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24호] 우연히 만난 백자항아리에 고려미술관을 담았다

단 하나의 백자 항아리에 끌려 골동품 가게 앞에 섰던 날이 40여 년 전. 조국은 해방되었으나 내게는 돌아갈 방법이 없었습니다. 언젠가 조국에 돌아간다. 그렇게 결심하며 선물 하나를 하자고 그 집 문을 연 것이 오늘의 시작입니다.
-정조문, 〈고려미술관 초대 이사장 개관사〉에서
낙낙한 양복을 챙겨 입은 아저씨들, 한복과 기모노를 입은 아주머니들이 한데 어우러졌다. 좁은 논두렁을 따라 어디론가 길게 줄지어 걸어가고, 때로는 멈춰 서 마이크를 잡은 사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다. 옆에는 휴대용 확성기를 어깨에 멘 사람이 섰다. 답사를 이끈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와 정조문 선생의 모습이다. 넓은 공터에 둘러앉은 이들은 손뼉도 치고 노래도 부르며 한데 어우러져 신나게 웃는다. 사람도, 유적도, 유물도 제자리가 아닌 듯한 곳에서 마주했다. 화면 전체가 온통 회색빛이다. 그 속에서 따뜻한 위로를 발 견한다. 공간과 유물, 유적, 국적이 다른 사람, 서로가 슬픈 미소를 건넨다. “1974년 2월 처음 시작한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유적답사’는 모두 32회를 진행했습니다. 많을 때는 500명가량 답사에 참여했습니다. 재일교포가 많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매회 10% 정도였고 나머지는 일본 사람이었습니다.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 부부와 시바 료타로 부부, 재일교포 소설가인 김달수 선생, 그리고 우리 부모님 등을 주축으로 많은 사람이 답사에 참 여했지요. 이 답사에는 ‘우정’이 있었습니다.”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유적답사’를 이끈 고 정조문 선생의 장남 정희두 씨의 얘기다. ‘우정’이라는 낱말이 일본에서 만난 우리 유물만큼이나 가슴을 저민다. 짝짓기 어색한 지적 호기심과 우정이라는 두 낱말은, ‘앎’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서로에 대한 앎은 관계의 평형추를 맞춘다. 어느 날인가 함께했던 ‘일본 속의 조선 문화 유적답사’를 담아 둔 흑백 영상은 ‘고려미술관’ 2층 전시실 한쪽에서 쉼 없이 돌아가며 방문객을 맞이했다.
1.

‘고려미술관’은 일본 교토 안에 있다. 교토시 기타쿠 시치쿠 가미기시쵸 15번지다.

평범한 마을을 지나는 이차선 도로에 접한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주택가에 스민 고려미술관을 만난다. 고려미술관을 설립한 정조문은 마땅한 장소를 찾기 위해 애썼고 일부 자치단체에서는 고려미술관 유치에 나섰다. 하지만 정조문은 ‘교토’를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그가 살아온 집에 미술관을 설립하기로 결정한다.

우연히 만난 작은 백자항아리는 점점 커져 고려미술관을 담아 버린 셈이다. 설립자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미술관은 도드라지지 않고 마을이 생길 때부터 그곳에서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고려미술관’은 서울올림픽 때문에 우리나라가 들썩거렸던 1988년 10월 25일 개관했다. 외국에 있는 유일한 우리나라 미술관이다. 정조문이 일본에서 모은 우리 문화재 1,700여 점이 고려미술관에 있다. 단 한 점도 우리나라에서 수집한 것은 없다. 모두 일본 땅에서 수집한 문화재다.

“1,700점도 적지 않은 숫자인데, 여전히 일본 민간 시장에서는 우리 문화재가 매물로 쏟아져 나옵니다. 최대한 수집하려 노력하지만 워낙 가격이 비싸 쉽지가 않습니다. 최근에도 임진왜란 때 조선 장군들이 함께 나라를 지키자는 내용에 서명한 연판장이 나왔습니다. 그런 문서가 어떻게 이 땅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문화재 가격이 3천만 엔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일본 시장에서 보아야 한다는 사실은 슬픈 현실입니다.”

‘고려미술관’ 정문은 전혀 무섭지 않은 무인석이 지킨다. 정문을 들어서면 넓지 않은 정원을 만난다. 잘 가꾼 나무가 자라는 정원 안에는 탑 등 우리 석조물을 배치했다. 낯선 땅 교토보다 그곳에서 우리 유물을 마주하는 현실이 더 낯설었다.

일행이 고려미술관을 찾은 날에는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와 고려미술관’전이 열렸다. 그는 1968년 정조문과 첫 인연을 맺은 후 깊은 우정을 쌓아 온 일본 지식인이다.

2.

‘우에다 마사아키’는 우리나라에도 ‘한일고대사연구’로 제법 잘 알려졌다. 초대 관장을 역임한 정조문에 이어, 작년 3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려미술관 2대 관장을 역임했다. 고려미술관이 그의 기획전을 열 정도로 그와 정조문, 고려미술관은 중요한 관계다. 정조문은 일본 안에 있는 한반도 유물과 유적을 돌아보며 일본학자의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 우에다 교수의 저서 ‘귀화인’을 읽고 감명을 받은 터라, 그를 적임자로 생각했다. 우에다 교수는 국가가 제대로 존재하지 않았던 고대에 해외에서 건너간 사람을 귀화인이라 부르는 것은 극히 일본 중심적이어서 ‘도래인’이라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많은 학자가 생각한 문제지만 공개적으로 논리를 펼치는 것이 쉽지 않은 사회 분위기였다.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우에다 교수에게 정조문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정조문의 제안을 우에다 교수도 흔쾌히 승낙했다. 1968년, 둘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해 반세기 동안 이어졌다. 깊은 우정이다.

이번 전시회는, 우에다 교수의 저작을 중심으로 한 서가를 한쪽에 옮겨두고 소장품을 전시하는 형태로 진행했다. 그중에는 중국에 남아 있는 광개토대왕비 탁본도 있었다. 1974년에 입수했지만 공개하지 않다가 1980년대에 공개한 탁본이었다. 양국간에 비문 해석을 두고 치열한 대립을 보이는 부분이 있어 조심스러웠던 게다. 이외에도 조선통신사 행렬도 등 관련 자료가 보였다. 고려미술관 정희두 상임이사는 조선통신사 행렬도가 갖는 중요한 가치를 설명한다.

“조선통신사 행렬도 등 관련 전시물은 무척 중요합니다. 한일 양국이 공동으로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물을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을 했습니다. 우에다 교수가 이야기한 ‘민제(民際)’라는 개념입니다. 매우 중요한 정신이지요. 국가 간 교류에 앞선 민간 교류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조선통신사는 민간교류의 대표적 사례라고 보는 거지요.”

정희두 이사는 한국이 통일하면 ‘고려미술관’을 한국 정부에 맡길 생각이다. 가능하다면 한국에도 일본 미술을 소개할 수 있는 일본 미술관이 생기기를 희망한다. 이것이 우에다 교수가 이야기하는 ‘민제(民際)’다.

3.

내년은 정조문 탄생 100주년, 고려미술관 개관 30주년이다. 현재 ‘고려미술관’을 찾는 관램객 중 99%는 일본 사람이다.

“얼마 전에는 도야마현에서 세 시간 동안 전차 타고 오신 분이 있었어요. 우리가 전시한 조선 가구를 보고는 매우 아름다워서 가슴이 설렌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여성 관람객은 가구를 좋아하고 조각보를 보면 감탄하지요.”

고려미술관은 1년에 1만 명 관람객이 목표다. 1999년에 제일 많은, 1만 4천 명이 고려미술관을 관람했다. 고려미술관 관람객은 한일 간 정치 상황이 미묘한 영향을 끼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했을 때나 북한이 미사일을 하나 쏘아 올릴 때마다 관람객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지금은 1년에 6~7천 명 정도 방문한다.

“우리가 돈이 많아서 이런 문화 운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진이 많은 나라에서 수장고에 문화재를 잘 보관해야 하는 문제나 향후 수집해야 하는 일본 땅의 우리 문화재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지요.”

정조문은 일본에 건너와 생을 마감할 때까지 남한과 북한 모두 단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대신 대마도에서 바다 건너 우리 땅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남북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고 통일을 이룬 한국 땅을 밟겠다는 강한 의지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 최인훈 《광장》에서

정조문이 바라본 대마도 앞 바다는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정조문은 남한도 북한도 선택할 수 없는 경계인이었다. 본인의 선택이지만, 결코 선택이라 할 수 없는 모순이다. 분단이 만들어 낸 슬픈 모순이다

경계인으로 사는 일본에서 만나는 우리 문화유산을 힘닿는 대로 모으고 이를 전시할 미술관을 개관했다. 이 미술관과 그 안에 담아 둔 유산은 남쪽의 것도 북쪽의 것도 아니다. 정조문이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것일지도 모른다. 통일 한국에 고려미술관을 내놓겠다는 것은, 개인의 선한 의지를 넘어선, 우리에게 남겨 준 숙제다.

우리는 산에서 내려와 승용차를 탔다. 정조문은 말없이 그저 차를 몰며 산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정조문은 급히 차를 멈추더니 핸들에 얼굴을 묻고 울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내가, 뭘 어떻게 했다는 거야!” 정조문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정조문은 쥐어짜는 듯이 소리를 내면서 계속 울었다. 뒷자리에 있는 나와 이진희도 눈물이 맺혀 시선을 둘 데가 없어 서로 다른 쪽을 향해 밖을 바라보았다. 정조문의 머리가 유난히 더 하얗게 세어 보였다. 정조문은 드디어 울음을 삼키며 마음을 다잡고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한참을 가다가 정조문은 조용한 목소리로 ‘김 선생’ 하고 정색을 하며 나를 불렀다. “나라와 민족이란 도대체 무엇일가?” 정조문이 나한테 물었다. “모르지, 알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지금 그것 때문에 울었다는 것뿐이야”라고 나는 답했다.
- 《정조문과 고려미술관》(도서출판 다연, 82~83쪽, 작가 김달수가 대마도 방문했을 때의 모습을 소설 ‘쓰시마까지’에서 표현한 내용 인용)
글 사진 이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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