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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4호] 지역책들 한데 모은 누구나의 평상
날날북스 이형희 대표
이런, ‘아무것도 할 수 없는’으로 읽고 말았다. 다시 보니,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그 뒤집힘이 유쾌하다. 열린 가능성과 낙관적 의지를 담은 책 제목 하나가 안기는 뜻밖의 응원. 어쩌면 이 작은 공간 자체가 통째로 ‘응원’ 같다. 잘 나가는 주류에 속할수록 굳이 이곳에서 팔지 않아도 되는 책. 하여 그런 책들은 아예 들이지 않았다. 서가에 꽂힌 ‘마음을 다하였다’는 또 다른 책제목마냥 마음을 다해 만들었으나 독자를 만날 길을 찾기 어려운 독립출판물들과 지역출판물들이 이곳의 정체성을 이룬다.
지난 6월 23일 문을 연 북카페 ‘날날북스’. 자신만의 취향과 지향을 담은 큐레이션으로 구성된 작은 서점들이 늘고 있는 추세 속에서 또 하나의 반가운 책공간의 출현이다/p>
경기도 화성 병점역 근처, 동네 골목길에 ‘날날북스’는 있다. 이곳에 놓인 책들 역시 대로에서 비껴서고 속도에서 벗어난, 작은 골목 같은 책들이다.
“찻질 테역밧디/ 퉤껭이쿨이 모도 ”(〈퉤껭이 쿨〉 중) 같은 제주말 동시들이 수록 된 《할망네 우영팟의 자파리》(김정희 글, 한그루)처럼 지역의 말과 삶을 애써 거두고 지키는 책들, ‘한국전쟁전 후 민간인희생자 창원유족회 증언자료집’이란 부제가 붙은 《그질로 가가 안온다 아이요》(도서출판 해딴에)처럼 기억해야 할 지역의 역사를 기록한 책들이 이곳의 서가를 차지하고 있다.
《대전여지도1》(월간토마토), 《춘천의 근대거리를 거닐다》(문화통신),《잠수 잠녀 제주해녀 그리고 우리》(각), 《제주사람들의 삶과 언어》(한그루), 《무등산 역사길이 내게로 왔다》(심미안), 《고창에 산다》(도서출판 기역), 《강원의 산하, 선비와 걷다》(산책), 《부산사투리의 이해》(해성), 《남강 오백리 물길여행》(도서출판 피플파워), 《춤추는 마을 만들기》(남해의 봄날), 《동네도서관이 세상을 바꾼다》(펄북스), 《지역에서 행복하게 출판하기》(산지니)…
광주 부산 대전 대구 경기 강원 충청 전라 경상 제주… 전국 곳곳 지역들이 책꽂이에서 뽀짝 이웃해 있다. 지난 5월 제주에서 제1회 ‘한국지역도서전’을 치러낸 한국지역출판문화잡지연대(한지연) 소속 지역출판사들이 펴낸 책들이다. 슬쩍 거들떠만 봐도 ‘지역’을 중심에 두고 골골샅샅 기록하고 재발견하며 지역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모색하는 끈기와 열정이 느껴진다.
《월간토마토》(대전), 《사이다》(수원), 《전라도닷컴》(광주), 《어쩌다보니》(부산)처럼 자기 삶터의 이야기들과 자기 동네의 터무늬를 천착하는 지역 문화잡지들도 만나볼 수 있다.
‘한지연’ 대표 황풍년(월간 전라도닷컴 편집장) 씨는 “전국적인 유통망을 갖지 못한 열악한 처지의 지역출판사들에겐 새로운 독자들을 만날 수 있는 반가운 통로이자 힘이 되는 존재”라고 ‘날날북스’에 거는 기대를 밝히며 “전국의 공공도서관들에게 지역책들의 정보를 제공하고 구매를 대행해 주는 등 지역책 전문유통회사로 커가길 바란다”고 말한다.
그런 기대와 짐을 짊어진 이형희(53) 씨는 정작 ‘날날북스’의 탄생을 ‘어쩌다보니’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 말엔 이미 내재된 필연이나 자연스런 과정, 수많은 디딤돌이 전제되어 있으리라.
가까운 디딤돌로는 ‘골목잡지’를 표방하며 분투해 온 수원의 지역잡지 《사이다》가 있다. 그는 《사이다》의 최서영 대표와 한길 가는 부부이다. 아내가 하는 일을 어깨너머로 보고 거들기도 하다가 급기야 직장도 그만두고 ‘날날북스’의 운영자가 됐다.
문을 연 지 한 달여. “서너 시간 책 보고 가는 손님도 있어요”라는 자랑조의 말에 그가 느끼는 보람이 담긴다. 커피 한 잔 시켜 놓고 몇 시간이고 자리 차지하고 앉았는 손님이라면 보통의 카페에선 눈총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지만 이곳에선 몇 시간이고 한정 없이 책읽기에 빠져드는 손님을 특히 환영하고 우대하며 아리땁게 바라본다.
스물다섯 평의 작은 공간이지만, 경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다. 그 ‘아무 것’ 중에는 지역아카이브 구축작업도 있다. 막 들어서면 맞닥뜨리는 작은 전시공간(지금은 잊혀진 수원-여주간 협궤열차 ‘수여선’의 역사를 글과 사진으로 담았다)이 그 지향을 드러낸다.
‘날날북스’는 ‘책과 커피’ 말고도 ‘기록자의 공간’을 자처하며 ‘마을문화기록연구원’(마기연)의 역할도 하고 있다. ‘마기연’은 개발과 효율이라는 미명 아래 빠르게 사라져 가는 우리 주변의 모습과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마을공동체 아카이브를 실현하기 위해 설립된 협동조합. 마을 안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이야기를 마을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발굴하고 기록할 수 있도록 ‘누구나 평상’도 꾸리고 있다.
오가는 이 누구나 한데 어우러져 앉고, 함께 이야기꽃 피우는 공간인 골목 안 평상의 정신을 돌아보는 이름을 ‘마을기록학교’에 달았다. 최근 진행된 마을기록학교 ‘누구나 평상’ 1기에는 20명 이상이 참여했다.
이형희 씨는 “앞으로 이 공간에서 다양한 강좌를 꾸리며 공동체를 일구어 가고, 책을 통해 지역과 독자를 연결해 갈 것”이라고 말한다
명랑한 기운 풍기는 ‘날날’이란 이름의 안쪽에 ‘매일매일’ 읽고 기록하는 성실함이 쌓여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