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25호] 동굴 속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동굴 속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 뮤지션 천태수

대중음악전문가다. 월간 토마토에 원고를 게재하기도 했으며 지금은 파라노이드라는 잡지를 발행하는 대전 사람이다.

비가 참 얄궂게 내렸다. 오락가락해도, 내릴 때는 기세가 만만치 않다.

오래간만에 찾아간 ‘버찌라이브’는 쿰쿰했다. 에어컨도 틀어 놓고 선풍기도 돌렸지만 지하실 특유의 눅눅한 냄새는 쉬 가시지 않았다. 공기가 빠삭거릴 때는 맡을 수 없는 냄새다. 그 냄새가 싫지 않다. 지하실이 주는 특유의 안온함과 습기를 머금고 내뿜는 그 냄새가 온몸을 감싼다. 지하실에 들어서면 동굴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인류가 비로소 안식처다운 안식처로 삼았던 그 동굴 말이다. 지하실에서 벌어지는 일은 본능적이며 진지하다. 그곳에서 마주하는 삶은 한없이 가볍다. 또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무겁다. 결코 적당하지 않다. 동굴이라서 그렇다.

익숙한 정면 무대 앞, 텅 빈 홀에는 흰색 간이 테이블을 두고 컴퓨터가 올라앉았다. 그 앞에 밴드 베이비필 리더이자 공연장 운영자 천태수가 앉아 있다. 풍경에 고스란히 녹아내렸다. 이 시대 혈거인이다.

“이렇게 테이블을 쓰면 공연할 때마다 치워야 하는데 불편하지 않아?”

“괜찮아 형, 우리 공연 많이 안 하잖아. 잘 해야 한 달에 한 번인데. 치우는 거 안 힘들어.”

지난 5년 동안 수많은 소리가 스며든 공간은 제법 제 색을 드러낸다. 공연장이 아니었던 시절 흔적은 모두 지우고 처음부터 공연장이었던 것처럼 당당하다

월간 토마토가 세상에 나온 지 10년인 것처럼 음악전용 공연장 버찌라이브홀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10년이다. 지금 자리에서 5년, 그전에는 길 건너 멀지 않은 곳 지하에서 5년을 보냈다. 그런 태수를 알고 지낸 것도 10년이다.

그 10년 동안 태수가 변한 거라곤 머리 길이밖에 없다. 길게 길러 묶고 다니던 머리를 어느 날인가 싹뚝 잘라 냈다. 긴 머리가 자유를 상징하는 뮤지션의 자존심일지라도 싹뚝 자른 머리가 훨씬 잘 어울렸다. 지금 그는 여전히 공연장을 운영한다. 보컬을 구하지 못해 직접 노래까지 부르며 앨범을 낸다. 간혹 드럼이나 베이스, 기타 레슨을 하고 공연을 기획해 세상에 내놓는다. 한때 연식 야구를 하러 다니더니, 요즘에는 친구따라 캠핑을 다니는 모양이다.

“그냥 뭐, 청소년 시절에 라디오 많이 들었잖아. 처음에는 영화 음악 즐겨 듣다가 이수만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팝송 많이 틀어 줬거든. 그거 좀 듣고, 새벽에 3세계 음악 틀어 주는 프로그램으로 넘어갔지. 거기서 좀 시끄러운 음악 많이 틀어 줬거든. 메탈리카, 머틀리 크루, 본 조비.”

그랬다. 지금 중2병에 걸린 아이들은 SNS에 허세 가득한 글을 올린다지만, 우리는 그 나이 때쯤 헤비메탈 음악을 들었다. 빽판을 구해 집에 전축이라도 있는, 부유한 친구가 있으면 찾아가 그 시끄러운 음악을 들었다. 당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탈이며 반항이었다. 메탈 장르 족보를 읊고 뮤지션에 관한 최신 정보를 더 많이 입수한 친구가 갑이었다. 동굴 속에서 잡담을 나누며 어쭙잖게 삶을 고민했다. 한없이 무겁고 진지했다. 무대에서 공연이 끝난 후 연주한 기타를 내동댕이쳐 부숴 버리거나 온갖 욕설을 내뱉는 뮤지션의 기행에 열광했다. 말도 안 되는 다양한 방식으로 기존 질서를 무조건 거부하며 소년은 청년이 되어 갔다. 태수도 청년 시기를 준비하는 소년이었다.

“그 시절 핫뮤직을 탐독했지.”
“그래, 그 시절 우리에게 핫뮤직은 성경과도 같았지.
구하기도 쉽지 않았어. 돈이 없으니까. 헌책방에서 사거나 친구가 한 권 사면 온통 돌려 보느라 정신이 없었지. 핫뮤직. 송명하1)씨가 그 전설적인 잡지에 기자였잖아.”

“그렇지. 그러다가 머틀리 크루에서 베이스 치는 니키 식스를 알게 되었어. 인생 정말 멋있게 살더라고.”

“당시에 태수 네 눈에 멋있게 사는 게 뭐였는데?”

“뭐 방탕하게 사는 거지. 돈도 많고 여자도 많고. 유명한 뮤지션이 되면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어.”

태수는 머틀리 크루의 니키 식스처럼 베이스를 치기로 했다. 당시 대전 원동 사거리에 지구음악학원이 있었다. 그때 아저씨가 온갖 악기를 다 가르쳤다. 기타, 색소폰, 드럼, 베이스까지 그 아저씨가 가르쳤다. 베이스 배우고 싶다고 하니까, 통기타에 줄 네 개를 끼워서 가르쳤다.

“그러니 그게 재미있었겠어? 폼도 안 나고. 한 달 다니다 그만두고 돈을 모아 베이스를 샀지. 서울 낙원 상가에 가서 악보 구해다가 혼자 독학으로 배웠어.”

서울도 오르락내리락거리며 밴드 구성하려다가 실패하고, 무얼 해도 어설펐던 10대 시절을 마무리하면서도 음악과 베이스를 손에서 놓치는 않았다. 20대 초반, 그 유명한 락컴퍼니에 들어간다. 락컴퍼니는 대전에 있던 일종의 음악동호회다. 수많은 음악인이 가입해 밴드를 구성하고 활동하는 일종의 길드였다. 핫뮤직에 멤버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가 오디션을 보았으나 결과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다. 아무도 정식으로 오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음료수 사들고 무작정 찾아갔다.

“락컴퍼니 형들이 대부분 나이트에서 일 많이 할 때였거든. 낮에는 사람이 없어. 그냥 가서 죽치고 앉아서 음악 듣고 청소하면서 자연스럽게 락컴퍼니 막내가 된 거지. 정식 밴드 멤버가 안 되어도 이 팀 저 팀에서 필요할 때 베이스 좀 쳐 달라고 하면 가서 합주하고. 그렇게 실력 키우고 음악 활동한 거지.”

“청소년 시절이야, 기타 한 번 안 배워 본 사람이 없으니 그렇다 치고, 철들기 시작하는 20대가 되어서도 음악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가 뭐야?”

“동경이지. 자유로운 삶에 대한 동경. 우리는 어릴 때 정말 가난하게 살았잖아. 그래서 그런가 외국 유명 뮤지션의 삶이 그렇게 멋있어 보이더라고. 전 세계로 투어 다니고. 자유롭잖아.”

자유로운 삶을 동경했던 청년 태수는 20대 중반에 ‘베이비 필’이라는 밴드를 결성한다. 시애틀 뮤직이라고 불렀던 음악계에서 ‘너바나’가 한참 뜰 때였다. 태수는 그때 그 동네(시애틀)에서 같이 음악 하는 밴드 중에 펄잼을 좋아했다.

“너바나 음악도 기존 사회에 무척 반항적이었지. 그런데 펄잼은 그러면서도 어딘가 정치적 메시지도 있고 뭔가 깊이가 있어 보이더라고, 그래서 난 펄잼을 좋아했지.”

태수가 만든 노래에 담긴 메시지는 이때부터 싹 튼 모양이다. 태수가 20대 후반이었을 때쯤 락컴퍼니도 문을 닫았다. 주류를 이루던 형들이 하나둘 결혼하고 떠나면서 벌어진 일이다. 편의점에서 야간 알바도 하고 피시방에서 일도 하고, 20대에서 30대로 넘어가는 그 시점에 잠깐 음악을 쉬었다. 사실 의도적으로 쉴 생각은 없었다. 밤에는 일하고 낮에는 음악을 할 생각이었다.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밤에는 일하고 낮에는 잤다.

김정명,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전 출신 컨트리 뮤지션이다.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멤버를 정비해 2004년, 30대 초반 태수는 베이비 필 1집 앨범을 냈다.

“1집 내고 공연도 다니면서 밴드활동을 하는데 팔로미노 사장님2)이 지하가 비었는데 전기세만 내고 쓰라고 하대. 처음에는 그냥 연습실만 만들라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공연장을 하게 된 거지.”

2007년이었다. 후대에 누군가 대전 문화예술계 흐름을 정리하려 마음먹는다면, 2007년에 주목해야 한다. 그동안 대전에 마땅히 없었던 문화예술잡지계에 월간 토마토가 창간을 했고, 한참동안 사라졌던 연극 전용 소극장계에 드림아트홀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태수가 한참동안 대전에 없었던 밴드전용 공연장 문을 연 것이다. 같은 해 겨울에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아 놓은 것 빼고는 제법 괜찮은 해였다.

“공연장 문 열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할 거라고는 생각 안 했지. 내가 음악 할 공간이 없으니까 만든 거였는데, 막상 문을 열고 나니까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더라고. 공연할 팀도 데려다주고.”

태수는 20년 동안 밴드 베이비 필 리더로 수많은 멤버를 받아들였다 떠나보내며 두 장의 앨범을 냈다. 마흔을 훌쩍 넘긴 지금, 지나 온 삶에 대한 후회는 없다. 어렸을 때 꿈꾸고 동경했던 슈퍼스타로서의 삶은 30대 초반에 이미 포기했다.

“20대 때 음악 하는 형들한테는 내가 서른 살이 되어도 별 볼일 없으면 음악 때려칠 거라고 얘기했거든. 근데 서른 살이 되어도 별 게 없더라고. 막상 나이 먹어 보니까 그냥 똑같아.”

태수는 큰소리 떵떵 쳤던 것처럼 음악을 포기하지 않았다.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별 볼일 없었지만 삶은 본래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유분방한 삶을 살수 있는 슈퍼스타는 진즉에 포기했지만 음악은 여전히 좋았다.

앞으로도 공연장을 계속할지는 모르겠다. 공연장을 운영하며 기획을 해 보았지만 재미없다. 기획자이기보다는 여전히 음악인이고 싶다. 무대에서 베이스를 메고 통통거리며 뛰고 싶다. 보컬을 구하지 못해 지금처럼 직접 노래를 하기 전에는 베이스를 치며 무대 바닥을 쓸고 다녔단다. 빗자루처럼.

“어렸을 때처럼 음악으로 세상을 엄청나게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 그래도 내가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가사로 쓸 수 있으니까. 어쩌면 이렇게 공연장 하는 것도 내가 무대에서 서고 싶어서인지 몰라. 사람들이 안 불러 주니까.”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기분 좋게 나른하다. 어린 시절, 야간자습 빼먹고 친구 골방에 들어앉아 통통 튀는 빽판을 들을 때처럼 평화가 깃든다. 태수는 내년에 앨범을 낼 대여섯 곡을 준비해 녹음에 들어갔다. 앨범 제작 지원사업에 당선이 되었으면 올해 나왔을 텐데, 떨어져 내년으로 미뤘다.

“형, 한 번 들어 볼래? 형이 좀 말랑말랑한 노래 좀 하라고 그래서 그런 것도 몇 곡 만들었어.”

가사를 얹지 않은 멜로디가 컴퓨터에 붙어 있는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다. 말랑말랑한 것이 나쁘지 않다. 태수는 이제, 멜로디를 들으며 세상을 향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써 내려갈 것이다. 마음속에 쌓여 있는 어떤 이야기가 흘러나올지 궁금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노래를 부를 체질은 아니야. 보컬 목소리가 천편일률적인 요즘에 나름 개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가사가 안 외워져. 내가 쓴 가사인데도 못 외우겠어. 그래도 좋은 점은 내가 노래를 직접 부르면 다른 사람 목소리를 통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할 수 있다는 거야. 노래 못한다고 욕은 많이 얻어먹어도 그래도 내가 쓴 노래잖아. 그게 좋지.”

객관적으로 태수는 노래를 못한다. 그래도 태수가 선물해 준 앨범을 가끔 차에서 들었다. 태수 노래를 들으며 묘한 위안을 얻었다. 힘들면 내가 찾아들어갈 동굴이 저기쯤에 있고 그곳에서 혈거인 태수가 계속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사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이야기가 필요한 시대다. 누군가는 이야기를 하고 누군가는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글 사진 이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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