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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25호] 요즘 것들 이래서 돼요!
- 《청년들이 쓰는 가능성의 생태계 - 청년들의 걱정일기》* 권정현 부분 중
무중력지대는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2011년 12월과 2012년 7월, 서울시는 청년 일자리 정책 수립을 위한 워크숍과 토론회를 개최했다. 박원순 시장을 비롯한 청년 구직자·예비 창업가·문화산업 종사자·제3섹터 종사자·관련 전문가 등이 참석했다. 서울시는 청년을 단순히 정책 대상이 아닌 해결 주체로 보았다. 두 차례 워크숍은 청년의 목소리를 듣는 자리였다.
청년들은 청년과 청년실업이 한낱말처럼 쓰이는 것에 의문을 던졌다. 청년실업이라는 낱말에는 ‘청년은 취업이나 창업을 해야만 한다’라는 전제가 있다. 청년 관련 정책도 창업이나 취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를 사는 청년을 단순히 취업자와 비취업자로 나눌 수 없다. 구직자가 아닌 청년, 여유롭게 구직할 형편이 안 되는 청년, 구직 활동과 단순 노동을 병행하는 청년, 지금이 급해 임시 일자리를 구한 청년, 취업이나 창업 등 모든 활동을 하지 않는 청년,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는 청년 등 상황과 조건이 모두 달랐다.
하고 싶은 건 많지만, 할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았다. 무엇이 필요할지 고민해 보니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공간, 오래 있어도 눈치 보이지 않고, 차 마실 돈이 없어도 마음 놓고 친구를 만날 수 있는, 그런 공간이 필요했다. 서울시 청년공간 무중력지대(이하 무중력지대)는 다양한 청년의 제안에서 시작했다.
서울시는 청년들의 요구를 물리적인 공간으로 내보였다. 2013년 4월 은평구 서울혁신파크에 청년허브와 2015년 같은 장소에 청년청이 개관했다. 2014년 12월 서울디지털산업단지에 무중력지대 G밸리, 2015년 4월 동작구 대방동에 무중력지대 대방동이 개관했다. 무중력지대는 청년이 받는 취업이나 시험, 관계 등의 압박을 세상의 중력으로 풀이했다. 세상의 중력에서 잠시 벗어나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공간, 많은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라는 의미다.
* 2011년 청책워크숍 전, 하자센터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청년들의 이야기를 수집해 Epub, PDF 등으로 배포했다. archive.haja.net/archives/view/257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청년들이 쓰는 가능성의 생태계 - 청년들의 걱정일기》 강덕형 부분 중
무중력지대 G밸리는 간단한 조리를 하고, 음료를 마실 수 있는 주방을 중심으로 공간이 나뉘어 있다. 왼쪽부터 협력지대, 휴식지대, 창의지대, 상상지대 등 쓰임에 따라 붙인 이름이지만, 사용하는 사람이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휴식지대에는 커튼 칸막이로 나뉜 침실과 널찍한 공동 침실 등 편히 누워 쉬는 공간이 있고, 창의지대에는 한쪽에 문 닫힌 회의실과 이동하기 쉬운 책상이 곳곳에 놓였다. 상상지대에는 벽을 둘러싼 책장, 협력지대는 누군가와 함께 혹은 혼자 일할 수 있는 공간이다. 역할에 따른 이름은 붙었지만, 휴식지대에 누워 책을 볼 수도 있고, 창의지대에 앉아 음식을 먹을 수도 있다. 카페에 온 것처럼 음악이 흐르고 공간 안에서 사람들은 제게 필요한 것을 한다. 누군가 하지 말라는 경고나 무언가 해야만 한다는 압력도 없다. 무중력지대 G밸리는 가산디지털단지역 5번 출구와 가까운 한 건물 6층에 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우연히 발견하긴 어려운 그 공간에 많은 청년이 오간다.
“지역 특성상 점심시간에 가장 많은 방문객이 와요. 가산디지털밸리에 무중력지대가 처음 생겼을 때는, 특히 이 지역에서 일하는 청년에게 초점을 맞췄어요. G밸리는 제조업에서 첨단지식산업으로 넘어가면서 구로공단에서 가산디지털단지로 변화했어요. 전국 산업단지 중에서 복지나 지원 시설이 낮은 곳 중 하나예요. 많은 청년이 이곳에서 일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청년을 위한 공간이 없고, 작은 회사가 많기 때문에 회사 내 복지 시설도 부족하고 이직률도 높은 편이죠. 먼저 이 지역에서 일하는 청년이 최대한 편하게 오갈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무중력지대 G밸리 임병훈 매니저의 이야기다. 2014년 12월에 무중력지대 G밸리가 문을 열고, 2015년 2월부터 프로젝트 노아에서 공간 위탁 운영을 맡았다. 임병훈 매니저는 프로젝트 노아에서 무중력지대 G밸리 운영 총괄을 맡고 있다. 초기 운영에 가장 많이 신경 썼던 건 누구나, 아무 제약 없이, 편하게 오갈 수 있는 분위기였다. 편안하고 규격화되지 않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 오가는 청년의 의견에 귀 기울였다.
“저희도 처음이었고, 이용하는 사람들도 이런 공간이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함께 만든다는 느낌으로 의견을 많이 들었어요. 정말 소소한 건데…. 인조잔디 같은 것도 원래는 없었던 거였고, 테이블이나 인테리어 소품들, 사용자들이 어떤 것들을 편하게 이용하는지 살펴서 천천히 지금의 모습이 되었어요.”
100원에 한 판, 무중력게임존
《청년들이 쓰는 가능성의 생태계 - 청년들의 걱정일기》예술관련지망생 부분 중
꼭 안내문을 붙여야 하면, 유머를 섞어서 썼다
고층 빌딩의 6층, 80평 남짓한 공간.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가 없어 홍보 범위도, 진행하는 프로그램도 천천히 했다. SNS 페이지나 주변 청년을 위한 소소한 이벤트 형식으로 차츰 지역 청년에게 다가갔다. 서서히 방문객이 늘었다.
“처음엔 문 앞에서 멈칫거리면서 들어가도 되냐고 묻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죠. 그다음엔 비용을 묻고요. 그게 순서였어요. 그러면 저희는 서울시에서 만든 청년공간이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답했고요. 저희 공간을 이용하는 분들은 대부분 청년 정책이나 정치 상황에 관심 있는 분들이 아니었어요. 알고 찾기보다는 모르고 왔다가 뜻밖의 공간을 만나고 간 분이 많죠. 그런 분이 더 많이 오셔서 이용하셨으면 했어요. 이 공간을 이용하면서 세금 내는 혜택을 처음 받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는 분도 계셨어요.”
2015년 연 누적 공간 방문자 수 30,214명, 하반기 기준 하루 평균 방문자는 123명이었다. 2016년에는 두 배 가까이 늘었다. 누적 공간 방문자 수 71,255명이고 하루 평균 방문자 수는 174명이었다. 무중력지대 G밸리 방문자가 무엇보다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 건 ‘편안함’이었다.
“관에서 운영하는 공공기관이 찾아보면 정말 많아요. 그런데 청년들은 굳이 비용을 내고 카페에 가잖아요. 무중력지대 G밸리 역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공기관이지만, 편안함을 주고 싶었어요. 예를 들어 도서관만 가도 주의사항이 많잖아요. 이미 만들어진 규칙이 많으면 이용하는 사람이 어려움을 느끼기 마련이에요. 그런 부분을 저희도 고민했어요. 처음엔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는 분이 많았어요. 쓰레기통에 버려 달라는 안내문을 붙였다가 그냥 쓰레기통이 잘 보이게 큰 걸 사서 입구에 놓았어요. 그러니까 고쳐지더라고요. 안내문이 없는 공간이 제일 좋은 공간이죠. 꼭 안내문을 붙여야 하면, 유머를 섞어서 썼어요. 안내문을 붙이는 이유는 행동의 변화를 유도하는 거잖아요. 이 행동을 했을 때 어떤 벌이 있다는 게 아니라 올바른 행동을 했을 때 유머를 섞어서 이야기하면 기분 좋잖아요.”
《청년들이 쓰는 가능성의 생태계 - 청년들의 걱정일기》 황혜정 부분 중
목이 긴 쥐색 양말을 신은 중년 신사는 휴대전화 게임을 하다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휴식지대라고 이름 붙인 커튼 뒤로는 개인 침대가 하나씩 놓였다. 침대에 누워 휴대전화를 바라보거나 잠이 들었다. 창의지대의 어떤 책상 위, 영어책 한 권이 소담하게 놓였다. 의자에 앉은 청년은 책 위에 시선을 고정하고 한참을 움직이지 않는다. 아이스크림 통 위로 바쁘게 손을 움직이며 책을 읽는 풍경도 있다. 늦은 점심인지, 오후 간식인지를 테이블 위에 잔뜩 놓고 잔치를 벌인 책상도 있다. 목이 긴 쥐색 양말을 신은 중년신사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 한참 휴대전화 게임을 하다 그 자리에서 다리를 쭉 뻗고 잠이 들었다. 평일 오후 4시에서 5시 사이, 공간의 풍경은 테이블마다, 사람이 차지한 면적마다 제각각이다.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 잡기까지 많은 시도와 고민을 했어요. 일단 이용하는 사람이 누구든 부담이 없으려면 강제하지 않아야 하거든요.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꼭 관계를 맺어야 한다거나, 끈끈한 연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아요. 진입 장벽을 최대한 낮추는 게 먼저였어요. 우선 공간을 경험하고, 일 외에서 삶의 다른 부분을 생각할 틈을 주는 거예요. 평범한 하루를 열심히 사는 청년들의 일상적인 가치가 회복되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여기에서만은 어렵기만 한 관계 맺기를 덜어 내기도 하고, 일 외적인 부분에서 ‘나’를 찾기도 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프로그램을 기획했어요. 우리나라의 정책이나 프로그램이 대부분 외향적인 사람 중심으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모든 청년이 퇴사하고 세계여행을 갈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혼자 영화 보기, 휴대전화 놓고 들어와 책 읽기 같은 건, 그냥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느슨한 연대를 지향하는 프로그램을 주로 했어요. 또 관계를 맺고 싶은 분들을 위해서는 호흡이 긴 무중력 실험실이라는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어요.”
1년 차 때 무중력지대 G밸리는 ‘일하고 싶은 내 일터, G밸리’라는 비전으로 공간을 운영했다. 그러다 작은 공간이 일터 자체를 바꾸는 게 어렵다는 걸 깨닫고 ‘청년에게, 일터를 삶터로’라고 비전을 바꿨다.
“올해가 3년 차예요. 지금도 계속 시행착오를 겪고 있어요. 아직 정답이라는 게 없으니까요. 일단은 저희가 잘할 수 있으면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걸 하고 있어요. 거창한 도전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소소한 도전을 지원하고, 세계를 바꾼다거나 일터를 바꾸는 게 아니라 ‘오늘’을 조금씩 변화하면서 생각할 틈을 주는 것, 그런 게 지금 저희가 잘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요. 크게 보면 한 사람의 삶이조금씩 변화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고요.”
서울시는 올해 말까지 더 많은 지역에 무중력지대를 만들 예정이다. 대방동에 있는 무중력지대가 창동으로 공간을 옮기고, 서대문구, 성북구, 양천구, 양재구에 무중력지대를 신설할 예정이다. 서울시는 “서대문구는 알아보고 있는 공간이 협소해서 두 군데를 조성할 예정입니다. 하나는 유진상가 안에 있고요. 하나는 치안센터를 활용할 예정입니다. 성북구, 양천구, 양재구 역시 공간은 확정되었고, 올해 말까지 모두 문을 열 예정입니다. 유휴공간을 활용하는 걸 최선으로 하고 여건이 안 되는 곳은 마땅한 공간을 찾아서 제공할 예정입니다. 이런 공간이 청년들에게 도움이 되고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할 수 있고 활력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무중력지대 내부
무중력지대는 청년이 받는 취업이나 시험, 관계 등의 압박을 세상의 중력으로 풀이했다
《청년들이 쓰는 가능성의 생태계 - 청년들의 걱정일기》안병훈 부분 중
도서관에는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이 글자로 인쇄되어 누구나 잘 보이는 곳에 붙어 있다. 어떤 도서관은 타인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는 옷차림이나 책을 읽을 때 타액을 묻히지 말라는 세세한 행동까지도 권유한다. 이제 한참 사회생활을 하고 있을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에 태어난 우리 세대는 교복을 입었고, 두발 규제를 받으며 학교에 다녔다. 대학은 당연히 가는 것으로 교육받았고, 대학에 가면 자
유를 얻을 거라는 최면에 현재를 반납했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서도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늘 자신을 통제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무료로 이용하는 도서관 같은 기관에 가는 일이 어떤 날에는 못 견디게 답답하다. 비교적 통제가 덜한 카페도 눈치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날엔 그마저도 포기하고 만다.
청년 연구자들이 청년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고, 이에 대한 정책적 시사점을 전달하는 책인 《노오력의 배신》 여는 글에는 “청년 문제는 단지 일자리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앞으로의 삶이 어떠해야 하고, 어떻게 보호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라는 점이다. 또한 한 번에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라 복잡한 문제이며, 긴 시간에 걸쳐 사회적 논의와 합의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라며, 그렇기 때문에 메시아적 해법을 경계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하나가, 어떤 걸 해결할 수 있냐”라는 질문에는 명확하게 답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런 대가 없이 공간을 제공하고, 그곳에서 무얼하든 내버려 두는 것 자체가 오늘은 어디에 가야 할지 고민하는 수많은 청년의 하루 10분, 한 달 300분, 1년이면 3,600분을 절약해 준다. 청년들은 그 시간만큼 무엇을 더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다.
이제는 청년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가 스스로 가꾸고, 사람을 만나고, 매일 조금씩 발전하라는 압박을 받는다.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은 자유지만, 꼭 해야만 하는 어느 순간에 비교적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조금 더 크게 소리 내 숨 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