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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22호] 영화감독 김재의 만나다
왕십리로 향하며, 며칠 전 만났던 스물한 살 남자아이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밤새 PC방에 있다가 밖으로 나왔는데, 새벽 공기가 너무 좋아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다가 고성방가로 경찰서를 다녀왔다는 이야기. 철없다 생각하며 듣고 넘기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친구가 맡은 새벽 공기의 청량함이 뭔지 알 것 같았고, 동시에 그립다는 감정마저 느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근래 뭔가가 새로워 그렇게 방방 뛰었던 적이 있었나 싶다. 게다가 만약 그 새벽을 함께 맞이했더라도, 나는 피곤하기만 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 씁쓸해졌다. 나이가 들어간다. 별것 아닌 일을 정말 별것 아닌 것으로만 여기기 시작한다.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몰라도 되는 것처럼 외면하기 시작한다. 뭐든 새로웠던 그때의 감각이 단지 그때라서 유효했던 것인지, 이제 와 알 길이 없다. 왕십리에 도착하니 내리던 비가 그쳤다. 그 동네는 스무 살 때 처음 서울에 올라와 살았던 곳이고, 좋아하는 감독님이 사시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그녀에게 처음 영화를 배웠다. 어느 여름이었고, 영화 좋아하던 사람들이 있었고, 처음 뭔가를 같이 만들어 냈고, 잘 안 웃는데 많이 웃었다. 칼럼을 접고 인터뷰를 시작하며 먼저 떠올랐던 건 그녀였다. 그녀로 인해 내 삶이 조금은 달라진 게 사실이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긴 쉽지 않다. 다행인 건 그녀가 자신을 내 삶에서 큰 의미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매번 자연스레 스칠 수 있었고, 서로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12년 전 새파랗던 나와 푸르던 그녀가 마주 앉았다.
폴란드 국립영화학교 감독과 수료
1997 <장롱 속에서> / 독립영화협회 열린영화제 우수상
2000 <얼굴> / 크라쿠프 국제 단편영화제 동상
2001 <꿈>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특별상
2001 <신부> / 폴란드 공영방송 TVP 방영
2002 <미호와 나> / 아시아나 국제 단편영화제 상영
2003 <피아노 레슨> /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
2006 <그녀, 8초 동안 날다> / KBS 독립영화관 방영
재의 우리가 언제 만난 거야?
경원 2005년이죠. 저 감독님 처음 봤을 때 화장 톤까지 기억해요.
재의 내가 화장도 했었어요?
경원 그럼요.
재의 그땐 그래도 예의를 차리고 다녔구나.
경원 완전 예쁘실 때였죠.
재의 여자로서 예쁠 때지.
경원 멋있었고요. 처음 강의실 박차고 들어오실 때부터.
재의 그랬나.(웃음) 자기는 1년에 한 번씩 꾸준히 나의 12년을 봐 온 증인이네? 어쨌든 고마워요. 재밌는 인연이야.(웃음)
경원 예전에 감독님 댁에 흑백 사진 있었잖아요, 그게 언제죠?
재의 커트머리일 때? 스물일곱. 동국대 대학원 다닐 때죠.
경원 문화학교 서울도 왕래하실 땐가요?
재의 그렇죠. 94년 말부터 96년 사이니까.
경원 문화학교 서울에 대한 이야기는 선배들에게 많이 들었어요. 지금도 활동하시는 분 많죠.
재의 많을 거예요. 지금의 곽용수 대표님, 조영각 피디님, 김형석 편집장님 같은 분들 계셨고, 저는 그냥 거기 다니던 영화 좋아했던 사람 정도였죠. 같이 모여서 비평도 하고 강의도 듣고 영화도 찍고. 구하기 힘든 영화들도 VHS로 볼 수 있었고요. 공부라기보다 영화 이야기 많이 나눌 수 있어서 행복했죠.
경원 거기 계시다가 우츠(폴란드 국립영화학교) 들어가신 거였죠?
재의 맞아요.
경원 여자감독님 중에 1호신가요?
재의 위로 김희정 감독님이 계시죠.
경원 그럼 송일곤 감독님이 제일 먼저셨나요?
재의 문승욱 감독님이 1호에요. 촬영 과엔 권혁준 촬영감독님, 조철호 촬영감독님 등이 계셨고요. 저 다닐 때는 한국학생 많았어요.
경원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님께 사사했다는 말씀도 기억나요.
재의 4학년 때 워크샵 수업을 들었었죠. 옛날 일이네요.(웃음)
경원 아그네츠카 감독님 아직 작품 활동하시고, <토탈 이클립스>(1995)나 <카핑 베토벤>(2006)은 정말 명작이잖아요.
재의 훌륭하시죠. 덕분에 당시 정말 좋은 커리큘럼으로 공부했던 것 같아요. 스튜디오에서 배우랑 감독이 영화를 찍고 있으면, 모니터 연결해서 나머지 학생들과 교수님이 옆방에서 보는 거죠. 어떻게 연출하는지. 영화음악 수업도 좋았는데, 볼레로인가? 음악만 듣고 거기 나오는 악기를 순서대로 적는 거죠. 악기 소리를 구분할 수 있는 귀, 그리고 영화에 어떻게 활용 가능할지 배우는 수업이었죠. 기억에 오래 남아요.
경원 한국 들어오셔서 강의하실 때 거기서 배우신 것 가지고 커리큘럼을 짜셨죠?
재의 그렇죠, 많이 가져왔죠.
경원 말씀 하신 악기 구분하는 수업이랑 이미지 배열해서 이야기 만드는 수업은 그때 저도 감독님한테 들었었어요.
재의 그랬었나요? 아, 했어요.
경원 정말 신선했죠. 마지막 수업 때도 기억나요. 항상 하시는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강의 다 끝나고 ‘자 끝, 이제 가’ 하고선 ‘아, 잠깐만 있어 봐. 이 이야기를 안 했어’ 그러고선,
재의 그렇게 반말로 하진 않았죠?(웃음)
경원 그렇죠.(웃음) 그러면서 그때 하신 말씀이, ‘가장 중요한 건 이거예요. 영화는 사람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이야길 수 있지만, 아니 사실 지금도 당연하진 않은 것 같아요. 돌아보면 그게 제가 영화를 계속하게 만든 문장이었던 것 같아요. 영화가 사람을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접근해야 하고, 진심을 다해서 연출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태도 같은 것.
재의 그렇죠.
경원 근데 그다음 해에, 아마 시나리오 한창 쓰고 계실 땐데, 저에게 그러셨어요. ‘경원 씨, 나 이제 영화에 대한 어떤 질문도 다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
재의 내가? 미쳤구나.(크게 웃음)
경원 생각했죠. ‘아 서른일곱이 되면 그럴 수 있게 되나 부다.’(웃음)
재의 내가 젊은 혈기에 코미디를 한 거야.
경원 감독님이 그렇다니깐 저는 그걸 또 믿었던 것 같아요. 물론 약간 의심은 했지만.(웃음)
재의 의심했어야 해.(웃음)
경원 지나고 보니, 그때 감독님께서 당연히 조급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귀국하신 지 얼마 안 되셨을 때니까요.
재의 그때 그런 말을 했으니까, 그 후로 시나리오 쓴다고 개고생을 한 거예요.(많이 웃음)
경원 저번에 만났을 때 그러셨잖아요. 영화도 자신을 사람들에게 표현하는 작업인데, 별자리 강의도 유사해서 감독님과 잘 맞는다고.
재의 영화가 판이 넓잖아요. 복합적이고 다양한 걸 할 수 있는 판. 문학, 음악, 미술 모든 게 다 들어갈 수 있는 매체고, 인간의 면면을 담을 수 있죠. 진짜 넓은 땅이라 평생 놀아도 지겹지 않고, 심지어 다 못 놀고 가요. 별자리도 그래요. 큰 판이에요. 과학, 심리, 종교, 역사, 명리까지. 둘 다 인간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할 수 있는 점이 비슷한 것 같아요. 어쨌든 이것도 사람 살리는 일이고, 어디 가서 업을 짓는 일은 아니니까. 근데 갑자기 책을 내 보자, 그러면 멀리 가는 느낌은 들죠.(웃음)
경원 영화랑 별자리 두 개 다 하면 안 돼요?
재의 원래는 글을 쓸 수 있게 경제적인 안정을 확보하고 싶었죠. 일주일에 강의 두 개만 해도 먹고 사는 데 큰 문제는 없으니까요. 욕심을 낸 건 아닌데, 그냥 일이 커졌어요. 욕심낸 시나리오는 안 되고 욕심을 안 낸 이 일이….(웃음)
경원 이러다 명견만리 같은 데 나오시는 거 아니에요?
재의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경원 나중에 TED 나오시고.
재의 아, 제발.(웃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아니 있잖아, 자기는 시나리오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 3일은 멍 때리고 있어야 진입을 하거든요, 글 안으로.
경원 저는 한 3개월 멍 때려요.
재의 그래야 진입을 하죠. 근데 계속 강의가 있으니까 멍 때리다 일하러 가고, 반복이었어요. 그래서 올 상반기엔 되는 대로 좀 내버려 두자 했죠.
경원 사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재의 그렇죠, 일단 머릿속에서 잡혀야지. 대하소설이라면 모를까, 우린 80장 쓰는 거니까. 알다시피 나는 시나리오 쓰는 걸 싫어했던 사람이에요. 내가 이걸 왜 해야 하는지 몰랐죠. 뭐 감독님들 중에서도 현장은 좀 힘들고 글 쓰는 게 더 좋다는 분도 계시지만,
경원 저는 현장이 한 번도 즐거운 적 없었던 사람이기 때문에.(웃음)
재의 나는 워낙 현장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보니까, 활동력이 넘치던 시기에 활동할 수 없다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글이 너무 안 써져서 천문 공부를 한 거구. 작년에 감이당(인문의역학연구소)에 계시는 스님께 질문한 적이 있어요. ‘지난 10년간 너무너무 일이 안 풀렸다. 그간 준비도 차곡차곡 열심히 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이해가 안 간다.’ 스님이 말씀하시더라고요. 기존의 체계가 너무 공고하면 전환될 때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그 말씀 듣고 이해가 갔어요. 대학 잘 나와서 영화 공부하러 유학 갔다 오고, 단편들 만들어서 영화제 가고. 어떻게 보면,
경원 좋은 시작의 초입 같은 느낌이었죠.
재의 근데 그게 시작의 초입이 아니라, 전환의 초입이었던 거예요. 그전 것들을 무너뜨려야 되는 시점이었던 거죠. 만약 이전에 굴곡도 좀 있고 그랬으면 전환의 시간이 짧았을 거예요, 흐름을 타면 되니까. 근데 너무 모범답안처럼만 살아온 거지. 그걸 다 무너뜨려야 하니까 오래 걸렸던 거죠.
경원 일리 있는 말씀이네요.
재의 근래 강의하는 곳 앞에서 크게 영화촬영을 하던데, 그걸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눈에 안보이는데 그리워하는 거랑, 눈앞에 보이는데 그리워하는 거랑은 참 다르구나. 어쨌든 지금은 글 쓰는 걸 좋아하거든요. 그게 감이당이 나에게 준 거예요.
경원 그곳에선 산문이든 뭐든 상관없이 쓰나요?
재의 거긴 인문학 공부하는 곳인데, 수업을 들으면 글을 써야 해요. A4 다섯 장짜리 에세이 형식이죠. 근데 일반 아마추어 분들도 정말 열심히 쓰는 거예요. 물론 비평도 혹독하게 오가지만요. 그러다 느꼈죠. ‘아니, 이게 이렇게 재밌는 거였어?’
경원 시나리오를 쓰면서는 뭔가,
재의 그런 생각해 본 적 없죠.
경원 도구였죠.
재의 도구였죠, 영화 현장을 가기 위한. 시나리오는 정말 그런 게 아닌데, 제가 잘못 진입한 거예요. 도구인데 뭐가 재밌겠어요? 몸과 정신이 통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어찌 보면 내 삶의 어느 정점에서 자기가 나를 봤고, 그 후로 전혀 다른 길로 가는 나를 본 거예요. 제게도 조금 이질적인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경원 저도 그래요. 금방 될 것 같다가, ‘아, 이게 이렇게 후딱후딱 되는 게 아니구나?’(웃음) 시간이 지나니까, ‘이런 각본은 그때 왜 썼지?’(웃음)
재의 ‘그래, 열심히 살았구나’ 하는 증거로만 남는.(웃음)
경원 내 거니까 예쁘긴 한데 누구 보여 줄 건 아닌, 그런.(웃음)
재의 글 쓰는 즐거움을 모르던 시절엔 시나리오 마지막에 ‘끝’ 자를 적는 즐거움 정도였어요. 10년간 겨우 거기까지밖에 못 갔어요. 매달 데드라인을 지키기 위해 신체를 찍어 눌러서 계속 고쳤죠.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에요. 그래서 그 후로 감이당에서 논어부터 시작해서 니체, 푸코, 주역 같은 동서양 고전들을 읽고 배운 거예요. 그렇게 3년쯤 지나니까 신체가 바뀌더라고요. 어쨌든 그 후론 그런 식으로는 안 썼어요. 즐겁게 썼어요.
경원 파트너의 문제는 아니었나요?
재의 혼자 썼으니까요. 근데 그건 느껴요. 그간 내가 글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구나. 그게 소설가가 됐든 시나리오 작가가 됐든. 어쨌든 이미 지났고, 그 시간들도 내 인생이겠죠.
경원 그 작품 생각나요. 2005년 감독님 편집수업 마지막에 폴란드 여자 친구 분이랑 찍으신 거 보여주셨어요. 낙엽 막 굴러가는 거.
재의 <미호와 나>(2002).
경원 그때 수업 끝나고 밖으로 나왔는데 한 친구가 그러는 거예요. ‘경원 씨, 왜 그런 이야기 했어?’ 왜냐면 제가 수업진행이 안 될 정도로 극찬했었거든요. 어떻게 찍은 건지 계속 질문하고. 정말 그런 정서의 영화를 찍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근데 그 후로 오랜 시간 시나리오 써 오시면서 현재도 그런 정서가 유효하다고 느끼시나요?
재의 찍는다면 당연히 나오겠죠. 시나리오에도 묻어나고요. 제가 쓰고 찍는 거니까.
경원 제작자들이 혹시 그런 정서에 태클을 걸거나 하진 않았나요?
재의 스토리나 캐릭터, 화두를 끌고 나갈 때 스스로 힘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서 작업시간이 길어진 거지, 밖에서 흔들어서 내가 힘들어진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아트나 상업영화를 구분 짓고 써 본 적도 없고.
경원 저는 상업피디들에게 작품 리뷰를 받으면, ‘인물이 행복하게 끝났으면 좋겠다’, ‘관객들에게 보여 주려면 조금 더 친절하고 덜 우울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는 등의 일반적인 리뷰를 듣거든요.
재의 나랑 자기랑 스타일 차이일 수 있는데, 제 작품들은 그렇게 우울하지 않으니까.(웃음)
경원 아, 그렇네요.(웃음) 저는 막 슬프게 죽고 끝나니까.
재의 제 건 그렇게 우울하지 않아요.(웃음)
경원 예전에 그런 말씀도 하셨어요. ‘작은 버젯(제작비)의 영화는 안 가겠다.’
재의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경원 네, 오래전에 전화통화 하시면서.
재의 좀 좋은 것만 기억하지.(웃음)
경원 아마 그땐 사극을 쓰고 계셨을 때니까 그러셨을 거예요.
재의 그땐 그랬나 봐요. 뭐 젊었으니까.
경원 왜 버젯 이야기를 하냐면, 예전엔 그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시나리오가 좋으면 왜 3억으로 찍지? 30억 받아서 찍으면 되지. 그렇게 준비하다 보니까 연출 필모그라피가 5년이 비더라고요. 그 사이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찍어야 감독이라는 생각, 내가 내 발목을 잡진 않겠다는 생각. 어차피 시나리오는 계속 쓰는 거니까요.
재의 안 그래도 올해는 여러 생각들을 하고 있어요.
경원 저는 작은 버젯이라도 <꿈>(2001)이나 <미호와 나>처럼 감독님 특유의 정서가 담긴 영화를 보고 싶어요. 진심으로요.
예전 《월간 토마토》에 실린 칼럼 중 멋진 시를 읽은 적이 있다. 젊음, 푸르름에 대한, 그리고 그 기억으로 살겠다는 다짐으로 끝나는. 내 기억 속 그녀는 언제나 당당하고 자신만만했다. 시간이 지나 그녀의 얼굴에서 글과 싸워 온 흔적을 발견할 때면, 스승이 아닌 동료로서 든든함마저 느꼈다. 언젠가 다시 나눌 지금의 푸르름에 대한 대화가 그녀의 새로운 영화 앞에 무색해지기를 바라며. 독자에게, 그리고 나와 그녀에게 다시 이 시를 전하며 줄인다.
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
사는 게 별반 값어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무섭게 반짝이며
(…)
푸른색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나를 치장하던 색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그 색은 이젠 내게 없다
섭섭하게도
나는 나를 만들었다
나를 만드는 건 사과를 베어 무는 것보다 쉬웠다
그러나 나는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 것이다
늙어서도 젊을 수 있는 것
푸른 유리 조각으로 사는 것
무슨 법처럼 한 소년이 서 있다
나쁜 소년이 서 있다
(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부분,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