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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4호] 배우 임지형 만나다
밤이면 거리 가득 테이블이 깔리는 을지로 골뱅이 골목에 맥주를 두고 마주 앉았다. 원래는 인터뷰를 하려 했으나 우리는 역시 진지해지기 힘들었다. 농담으로 가득 찬 녹음본을 만회하려 다음 날 다시 만났지만, 역시나 우리의 대화는 어디 내보이기엔 시시껄렁했다. 하지만 조금 아까웠다. 연기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그가 훌륭한 표본임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비전공자에 소속도 없는데, 매년 작든 크든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있다. 이는 매번 수십 번의 오디션에서, 수십 명의 감독에게 캐스팅되고 있다는 말이다. 누가 끌어 주고 밀어 주지 않는 이상, 아마도 신인배우 개인이 할 수 있는 최대치로 여겨진다. 이번 호 인터뷰는 독자가 우리 술자리에 합석해, 우연히 어떤 배우와 한잔 나누는 느낌으로 읽히면 좋겠다. 무슨 영화에 출연했는지 물어도 아직은 대답하기 힘들 테지만, 다만 그와의 편안한 술자리를 즐겨 주시기 바란다.
2017 〈소녀들〉 옐로우싸이코 역
2017 〈야무치 트위스트〉 혁준 역
2016 〈아버지가 있다〉 백문 역
2016 〈기허풍우민수〉 역
경원 너 독립영화 쪽에서 잘나가는 편인가?
지형 제가 자만해 보여서 하시는 질문일까 봐 겁이 나는데…
경원 니가 자만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어. 잘나가?
지형 그렇진 않다고 생각합니다.
경원 너 작품 수가 많잖아. 그건 많이 노출됐다는 얘기고.
지형 작품 수는 많은데 전혀 그런 생각은 안 들고요. 단편으로 관객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 같아서, 어찌 보면 아직 시작도 못한 배우라는 생각도 들어요.
경원 시작도 안 한 건 아니지. 겸손 떨 것까진 없잖아. 대표작을 못 만난 것 아니야?
지형 그렇죠.
경원 너가 보통 1년에 단편을 몇 편 정도 하지?
지형 2~30편이요.
경원 그래서 1년에 얼마 번다고 그랬냐?
지형 300만 원 정도요.
경원 그럼 어떻게 살아.
지형 작년까지는 촬영 수입으로만 사는 연습을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연습은 불필요했고요. 알바는 떼려야 뗄 수 없겠구나 생각해서, 가끔 일일 알바를 하고 있습니다.
경원 청원경찰이랑.
지형 네, 은행도 지키고요. 하는 일 없이 아이들 풀장에서 노는 거 지켜보고 그런 일이죠.
경원 대충 하루에 10만 원은 받아?
지형 그렇게 안 되죠. 열심히 해도 6만원 7만 원 정도예요.
경원 너 무슨 과 나왔지?
지형 건축공학과요.
경원 과학고 출신에 연세대면 과외로 많이 벌긴 할텐데.
지형 해 봤는데요, 체질에 안 맞기도 하고 제가 애들을 망치는 것 같아서.
경원 근데 그렇다고 안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냐, 생계 앞에서.
지형 제가 배고픈 것보다 안 맞는 일 하는 걸 더 괴로워하나 봐요.
경원 물론 어떤 배우들 보면 생계 때문에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은 하지 않으려는 경향도 있잖아.
지형 작년에 제가 그랬죠.
경원 이번엔 좀 꺾인 거고.
지형 꺾인 거죠. 그래도 약간의 자존심이 남아서 정기적인 알바를 하지는 않고 있어요.
경원 요즘은 일과가 어떻게 돼?
지형 촬영이 많이 없을 땐 정말 심심한 것 같아요. 일단 이번 주말에 촬영이 하나 있습니다.
경원 너 장편 하나 캐스팅됐다고 안 했어?
지형 〈장사리 전투〉라고.
경원 아, 그거 많이들 하더라. 조연이야 단역이야.
지형 단역이겠죠. 조연이면 역할 말해 줬겠죠. 아직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모르겠고, 뭘 준비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경원 준비 안 해도 될걸?
지형 (웃음) 단역이니까요?
경원 (웃음) 어.
지형 대사라도 한마디 있으면 좋을 텐데.
경원 배우들에게 대사라도 한마디 있는 게 어떤 의미야?
지형 원 커트를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죠.
경원 그 대사가 오프사운드(off sound-화면에 안 나오고 밖에서 들리는 소리)면?
지형 (웃음) 그래도 그런 정도의 역할이라면 언젠가는 카메라에 잡히겠죠.
경원 너 예전에 단역으로 잠깐 참여했던 게 뭐였지.
지형 그게 〈군함도〉였죠. 한번 나갔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그리고 〈청년경찰〉이라는 영화도 출연했는데, 회차는 많았지만 내가 지금 연기를 하는건가 아닌 건가 회의감도 들고.
경원 세칭 병풍.
지형 네, 뒷그림이죠. 이제는 회차가 적더라도 임팩트 있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경원 너는 너한테 일을 안 주는 감독도 인간적으로 잘 지낼 수 있어?
지형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경원 평생 너랑 일할 생각도, 누구한테 연결시켜 줄 생각도 없는 감독이라고 해도.
지형 그럼요.
경원 왜?
지형 제가 워낙 사람을 좋아하니까요. 안 맞는 사람이 많은 성격도 아니고. 일적인 관계가 됐든, 인간 대 인간이든 서로 잘 지내면 좋죠.
경원 근데 너만 보면 찡그리는데, 일은 주는 감독이 있으면?
지형 (웃음) 사실 근래 인간적으로는 별로인 것 같다는 감독이 있었거든요. 그분이 만약에 같이하자고 했을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최근에 깊이 생각을 했었는데요,
경원 할 것 같아 안 할 것 같아.
지형 할… 할 것 같아요.
경원 (웃음)
지형 그 이유가, 어쨌든 감독님이니까. 인간을 먼저 보기보다는 작품과 실력을 먼저 볼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근데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경원 반대로 인간적으로 괜찮은 감독인데 매번 주는 역할이 정말 아니야. 나를 무시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어. 어떡할 거야?
지형 그런 경험이 또 있었어요. 뒷배경에서 땅을 기고 구르고 그런 역할이었어요. 그 순간에는 이건 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나니까 그래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어요. 어쨌든 필요한 역할인데, 어울리는 사람으로 날 생각해 준 거니까요.
경원 그래. 그간 니가 찍었던 작품 중에 베스트는 뭐냐?
지형 〈동명이인〉입니다.
경원 그렇게 하지 말고, 빼고 이야기해.
지형 소중한 작품을 질문하시면, 다 소중하지만.
경원 잘 찍혔다, 니가 잘 드러났다 그런 작품.
지형 그럼 몇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동명이인〉…
경원 하지 말라고.
지형 외에는 최근에 〈야무치 트위스트〉라고.
경원 ‘드래곤볼’의 야무치 말하는 거야?
지형 네, 호빠(호스트바) 이야기인데,
경원 닉네임이 야무치야?
지형 네.
경원 잘 지었다. 너도 호빠 선수였어?
지형 네, 제 닉네임은 젖소.
경원 왜?
지형 뭔가 감독이 우유를 뿜는 그런 걸 상상했나 봐요. 위로 뿜든, 아래로 뿜든.
경원 (크게 웃음) 아, 재밌는데 이거 잡지엔 못 나갈 것 같아서 아쉽다. 이 잡지가 격이 있는 잡지라서.
지형 제가 격에 안 맞는 배역을 해서 죄송합니다.
경원 영화는 그럴 수 있지. 근데 우리 수준에 맞게 한번쯤 이 잡지의 격을 떨어뜨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위로 뿜든 아래로 뿜든, 어쨌든 그런 역할이었다.
지형 네, 저는 항상 한 손에 우유팩을 들고 등장했죠. 지금까지 했던 거랑 달라서 재밌었어요.
경원 니가 오디션에서 높은 승률을 보이는 요소가 뭐인 것 같아?
지형 저는 오디션에 나갈 때 소개팅에 나가는 마음으로 갑니다. 새로운 사람을 사귀러 가는 마음.
경원 (웃음) 너 모태솔로잖아.
지형 네.(웃음) 그게 아니면, 뭘 시켜도 잘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만만한 느낌 때문이 아닐까요. 근데 감독님은 저를 왜 뽑으셨나요.
경원 일상적이어서. 뭐든 아예 안 어울리는 마스크도 아니고.
지형 치명적인 매력 같은 건 없었나요.
경원 딱히.(웃음) 오디션 장에서 굳이 모태솔로라고 밝힌 것 정도가 특이사항이었지. 근데 이거 나가도 되냐?
지형 사실인데요 뭐 괜찮죠.
경원 현재 너의 연애를 가로막고 있는 게 있어?
지형 아마 늦게 시작한 연기에 대한 불안감 아닐까요.
경원 너 지나가다가 예쁜 여자 보면 좋아 안 좋아.
지형 무지 좋습니다.
경원 그때만큼은 연기가 좋아 여자가 좋아?
지형 연기 생각도 안 납니다.
경원 그러니까. 연기를 핑계로 그쪽 삶을 스스로 버려둔거 아니냐. 사람들은 연애하고 섹스하고 살잖아.
지형 (웃음) 안 해 봤어요.
경원 (웃음)
지형 (웃음)
경원 너는 상실의 고통을 모르겠구나.
지형 두려움도 맛을 안 봐서 모르는 거고, 그 황홀함도 모르는 거죠.
경원 니 인생에게 너를 만나서 행복한지 물어봐.
지형 삶을 버려둔 거 같네요.
경원 (웃음) 2차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