모토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막 가을에 인사하던 참에 국경을 넘은 우리는 한 시간 이십 분 만에 다시 한여름의 품에 안겼다. 구마모토에서는 (주)공감만세와 A-PAD Korea, 씨빅포스의 스태프, 일본 각지에서 온 친구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즈마 입니다. 야구를 엄청 좋아하고, 이승엽의 팬입니다. 끝까지 함께하지는 못하지만, 잘 부탁합니다.”

어느새 자기소개를 하고, 듣고있었다. 야구를 좋아하고, 세계여행을 하고 싶고, 소림사 권법을 취미로 하며, 소녀시대를 좋아한다던 일본 친구들을 구마모토 현 미나미아소 촌에서 만났다. 우리가 만난 일본 친구들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피해 지역에 살았던 친구들이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대규모 지진으로 가족을 잃거나 살던 집을 잃었다. 우리가 만난 일곱명의 일본 친구는 피해 지역이었던 이와테, 미야기, 후쿠시마 현에서 10대 중반까지 보냈고, 여전히 고향에서 살고 있기도 했다.

“동일본 대지진 당시 큰 피해가 있었지만,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지금의 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년 구마모토 지진 당시 찾아와 보거나 봉사활동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제2화 ‘우리’ 현장에 가다!

2016년 4월 14일 21시 26분경 구마모토 현 구마모토 지방에 규모 6.5의 전진이 발생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인 4월 16일 1시 25분경 규모 7.3의 본진이 발생했다. 전진, 본진, 여진 모두 합해 사상자가 1천여 명이 넘었다.

나가노 료이치 씨는 단순한 문장으로 정리되는 현장을 사진에 담았다. 미나미아소 촌이 고향인 나가노 씨는 미나미아소 촌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도쿄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사진을 배우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 건 대학 3학년 때였다. 사진을 배우기 위해 일본사진예술전문학교에 다시 진학했다. 총 7년을 도쿄에서 보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편찮으셨던 것도 있었지만, 당시 배웠던 교수님의 말씀 때문이기도 해요. 사진가로 활동해 유명해지려면 도쿄에서 활동하는 게 맞지만, 진짜 사진가가 담아야 하는 풍경은 도쿄보다는 시골 마을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때 교수님의 표현은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이 사진가로 활동할 수 있다는 말이었어요. 그게 마음에 많이 남았어요.”

나가노 씨는 계절마다 변화하는 미나미아소 촌의 풍경을 기록*했다. 노야키(野焼き)는 봄을 알리는 아소의 풍습이다. 들판에 불을 질러 잡초와 지난해의 나쁜 기운을 모두 태워 버리고 남은 것들은 다음 해의 비료로 삼는다. 우리나라의 정월 대보름 쥐불놀이와 비슷한 풍습이다. 여름이면 기쿠치 계곡의 풍경이 더 선명해지고, 가을이면 어디든 황갈색으로 뒤덮인다. 황갈색 논에 새하얀 눈이 생채기 내듯이 듬성듬성 쌓이면, 유난히 길고 매섭게 추운 겨울이 시작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나가노 씨는 꾸준히 계절과 자연을 사진으로 담았다.

“구마모토 대지진이 일어난 후에는 쉬지 않고 재난 현장에 다녔습니다. 힘들었지만 카메라를 놓을 수 없었던 건 지진 피해가 일어났던 곳이 제 고향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을 주민뿐만 아니라 관광지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두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고, 지금도 다들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실제 주민의 상황과 현장의 생생함을 알리는 게 제 역할이었습니다.”

지진 이후 나가노 씨의 카메라에는 끝없이 인간을 품어 줄 것 같던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 거대한 자연 현상에 무력하게 주저앉은 인간의 모습이 더 많이 담겼다. 무너진 건물에 깔려 구조대를 기다리는 사람, 지진 피해지 옆에서 고개 숙여 절망에 빠진 사람, 끊어진 길 위에서 갈 길을 잃은 사람들이 그의 카메라에 현장으로 기록되었다.

“미나미아소 촌에 있는 아소대교가 붕괴되었다.” 위키백과는 간결하게 구마모토 지진 피해를 설명했다. 문장은 사실만을 이야기하지만, 현장에는 과정과 감정, 아직 남은 사람과 떠난 사람의 흔적이 있었다.

나가노 씨의 안내로 찾은 아소대교는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다. 아소대교는 미나미아소 촌에서 다른 도시로 가는 지름길로 통했다. 아소대교 건너 왼쪽으로 구마모토 시, 오른쪽으로 오이타 현으로 가는 길이었다. 아소대교 한쪽에는 사상자를 추모하는 작은 제단이 있었다. 나가노 씨는 아소대교가 무너지기 네 시간 전에 아소대교를 지나 집으로 돌아왔다. 조금 더 일찍 지진이 났거나, 조금 더 늦게 나가노 씨가 다리를 건넜다면, 나가노 씨도 지진 피해를 겪을 수 있었다.

나가노 료이치 씨

아소대교 근처 마을, 폐차된 자동차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아소대교에 놓인 제단

제3화 널리 알릴 것은 일상에서 찾아라

당연하게도,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삶은 계속되었다. 계속된 삶을 마주하는 방식은 모두 달랐다. 우리는 재난 이후의 삶에 눈을 마주치고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주로 만났다. 그들이 하는 활동의 근본에는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걸 한다’는 자세가 있었다.

“지진 이후 대피해야 할 때 트럭을 끌고 다니면서 안내방송을 했어요. 피난하지 못한 사람들을 피난시키고, 미처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을 대피소로 데려다주었죠. 대피소가 추워서 불을 피워야 할 것 같았을 때는 허가를 받아 불을 피웠어요. 불을 피우고 보니 배가 고파서 바비큐를 구워서 함께 먹었죠. 어떤 사람은 수프를 만들었고, 어떤 사람은 불편한 시설을 고쳤어요. 누구네 무엇이 있고, 누가 어떤 일을 잘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한 걸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동안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요.”

신마치 후루마치의 마을 안내자 우에무라 겐조 씨 이야기다. 신마치 후루마치는 구마모토성과 가까운 오래된 마을이다. 4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성 근처에서 역사와 함께한 마을이기도 하다. 신마치는 구마모토성과 더 가까워 사무라이 출신이 살던 마을이었고, 후루마치는 그보다 계급이 낮은 사람들이 살았다. 다리 하하나를 경계로 두고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눈 흘기는 시간도 많았다고 한다. 시대도, 분위기도, 사는 사람도 달라졌다. 지금은 그 다리에서 두 마을 사람이 만나 덕담을 나누고, 안부를 묻는다.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은 흔적도 많았다. 메이지 시대에 놓였으나 아직도 건재하게 자리를 지키는 돌다리, 100년 넘도록 꼿꼿하게 선 건물 등이 신마치 후루마치가 간직한 풍경이었다.

“구마모토에서 태어났지만, 도쿄에서 오랫동안 살았어요.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겪으면서 생각이나 환경 등이 달라졌고, 고민 후에 구마모토로 돌아오게 되었죠. 그런데 돌아와 보니 이전에는 몰랐던 풍경이 눈에 보이는 거예요. 우리 마을이 얼마나 매력적인 곳인지 사람들에게 더 많이 알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미 마을 가이드 역할을 하고 계셨던 분께 찾아가 배웠어요.”

마을 안내자 루리 씨의 이야기다. 이들이 안내하는 여행에는 화려함은 없었지만,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오래된 건물 한 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대를 이은 간장 공장 대표를 만나 그가 공장 깊숙한 곳에 숨겨둔 수집 공간을 보여 주기도 했고, 목을 푹 숙인 채 나막신을 한 땀씩 만들고 있는 가게 안 풍경을 조용히 지켜보기도 했다. 겉에서 보기에는 평범한 학교 앞 ‘문방구’ 같은 공간 안에 존재하는 거대한 우물을 만나기도 했다. 당황스러운 발상의 결과물을 마치 집에서 기르는 소중한 애완견처럼 바라보던 주인장은 지역 신문에도 제법 많이 소개되었던 모양이다. 우물 사진이 담긴 기사가 기둥에 붙어 있었다. 주인장에게 우물은 재난을 대비한 생존배낭 같은 존재였다. 배낭치고는 좀 과하다 싶은 느낌이었지만, 우물을 소개하는 주인장의 얼굴에는 흐뭇함이 가득했다.

“지진으로 많은 건물이 무너졌어요. 1년 반 정도 전부터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부흥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지만, 비용 때문에 우리의 힘만으로는 부족하죠. 오래된 건물을 또다시 지진으로 잃지 않으려면 대책이 필요합니다. 지진 후 1년 반이 지났는데, 벌써 잊히는게 많은 것 같아 정말 아쉬워요. 점점 후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루리 씨의 설명이다. 신마치 후루마치의 특별한 풍경은 오래된 건축물에 있었다. 그러나 오래된 건축물을 보존하는 건 마을 사람들끼리만 움직인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다.

우에무라 겐조 씨

메이지 시대에 지었다는 돌다리

수제 나막신 가게 안 풍경

제4화 더욱 강력해진 프로듀서 군단과 혼돈에 빠진 지원자들의 만남

구마모토 지진을 겪은 일본 사람들을 만날수록 ‘우리’는 갈피를 잡기가 더 힘들었다. 재난도, 관광도 전문가가 아닌 우리가 7박 8일 동안 무얼 할 수 있지? 동공이 흔들리고 부들부들 팔이 떨렸다. 경주에서 우리는 구마모토 지진 이후 관의 재난 대비 시스템에 관해 궁금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일본에 와 보니 우리가 궁금해야 할 것은 이들이 사는 모습과 만들어 낸 모습, 그리고 앞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의 가능성이었다. 재난 이후 지진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처했던 사람들이 손을 잡았던 건 관이나 시스템, 매뉴얼이 아니었다. 옆에 있는 사람, 그들이 함께했던 장소, 추억을 붙여 놓은 공간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혼란스러움은 일정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아야 했다. 우리는 쇼미더구마모토 7박 8일 편을 찍어야 했다. (주)공감만세와 A-PAD Korea, 씨빅포스의 스태프를 프로듀서 삼아 팀은 짜여있었다. 프로듀서 장우, 동환 팀에는 연태와 다은, 원강과 일본 친구 두 명이 있었다. 프로듀서 진선, 나가타 팀에는 혜진, 미르, 민준과 일본 친구 두 명이 있었다. 프로듀서 영욱, 오노데라 팀에는 민주와 권호, 일본 친구 세 명이 있었다. 마지막 날까지 남은 일본 친구는 각 팀당 한 명이었다. 9월 1일부터는 각 팀이 구마모토 시, 미나미아 소 촌, 야마토 정으로 찢어져야 했다. 프로듀서 간의 불꽃 튀는 전쟁의 서막이 시작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글 사진 이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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