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25호] 사람도 짐승도 머물렀다

사람도 짐승도 머물렀다 - 대전광역시 유성구 봉산동 뒷바구니
천변도시고속화도로를 빠져나와 봉산동으로 향하는 동안 그곳을 머릿속에 그려 봤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따라 머릿속 마을의 이미지도 바뀌었다. 이름 모를 산과 갑천이 보일 때면 마을이 덩달아 푸근해지고 산업단지가 눈에 들어올 때면 상상했던 마을 모습이 다시 흐릿해졌다. 그렇게 한동안 갑천을 따라 4차선 도로를 달리니 ‘뒷바구니 봉산 3통’이라고 큰 글씨로 쓰인 유래비가 한눈에 들어왔다.

뒷바구니 사람들

마을 어귀를 지나 적당한 곳에 차를 대고 유래비가 있는 곳까지 걸어 내려갔다. 마을을 채 살펴보기도 전에 어떤 집 창고의 누렁이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양쪽 귀 끝이 말린 누렁이는 입꼬리를 한껏 올리며 웃고 있었다. 움푹 파인 땅에 앉아 있는 누렁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눈도 채 뜨지 못한 강아지들이 누렁이의 젖을 빨고 있었다. 하나는 흰색, 나머지는 각기 다른 진하기로 물든 갈색이었다. 젖먹이들이 낑낑대는 소릴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제서야 마을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봉산3통 뒷바구니는 오봉산 자락에 자리잡았다. 마을 어귀에서 안으로 들어갈수록 경사가 지며 결국엔 산과 마을의 경계에까지 닿게 된다.

뒷바구니 동쪽으로는 갑천이 흐른다

멀리 신탄진의 금강엑슬루타워 아파트가 보인다

2013년에 세운 마을 유래비에 따르면, 바구니라는 이름은 오봉산에서 내려다본 마을 지형이 바구니를 닮았다 해서 지어졌다고 한다. 이곳은 조선시대에는 공주군 구즉면이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전군 구즉면에 편입됐다. 그후 1989년,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함에 따라 대전직할시 유성구에 속하게 됐다. 1995년, 대전직할시가 대전광역시가 됨에 따라 대전광역시 유성구 봉산동이 되었다.

유래비에서 옛 봉산동은 아름다운 마을로 묘사돼 있다. ‘오봉산 숲에서 내뿜는 솔내음이 향기롭고 동쪽으로는 갑천 맑은 물이 감돌아 흐르고 동네 앞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진 지역’이었던 곳이 ‘이제 도시로 성장한 대전의 길목을 지키는 대규모 주거단지로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유래비를 세운 목적도 ‘옛 모습을 잊지 않게 하며 이곳 신도시 주민들에게도 이를 알릴 수 있도록 하고자’ 함이다.

유래비가 있는 곳에서 마을 안쪽으로 조금 더 걷다 보면 묵이나 어죽 등을 파는 식당이 보이고 아스팔트로 단장한 길 한쪽 옆으로는 밭도 보인다. 그리고 바로 봉산3통 노인정이 나온다.

정오가 조금 지난 때, 점심을 먹고 마실 나온 할머니들이 벽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앉았다가 서로 얘길 했다가 하는 참이었다. 낯선 이의 소개에 “뭐랴”, “어서 왔댜” 한 박자 늦은 관심이 이어진다.

“대전에서 왔댜.”
봉산3통 뒷바구니에서 대전역이 있는 언저리는 ‘대전’이라고 불린다. 그만큼 이곳은 ‘대전’이라기보다, 오봉산 아래 갑천을 두르고 있는 ‘뒷바구니’일 뿐이었다. 대전에 나가려면 빨간색 급행 2번 버스를 타고 꽤나 가야 했다.

《선비고을 유성이야기》(유성문화원, 2010)에 따르면 봉산동에는 ‘바구니(지금은 앞바구니와 뒷바구니로 나뉘는데 합쳐서 부를 때 바구니라 하고 백운이라고도 함), 뷩바위, 청계뜸, 교촌’ 등의 마을이 있다. 노인정의 할머니들은 뷩바위나 교촌이라는 마을에 관해선 모른다고 했다. 대신 봉산3통은 앞바구니, 뒷바구니, ‘칭기뜸’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세 마을 중 가장 큰 마을은 앞바구니인데 이곳에는 현재 휴먼시아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2009년에 입주를 시작한 곳이다.

“도술비도 잡고 물도 떠 마셨지”

앞바구니에 높은 아파트가 세워지도록 할머니들은 청계뜸이나 뒷바구니에 살았다. 뒷바구니 입구 쪽이 청계뜸이며 둘은 한 마을처럼 지낸다고 했다.

올해 여든다섯인 윤 씨 할머니는 청계뜸에서 태어나 천동으로 시집을 갔다가 바로 가족이 함께 뒷바구니로 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칭기뜸은 동네도 조그맣고 예닐곱 집밖에 안 살았었지. 그때는 물도 깨끗해서 앞 강에서 도술비도 잡고 물도 떠 마셨지. 시집은 열아홉 살 먹던 해 산골짜기로 갔다가 다시 뒷바구니로 돌아왔어. 인심도 좋고 여기가 좋아.”

윤 씨 할머니 이야기가 끝나자 다른 할머니들이 말을 보탠다.

“지금은 논도 별로 없고 밭만 있고 집만 있지”

“옛날에야 물 좋았지. 지금은 물 건너가면 피부병 걸려. 대전시에서 오염된 것들이 다 내려오는걸.”

“지금 젊은이들은 우리 때처럼 결혼하라고 하면 하지도 못할 거야. 얼굴이나 보고 결혼했나. 사주택일로 왔다갔다 하는 겨. 다리병신이라도 살었지.”

“그럼.” 말수가 적은 할머니들도 말을 보탰다. 그만큼 할머니들은 살아온 시간을 공유하고 있었고 마을과 사회의 변화를 바라보는 시각도 비슷한 듯 보였다.

“옛날에는 전부 농사꾼만 살았어. 강 옆에 밭에다 뭘 심어 놓으면 비가 와서 홀딱 떠내려가고 그랬지. 우리 살은 거 말도 못 해. 지금은 논도 별로 없고 밭만 있고 집만 있지. 그리고 나 시집올 때만 해도 윤 씨가 많이 살았는데 이제는 각성바지가 와서 산 지 좀 됐어. 각지 사람이 사방이 땅 사고 집 짓고, 원주민은 집 지은 거 별로 없어.”

열여섯 살에 충남 연기군에서 뒷바구니로 시집온 김정남 할머니는 올해 여든일곱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도 윤씨여서 윤 씨 할머니와는 4촌 시누이와 올케 사이다.

지금이야 느즈막이 점심을 먹고 노인정으로 나오면 밥해 주는 이도 있고 편하게 살지만, 옛날엔 설에 제사 지낼 때나 밥 구경을 했고 평소에는 쑥이나 시래기로 죽을 끓여 먹었다. 들나물로 죽을 끓여 먹으면 설사가 났지만 산나물은 설사가 나지 않았다. 생일날엔 닭 한마리를 사서 미역국에 넣어 몇 점씩 먹었다.

“시방은 편한디 이젠 늙으니께 먹들 못햐. 옛날엔 읎어서 못 먹었는데. 이젠 바라는 게 있으면 뭐햐, 늙은 거. 아들네들이나 잘되길 바라는 겨.”

김정남 할머니의 말씨는 투박했다. 말귀를 못 알아 듣는 것 같으면 종종 소릴 크게 냈다. 약지와 새끼손톱에 칠해진 연보라 펄 매니큐어가 할머니의 손짓에 따라 반짝였다.

정면으로 문평대교가 보인다

“소독 안 했어, 그냥 먹어도 돼”

움푹 파인 땅에 앉아 있는 누렁이는 혼자가 아니었다

‘뒷바구니의 개’

여든셋 김언년 할머니는 그때로 치면 조금 늦은 나이에 이곳으로 시집왔다. 외동딸이어서 부모님이 집에서 오래 품었다. 일이라곤 해 본 적도 없었고 뭐든 낯선 곳으로 와서 처음엔 고생깨나 했다.

“엄마가 나를 가만히 키워서 시어머니 속을 많이 쎅였지. 여기 처음에 오니까 또랑이 있고 자갈만 버글버글 하대. 옷을 씻어다 놓고 왔는데 소낙비가 오잖여. 그놈이 전부 떠내려간 거야. 방맹이고 뭐고 어지간한 건 다 떠내려갔어. 시어머니한테 얼마나 야단을 맞았는지 눈물을 흘리고 우두거니 섰었는데. 이 할머니(김정남 할머니)가 새댁은 왜 우냐고 해서 옷이 떠내려갔다고 말했지. 그랬더니 소시랑을 가지고 와서 또랑을 살살 긁더라고. 그렇게 옷을 건져 줬어. 은인이여. 지금이야 늙었으니께 같이 대화하지. 그때 나는 아무것도 몰랐거든.”

산도 물도 지금보다 가까웠던 때다. 종종 마실 가듯 산에도 올랐고 물에서는 다슬기도 잡았다. 이제는 산에 오르는 건 생각지도 못하고 물도 큰 도로를 사이에 두고 멀리에 있다. 종종 문평대교가 보일 뿐이다.

새끼 네 마리와 누렁이가 있던 곳은 윤 씨 할머니네였다. 손주가 일하는 곳 사장이 ‘할머니보고 파시라고 해라’라며 준 것이다. 개장수에게 넘기면 용돈 조금이 나올 것이었다.

“개장수가 새끼가 들어서 안 산다고 했어. 그냥 묶어두고 기르면서 누링이라고 불러. 누링이가 이번에 새끼네 마리를 낳았지. 땅을 살살 후벼서 새끼를 여기다 놓고 저기다 놓고 햐. 엄청 순햐. 엄청 예뻐.”

한동안 아직 눈도 안 뗀 강아지들 이야기가 이어졌다. 새끼들이 눈을 뜨고 어미 젖을 어느 정도 떼면 누렁이만 남고 뒷바구니나 청계뜸의 다른 집으로 흩어질 것이다. 누구네 집에는 흰 강아지가, 누구네 집엔 갈색 강아지가…. 가방에 한 마리 챙겨 가라는 한 할머니의 농에 모두가 크게 웃었다.

노인정을 나와 마을 속으로 걸었다. 산 쪽으로 난 길은 좁혀졌다가 넓어지기를 반복했다. 그 길을 따라 한 집, 두 집, 눈에 들어왔다.

한 노부부가 대문을 열어두고 포도송이를 따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뭘 하고 있느냐고 와서 포도 좀 먹으라며 작은 송이를 건넸다. 할아버지의 약지와 새끼손톱에 김정남 할머니의 것과 같은 연보라 펄 매니큐어가 발라져 있었다. 혹시 여기가 김정남 할머니 집이냐고, 김정남 할머니랑 가족이냐고 묻는 말에 할아버지는 멋쩍게 웃었다.

“가족은 아니고 여 동네 사람은 다 식구나 매한가지여.”

글 사진 성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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